도경수, 박정민, 임시완, 류준열, 이제훈. 지금 가장 뜨거운 남자 배우들의 얼굴을 새롭게 들여다봤다. 두 번째는 박정민이다. 겉으로 크게 쌍꺼풀이 진 박정민의 눈은 나른해 보이기도, 어쩔 때는 퍼질러 누워 게임이나 할 것처럼 게을러 보이기도 한다.
“야, 컵라면. 넌 그냥 내가 시키는 것만 해.” tvN <안투라지>에서 대형 매니지먼트사 대표 김은갑(조진웅 분)은 톱스타 차영빈(서강준 분)의 친구이자 매니저인 이호진(박정민 분)에게 항상 ‘컵라면’이라고 부른다. 김은갑이 이호진을 처음 봤을 때 ‘현장에서 컵라면을 나르던 제작부 막내’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연예인들의 삶과 섹스 판타지를 보여주기 위해 저절로 난장이 돼버린 드라마 안에서, 박정민은 유일하게 현실 세계의 사람을 연기한다. 편의점에 가면 수없이 진열된 컵라면들처럼 운 좋게 자기를 간택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톱스타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축 처진 어깨를 펼 일이 드문 아주 평범한 사람이 바로 그다.
박정민은 자신의 책 <쓸 만한 인간>에서 스스로에 관해 “못생긴 데다 머리도 큰” 사람이라고 말한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겠지만,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 그의 모습은 외모에 대한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세상을 관망하는 제3자의 느낌을 풍긴다. 겉으로 크게 쌍꺼풀이 진 박정민의 눈은 나른해 보이기도, 어쩔 때는 퍼질러 누워 게임이나 할 것처럼 게을러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눈두덩 위로 늘어진 쌍꺼풀과 멍한 회갈색의 눈동자가 만나면 독특한 시너지가 생긴다. 흐린 눈 속에 아무 것도 없거나, 혹은 너무 많아서 다 담아낼 수 없거나. <사바하>에서처럼 웃음기 없는 얼굴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이비 종교인이 되거나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처럼 서번트증후군을 앓는 피아노 천재를 연기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박정민이 맡았던 역할 중에는 일상에서 툭툭 던지는 말 속에 유효타가 많은 인간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온통 흑백으로 된 영화 <동주>에서 박정민이 연기한 송몽규는 방 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윤동주(강하늘 분)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동주야, 신앙이 뭐가 그리 중요하니.” 배우 박정민은 상대의 의견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한다기보다 자기의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상대를 흔드는 사람에 가깝다. <오피스>의 이원석은 은연중에 과장을 멀리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진짜 우리끼리 말 안 하고 가도 되나?”라며 당연히 남아있어야 할 일말의 양심을 언급한다. <염력>의 인권변호사 김정현이나 <변산>의 래퍼 학수도 대단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사람이라면 으레 느낄 수 있는 좌절과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인물이다. 데뷔작인 독립영화 <파수꾼>에서조차 그는 친구의 죽음을 두고 뒷걸음질 치던 배희준이라는 소년을 연기했다. 배희준은 자기합리화의 틀 안에서 쉽게 망가지곤 하는 사람들의 추억을 아프게 들춰낸 인물이었다. 가끔은 남들에게 휩쓸려 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이 고민해야 할 최소한의 삶의 기준은 존재한다. 이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고민하는 윤리적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제시하는 역할이 배우 박정민에게 주어져 왔다.
자꾸만 자신을 “찌질이들” 중의 하나라고 칭하는 박정민이 선택한 시나리오들은 그를 기용한 제작자들의 내면까지도 어렴풋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그가 연기를 계속 할 수 있는 까닭은 못생겨서도 아니고, 머리가 커서도 아니다. 하나도 특별해 보이지 않는 “찌질이들”의 얼굴을 자처하기 때문에 거꾸로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짐작컨대 가끔은 함께 데뷔한 “머리 작은 이제훈”을 떠올리며 씁쓸했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씁쓸함 또한 현실에서 흔하디흔한 아무개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다만, 아무개 배우들이 잘생긴 얼굴과 뛰어난 연기력만으로 그려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이제 ‘컵라면’이었던 박정민의 얼굴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험한 세상에 찌들어서 모든 것을 관망하게 된 사람이 사실은 가장 약한 인간이라고 하는데, 그건 진실일까 거짓일까? 박정민이라는 배우의 가치는, 이 질문을 던지고 그가 스스로 작품을 통해 답을 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박정민이 사는 세상은 바로 여기다. 화려한 연예인들의 세상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평범한 세상 말이다. 이런 배우의 존재는 종종, 아니 자주 위안이 된다.
- 에디터
- 글 / 박희아( 기자)
- 일러스트레이터
- 조성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