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우리 앞에 당도할 구찌의 미래

2019.04.26GQ

우리가 아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모습은 그게 다가 아닐 지도 모른다.

자정 즈음, 밀라노의 호텔 직원이 나무 사과 상자를 방으로 가져왔다. 구찌의 2019 가을 겨울 컬렉션 초대장이었다. 상자에 담긴 건 흰색 가면 하나가 전부였다. 장갑 한 짝, 약병, 호밀빵 같은 별난 패션쇼 초대장을 다 받아봤지만, 이렇게 음산하고 섬뜩한 건 처음이었다. 일단 뚜껑을 꼭 닫아 문 앞으로 밀어뒀다.

다음 날, 구찌 쇼장은 어젯밤의 기억과는 많이 달랐다. 12만 개가 넘는 LED 전구로 만든 타원형 벽, 100미터가 넘는 길이의 런웨이, 그리고 공간 전체를 감싸고 있는 미러 소재는 눈이 금세 피로해질 만큼 화려했다. 쇼 시작 전,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이번 컬렉션에 영감을 준 ‘페르소나’에 대해 설명했다.

연극 배우의 개인적인 얼굴이 아닌 연극에서 맡은 배역을 나타내는 마스크. 그 가면을 쓰고 벗는 순간 다른 사람이 되는 인간의 양면성이 이번 패션쇼의 주제다. 미켈레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가 나타내려는 가면을 선택하면 그 사람이 된다”라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 컬렉션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알고 보니 초대장은 파피에 마세 형태로 제작한 가면으로, 그리스 신화 속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얼굴이었다.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자녀이자 남녀 양성성을 의미하는 신.

준비한 가면의 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쇼장을 채웠다. 재러드 레토, 앤드류 가필드, 셀마 헤이엑 피노, 시얼샤 로넌 등이 자리에 앉았고 낯익은 설현의 모습도 보였다. 12만 개의 LED 전구가 동시에 번쩍이며 쇼가 시작됐다. 상어 등뼈 모양의 스터드가 박힌 첫 번째 가면을 쓴 모델이 등장했고, 그 뒤로 90여 명의 모델이 런웨이를 지나갔다. 가장 눈에 띈 건 이전보다 더 대담해진 젠더리스 무드였다. 미켈레가 보낸 헤르마프로디토스 가면에서도 알 수 있듯 이제 구찌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에디터는 아직도 남녀가 헷갈리는 몇 룩이 있다.) 타이를 맸다고 다 남자가 아니었고 핑크 부츠를 신었다고 모두 여자는 아니었다. 새로워진 건 클래식 테일러링이었다. 구찌를 대표하던 스웨트나 트레이닝 팬츠 대신 수트와 셔츠, 코트와 재킷처럼 테일러링을 강조한 옷이 부쩍 늘었다. 라펠이 큰 스리피스 수트, 종이 소재처럼 만든 볼링 셔츠, 브리티시 체크무늬 코트, 가봉 상태의 디테일을 넣은 재킷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또한, 테일러드 팬츠 밑단의 여러 변주는 참 신선했다. 셔츠 커프스를 달거나 조거 팬츠처럼 조이거나 끈으로 묶는 방식은 다양한 실루엣을 만드는 핵심이었다. 여기에 아플리케 톱, 퀼팅 점프 수트, 실크 블루종, 레이스 케이프, 인조 모피 머플러, 뱀피 팬츠 등 버라이어티한 소재의 등장은 컬렉션을 훨씬 풍성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번 컬렉션의 주제인 페르소나를 확실하게 드러낸 여러 종류의 가면, 미켈레 스타일의 볼드한 이어커프스와 십자가 목걸이는 런웨이에서도 존재감이 확실했다.

마치 오트 쿠튀르 쇼를 본 듯했다.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스타일, 상상하기 힘든 수공예 스킬, 환상과 허구에서 시작된 판타지. 최고의 맥시멀리스트로 불리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상상력과 호기심의 끝이 어디인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에디터
    박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