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년간 우리는 어벤져스와 함께 울고 웃었다. 왜 우리는 어벤져스에 그토록 매혹됐을까. 눈물을 잠시 멈추고 몇 가지 이유를 떠올려봤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 스물두 번째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에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엔드게임>은 개봉 첫 주 전 세계에서 12억 달러를 벌어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웠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가 갖고 있던 이전 기록은 6억 4천만 달러. <엔드게임>의 절반 수준이다. <엔드게임>은 개봉 첫 주 성적만으로 단숨에 역대 박스오피스 18위 자리에 올랐고, 국내에선 개봉 7일 만에 700만 명을 동원했다.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된 MCU는 앞으로도 이어지지만 12년간 마블 세계를 지켜온 ‘어벤져스 군단의 여정’은 <엔드게임>으로 일단락된다. 박스오피스만 놓고 보면 마치 이 피날레에 전 세계가 동참한 것만 같다. 어벤져스가 MCU는 물론 현실 세계까지 호령하게 된 배경, 우리가 이들의 은퇴에 눈물 짓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1. 혼돈의 시대에서 영웅 역할을 했다
난세엔 영웅이 필요한 법이다. MCU의 선봉에 선 아이언맨은 2003년 이라크 전쟁과 함께 영화화 기획에 들어갔다. <아이언맨>이 개봉한 2008년 말에는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MCU가 펼쳐진 지난 12년간 세계 경제는 호전됐지만 경제 양극화는 심화됐고, 전 세계가 ‘테러리즘의 시대’와 마주했다. 한국 상황도 비슷하다. 2019년 3월 현재 청년실업률은 10.8%, 청년 체감실업률은 그보다 훨씬 나쁜 25%대를 기록 중이다. 영화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 역할도 하지만 팍팍한 현실을 잊게 하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사이 관객은 영화적 판타지를 채우고, 거대 악과 맞설 대리인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어벤져스’를 선택했다. <엔드게임> 감상평의 대부분은 “마블의 시대에 살게 해줘서 고맙다”거나 “내 20대를 함께해줘 고맙다”는 등 긴 시간을 함께한 ‘마블 세계에 대한 감사 인사’로 채워져 있다. <엔드게임>은 사실 몇몇 히어로에겐 마지막 무대였다. 삶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 있음을, 모두에겐 반드시 떠나야 할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엔드게임>은 전한다. 70년대에 시작된 <스타워즈> 시리즈가 ‘미국인들의 대서사시’라면 할리우드가 세계 극장시장을 장악한 후 나온 MCU는 ‘전 세계인의 대서사시’였다. 영화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20~30대에게 어벤져스는 청춘의 한때를 함께 보낸 친구 같은 존재였다. 이들의 은퇴 혹은 부재가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 이유다.
2. 결점이 있는, 인간적인 슈퍼히어로였다
수많은 슈퍼히어로 중 유독 어벤져스에 공감하는 이가 많은 건 왜일까? 다수의 평론가는 이들이 ‘인간적인 슈퍼히어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이언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신이 만든 전쟁 무기에 목숨을 잃을 뻔하고, 곧 무기 사업에 회의를 느낀다. 캡틴 아메리카는 사랑과 우정에 힘겨워하고, 토르는 형제와 시시때때로 다투며, 블랙 위도우는 KGB 소속 스파이이자 암살자로서의 과거를 후회한다. 반면 판권 문제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에 와서야 어벤져스 멤버가 된 스파이더맨은 한때 피자를 배달했다(스파이더맨의 판권은 소니에 있다). 이처럼 마블의 영웅들은 초능력과 인간미를 동시에 갖고 있고, 이것이 관객의 공감을 사는 요소가 됐다. 여기에 유머가 더해지며 친근감은 더 커졌다. 과묵한 DC 히어로들과는 달리 마블의 세계엔 아이언맨이 아니더라도 앤트맨, 스타로드, 로켓 등 입담을 자랑하는 이가 많다. <엔드게임>에선 근엄함의 상징이던 헐크마저 농담을 던진다.
3. 연대를 통해 세계관을 확장했다
영웅은 고독해야 할까?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 케빈 파이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이언맨> 쿠키 영상에 등장한 쉴드의 국장 닉 퓨리는 토니 스타크에게 “세상에 슈퍼히어로가 자네뿐인 것 같나?”라고 묻는다. 그리고 곧 그에게 “더 거대한 세계의 일원이 되었”음을 알린다. <인디아나 존스> <스타워즈> <스타트렉>를 보며 자란 케빈 파이기는 프랜차이즈의 장단점을 일찍 간파했다. 그는 시리즈의 경우, 세계관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시퀄, 프리퀄, 스핀오프를 덧대도 서사의 생명이 기대만큼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팀플레이’를 하는 히어로 군단 ‘어벤져스’는 <어벤져스> 시리즈뿐 아니라 처음 함께 뭉친 이래로 MCU의 모든 영화에 직간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로써 각각의 히어로를 앞세운 단독 영화 모두 ‘마블 세계’ 안으로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마블의 세계가 넓어지고 서사의 리듬이 길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개인주의의 시대에 ‘연대’를 강조한 것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4. 새로운 콘텐츠 소비 방식을 읽었다
블랙 위도우의 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2년마다 ‘마블 타임’을 보냈다. 우리는 거의 가족에 다름 아니다”라고 했다. 마블 타임에 대한 그의 소회를 관객 또한 느낀다. 다만 그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2008년 이후 일년에 한 편꼴로 소개되던 MCU 영화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매해 두 편, 2017년과 2018년엔 매해 세 편이 나왔다. 올해 역시 3월 <캡틴 마블>과 4월 <엔드게임>에 이어, 오는 7월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이 소개된다. 2007년 넷플릭스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극장 밖은 ‘스트리밍 시대’가 된 지 오래. 시즌제 드라마를 빈지뷰잉(몰아 보기) 방식으로 소비하는 젊은 층에게 MCU는 극장에서 그나마 짧은 간격으로 연속해 즐길 수 있는 블록버스터 서사극으로 자리매김했다. 연간 배급 편수를 늘려 짧게는 3개월, 길면 6개월 간격으로 꾸준히 영화를 개봉해, 관객이 마블 세계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한 것. 특히 2009년을 제외하고 2008년부터 지금까지 MCU는 매해 4월 말 어김없이 관객을 찾아왔다. 지난 10여 년간 이 시기는 일종의 ‘MCU 시즌’으로 자리잡았다.
5. 시대의 흐름을 반영했다
팬덤은 양날의 검 같다. 팬덤이 강해질수록 확장성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MCU는 시대의 흐름을 읽으며 이마저 넘어선다. 오바마 재임 시절 기획한 <블랙 팬서>로 북미 역대 박스오피스 3위를 기록하고, ‘타임즈 업’을 외치는 시대에 <캡틴 마블>을 내놓아 관객층을 넓혔다. 케빈 파이기는 또 변방의 히어로를 소환하기로 유명한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회장인 앨런 혼은 <닥터 스트레인지>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대해 “우리가 영화를 만들기 전 이들을 알고 있던 이는 백 명 중 아마 다섯 명쯤 됐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뉴 페이스’도 MCU에 첫발을 들이는 순간 곧바로 중심에 설 수 있다. 개별 영화 모두 전체 서사와 교집합을 갖고 있기에 기존 팬은 새 시리즈의 고정 관객으로 남고, 새로 유입된 관객은 MCU의 역사를 탐방하게 된다. 오는 7월 개봉하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이후 현재 새로운 MCU 프로젝트로 얘기되고 있는 건 < 이터널스>와 <상치> 정도인데, <상치>가 아시아 슈퍼히어로인 걸 감안하면 성별과 인종, 세대를 넘어서려는 MCU의 시도는 이후로도 계속될 듯하다. ‘가족주의’를 표방하는 디즈니는 트럼프 시대에 마블을 통해 이렇게 ‘다문화주의’를 강조하며 세계를 확장한다.
문자로 세상을 얘기하던 시대에 영웅은 신화 안에 살아 있었다. 그러나 영상이 문자를 밀어낸 지금의 시대엔 영웅이 영화 안에서 살아간다. 어쩌면 어벤져스는 마땅한 고전이 없는 지금의 시대에 전 세계를 아우르는 영웅 역할을 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비록 허구일지언정 거대 악과 맞설 이들로 ‘어벤져스’가 존재했다는 건 하나의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 역할 하나만으로도 어벤져스의 지난 12년간의 활동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하다.
- 에디터
- 글 / 박아녜스(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