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심과 실효성은 생략한 채 규모에 집착해 지은 경기장들이 텅 빈 성벽처럼 방치돼 있다. ‘왜 저렇게 지었을까?’라는 의문조차 공허해질 무렵 답답한 흐름을 깨는 해결사가 등장했다.
우리는 지금껏 크고 웅장하고 압도적인 걸 원했다. 친구가 자동차를 사면 얼마나 비싸고 배기량이 얼마인지 먼저 따졌다. 집을 산 친구가 있으면 집 크기부터 물었다. 규모가 곧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 규모’, ‘국내 최장거리’, ‘국내 최다 보유’ 등의 수식어가 붙어야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었다. 하다못해 찜질방 하나가 6층짜리 건물 전체를 다 쓰는 곳도 있다.
경기장도 마찬가지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우리는 세계적인 규모의 축구장을 10개나 보유하게 됐다. 우리는 이 웅장한 경기장을 보며 마치 금방이라도 축구 선진국이 된 것처럼 기뻐했다.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 순식간에 전국에 생겨나자 우리는 이 경기장 자체만을 바라보며 뿌듯해했다. 물론 이 경기장을 월드컵 본선 당시 외에 관중으로 가득 채워본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 웅장한 월드컵 경기장을 놔두고 또다시 매머드급 경기장을 전국에 신축했다. 최대 수용 인원이 3만5천 명에 이르는 의정부종합운동장이 9백24억원을 들여 세워졌고, 경기도 고양시는 1천3백48억원을 들여 무려 4만2천 석의 규모를 자랑하는 경기장을 지었다. 2006년 진주는 1천8백11억원을 투입해 초대형 경기장을 신축했고, 경기도 화성시 역시 3만5천 석 규모로 2천3백60억짜리 경기장을 지었다. 인천시도 문학월드컵경기장이 있음에도 2014 인천 아시아게임을 치른다고 4천4백60억원을 들여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건립했다.
이뿐 아니다. 화룡정점은 용인시였다. 용인시는 3천2백18억원을 투입해 3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또다시 지었다. 이 경기장에 건립할 예정이던 볼링장과 지하 주차장, 보조 경기장은 돈이 없어 다 짓지도 못했다. 전국체전을 치르려면 보조 경기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이 경기장은 3천억원 넘게 들여놓고, 전국체전도 열지 못한다. 2018년 1월 1일 개장한 뒤 2019년 4월 한국과 아이슬란드의 여자 축구 A매치를 열 때까지 단 한 경기도 치른 적이 없었다.
우리의 ‘크고, 높고, 넓게’라는 마인드가 낳은 경기장은 이렇게 전국에 흉물처럼 방치돼 있다. 이들이 매력적이지 않은 건 규모만 클 뿐 우리의 실정에 맞게, 그리고 관람 편의에 맞게 건립된 경기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치적이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을 뿐 관중을 위한 경기장이 아니니 당연히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5만 명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에 육상 트랙까지 있다면 골대 뒤에서 반대편 골대 쪽은 눈으로 확인하기도 어렵다. 이건 어디까지나 초대형 행사를 치르기 위한 장소일 뿐 스포츠 관람을 위한 경기장으로서의 제 기능은 기대하기 어렵다. 아니면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해 프로 경기를 열 때마다 5만 명의 관중이 들어찬다면 모를까. 안타깝지만 1만 명의 관중만 와도 ‘구름 관중’이라는 표현을 쓰는 우리 사정상 매머드급 경기장은 세금 먹는 하마일 뿐이다. 정말 슬픈 건 이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때는 아이돌의 콘서트나 종교 행사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FC의 새 홈 경기장인 DGB대구은행파크는 기념비적인 장소다. 다들 경기장 규모에만 집중하면서 실패를 맛볼 때 DGB대구은행파크는 정말 제대로 된 ‘한국형 스타디움’의 정답을 제시했다. 1만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담한 규모에 관중석과 그라운드의 거리는 7미터에 불과하다. 1948년 건립된 대구시민운동장 부지에 5백15억원을 들여 경기장을 리모델링했다. 앞서 소개한 초대형 규모의 경기장에 비하면 대단히 적은 돈이다. 그나마 역사가 담긴 과거 조명탑과 본부석 일부를 남겨놓으려고 했지만 안전과 공간 활용을 이유로 철거하게 되면서 3백50억원이었던 사업비가 5백15억원까지 늘어났다.
DGB대구은행파크는 아담한 규모지만 그 어떤 초대형 경기장보다 웅장한 느낌을 준다. 경기장 규모가 주는 웅장함보다 작은 경기장이라도 이곳을 가득 채운 팬들의 함성이 주는 웅장함이 더 크다는 걸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관중 전체가 경량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좌석을 발로 구르며 응원하는 모습은 벌써 이곳의 상징이 되고 있다. 대구FC의 외국인 선수 세징야는 “경기 도중 팬들이 발을 구르며 응원하는 소리가 그라운드를 울릴 정도로 잘 들린다. 소름이 돋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년 비인기 구단이던 대구FC가 올 시즌 ‘핫’한 팀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경기력도 있지만, 새 경기장의 이점이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DGB대구은행파크는 ‘행사형 스타디움’이 난립하는 이 땅에서 오로지 스포츠 관람을 위한 최고의 시설이 어떤 모습인지 제시했다. 선수들이 경기 도중 충돌하며 내지르는 괴성까지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이 경기장 관중석에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대구FC 상대팀을 욕하며 경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 등번호 식별도 어려운 초대형 경기장에서 어떻게 경기를 봤나 싶다. 명칭 논란으로 갈등은 있지만 첫 열과 필드까지 거리가 30미터로 모든 층에서 근거리 관람이 가능한 KBO리그 창원NC파크도 ‘한국형 스타디움’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러 지자체와 구단에서 DGB대구은행파크의 흥행을 바라보며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다. 부천시처럼 보조경기장에 가변석을 설치해 전용구장의 느낌을 내거나 광주FC처럼 아담한 규모의 전용구장 신축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광주는 1백20억원을 투입해 7천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고, 여기에 골문 뒤편 가변석까지 포함해 1만 명의 관중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경기장을 구상 중이다. 일단 초대형 경기장으로는 흥행이 어렵다고 판단해 규모를 줄이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다. 지금껏 오로지 크기와 규모, 외관에만 신경을 써왔던 이들이 시각을 달리했다는 점은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무려 17년 만의 성과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 DGB대구은행파크가 될 수는 없다. 접근성이야 경기장마다 사정이 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지붕 유무다. DGB대구은행파크가 작은 규모에도 몰입감을 줄 수 있는 건 경기장을 둘러싼 4면의 지붕 때문이다. 이 지붕은 경기 관람을 방해하는 햇빛과 비를 차단함과 동시에 관중의 환호성이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다시 말해 축구 열기를 더 뜨겁게 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지붕을 덮게 되면 비용이 더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대구 역시 새 구장 건립에 사용한 5백15억원 중 1백억가량을 지붕에 투입했다.
부천이나 광주는 지붕 없는 경기장을 구상 중이다. 그래야 예산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아담한 규모에 지붕이 4면을 덮어주지 않으면 경기장은 더더욱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다. DGB대구은행파크 같은 관중 친화형 경기장을 꿈꾸다가 동네 공설운동장이 될 수도 있다. 실용성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경남FC는 창원축구센터라는 아담한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지만 한여름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거나 비바람이 몰아칠 때면 관중의 발걸음이 뚝 끊긴다. 창원축구센터의 지붕은 W석에만 설치되어 있어 기상이 좋지 않을 경우 다른 구역의 팬들은 많은 불편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규모만 줄여서 관중을 그라운드 앞으로 바짝 다가오게 한다고 ‘한국형 스타디움’이 되는 건 아니다. 작은 규모에서도 대형 경기장 이상으로 몰입감을 주기 위해서는 관중이 온전히 경기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예산을 줄이기 위해 지붕을 생략한 경기장을 짓는 건 또다시 우리가 2002년 월드컵 이후 초대형 경기장에 몰입하며 겪은 시행착오를 답습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제 초대형 종합경기장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DGB대구은행파크, 창원NC파크 등이 ‘한국형 스타디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담하지만 내실 있는 이런 경기장이 팬들의 사랑을 받는 건 당연하다. 언젠가 이 경기장들이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작은 규모 때문에 증축을 고민할 날이 오길 기원한다. 모르긴 몰라도 ‘행사형 초대형 경기장’을 관중으로 가득 채우는 것보다 DGB대구은행파크가 증축하는 날이 훨씬 더 빨리 올 것이다. 참고로 DGB대구은행파크는 네 경기 연속 매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글 / 김현회(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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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FC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