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전환점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그 세계는 진보하고 있는가? 퇴행하고 있는가? 두 명의 필자가 <기생충>을 두 가지 방식으로 봤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네 가족은 기이할 정도로 낙천적이다. 좁고 습한 반지하 방에 사는 네 가족은 가난에 충분히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계획이 생긴다. 친구의 주선으로 부잣집 고등학생 딸의 영어과외선생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기우(최우식)는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누이 기정(박소담)을 부잣집 막내 아들의 미술 과외 선생으로 추천한다. 그 뒤로 계획은 점차 치밀하고 대담해진다. 아버지 기택(송강호)과 어머니 충숙(장혜진)까지 끌어들여 판을 키운다. 개인사업이 가족사업으로 확대된다. 결국 모두 다 취업에 성공한 네 가족은 반지하 방에서 고기도 굽고, 만원에 열두 캔인 맥주만 먹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만 같다. 술을 잔뜩 먹고 흥에 겨울 줄만 알았던 그 밤에 찾아온 불청객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은유이기도 하지만 직격탄처럼 날아드는 한 순간의 직설이기도 하다. 주인이 사라진 대저택의 거실에서 호강을 체험하던 가난한 가족들은 그 누구도 예상하거나 예감하지 못했던 바닥과 맞닥뜨린다.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마주한 더 깊은 바닥은 절망과 혼돈을 안기는 동시에 선을 넘는 깨우침을 안긴다. 항상 선을 넘을 듯 넘을 듯 넘지 않지만 결국 선을 넘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깨닫게 만든다. 빈부 차이란 태도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감각적인 영역일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든다.
‘지하철 타는 놈들 특유의 냄새’를 혐오하는 박 사장(이선균)은 자신이 혐오하는 그 감각이 어느 바닥에서 유래된 것인지 짐작조차 못한다. 정작 혐오의 대상이 되는 기택의 가족만이 안다. 반지하 냄새라는, 좀처럼 벗겨지기 힘든 가난의 정체성. 냄새 앞에서 코를 막는 상류층의 무신경함과 하류층의 모욕감이 서로 선을 넘는다. <기생충>은 바로 그런 양극화된 계층적 분열을 언어가 아닌 감각으로 건드린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선 관객들 중에선 아마 그 선을 넘었다는 냄새, 그러니까 지하철 타는 놈들 특유의 냄새에 관해 두고두고 곱씹었을지도 모른다. 상영이 끝난 뒤에 남는 여운이 감상적인 측면을 넘어 실제적인 감각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생충>은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적 체험으로 다가온다. 쏟아지는 비를 맞고 수많은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기택과 기우 그리고 기정의 모습에서, 그 와중에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는 그 암담함 속에서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계층을 되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저택의 호사로움을 탐닉하고 부유한 삶에 자신들을 대입하던 가족들이 급류에 휘말리듯 직면한 위기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한 뒤 자신들의 처지로 돌아가듯 긴 계단들을 따라 끝없이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순간에서 전해지는 허탈함은 오직 영화 속 기택의 가족들만의 몫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기생충>이라는 제목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은 부유한 타인의 삶에 도취돼 있던 가족의 현실감각을 제 자리로 돌려보내는 동시에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위기감으로 관객을 몰아간다. 극의 전반을 지배하던 코미디 감각이 강렬한 서스펜스로 급선회한다. 기택의 가족들이 반지하 방보다 더욱 깊고 음침하게 내려앉은 삶을 목격할 떄 관객들 역시 영화가 비로소 드러낸 괴상한 발톱과 마주해야만 한다. 영화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더 이상 웃을 수 없는 코미디가 이어지고, 심상치 않은 서스펜스의 예감이 목까지 차오르는 듯한 기이한 기분이 느껴진다. 영화의 곳곳을 채우고 있던 수많은 디테일들이 날카로운 복선들로 돌아와 예사롭지 않은 예감들로 이어진다.
<기생충>은 빈부 격차라는 이 세계의 이분법적인 현실성을 보여주되 누군가의 편에 서지 않는다. 다만 직시하고 객석을 향해 공유할 뿐이다. 혐오와 차별의 뇌관들을, 폭력의 연쇄반응을, 그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기생충>은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 속에 전시되고 있지만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납득되고, 더없이 잔혹한 우화로 팽창하지만 현실적 울림이 있는 사연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반지하 방에 자리한 기우의 얼굴에서 시작해 역시 반지하 방에 자리한 기우의 얼굴로 끝나는 <기생충>의 수미상관 구조는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가난의 굴레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만들어 가혹하다. 나직하게 들려지는 기우의 새로운 계획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긴 겨울 같다. 결과적으로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안에서 유일하게 절망적인 여운을 남기는 동시에 가장 속 깊은 연민을 품게 만드는 영화 같다. 봉준호 감독의 경력이 <설국열차>와 <옥자>라는 반환점을 지나 비로소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기생충> 이후로 봉준호가 나아갈 세계가 더욱 궁금하다. 너무 보고 싶다.
글/민용준(영화 칼럼니스트)
<옥자> 이후 봉준호의 세계가 궁금했다. 한국이란 지역적 정체성에 기반한 첨예한 정치적 텍스트이자 기묘한 장르 영화를 만들던 그가 할리우드에서 붕 뜬 우화 두 편을 만들었을 때도, 속단하진 않았다. 지역 특수성에 대한 애정, 오작동된 블랙 코미디, ‘송강호’라는 엇박자 모두 할리우드 안에 너끈히 포섭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다시 그가 땅에 밀착한 이야기를 만들기를 기다렸다. 이후의 차기작은 자의든 타의든 새로운 장이 될 터였다.
예상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봉준호의 세계가 또 다른 영역으로 진입했다는 점에서는 맞았고, 그 진입의 방향이 퇴행에 가깝다는 면에선 틀렸다.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이 데뷔 이래 매진해온 계급, 자본, 계층 간 이동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 세계엔 부자와 빈자가 있고, 건너갈 수 없는 가파른 수직적 간극이 있다. 그는 거기서 가장 깊은 밑을 들여다보는 데 익숙하다. 봉준호의 지하실엔 늘 뭔가가 있었다.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 지하엔 주민들의 반려견을 은밀히 잡아다 먹는 경비원이 있었고, <괴물>의 한강 교각 밑에선 미군의 독극물 방류와 정부의 방치로 태어난 괴물이 사람의 뼈를 뱉었으며, <설국열차>의 꼬리칸에선 하층민들이 살기 위해 바퀴벌레를 씹었다. 봉준호식 지하생태학의 법칙은 이렇다. 지상은 지하의 존재를 모르거나 무관심하다. 지하실 자리마저 위협하는 건 동족, 자기 자신, 혹은 자신보다 못한 것이다. <기생충>도 그 법칙을 따른다. 박 사장의 집에 침투한 기택의 가족은 더 깊은 지하에 기생하던 또 다른 가족과 마주친다. 아랫것들은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서로를 밀어낸다. 위엣 것은 죽을 때까지 그걸 모른다.
<기생충>은 미끈하다. 연극적인 인물들이 등장해 아주 선명한 도식을 따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봉준호 감독이 계층 간 이동불가능성에 대한 잔혹한 우화를 세련된 방식으로 한 번 더 반복한 것이 어째서 퇴행인가? <괴물>은 한미 간의 역학 관계를, <살인의 추억>은 90년대 한국의 야만적 시대성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을 전제한 텍스트였다. 그런데 <기생충>은 한국이 아닌 어느 국가, 지금이 아닌 어느 시대라도 이식이 가능한 우화다. 시대성과 지역성, 맥락 없이 매끈하게 단절된 미시서사라는 뜻이다. 그나마 ‘대만 카스테라’을 팔다 망했다는 언급만 아니었으면 시대를 특정하기도 어렵다. 보편적이라는 게 흉은 아니나 땅에 자잘하게 뿌리박고 있던 어떤 촉수들은 말끔히 제거됐다. 이전 봉준호의 작품이 비늘까지 그대로 붙은 한 마리 어패류 같았다면 <기생충>은 깔끔하게 도려내져 먹기 좋게 포장된 살점 같다. 돌아온 봉준호가 내민 이토록 정갈한 한 점. 여기엔 어떤 것들이 지워져 있는 것일까?
봉준호 감독은 1980년대에 자신의 세대, 즉 운동권이 내면화했던 것들에 대한 서사를 반복하고 또 확장해왔다. <괴물>에서 변절한 운동권 선배가 등장하듯이, 북한방송 아나운서의 멘트를 따라하는 문광과 지하의 피난처에 숨어 법학을 공부하다 자본가에게 ‘리스펙트’를 외치는 방식으로 퇴화한 근세 부부는 직접적인 메타포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은 그 내면화된 서사를 전작들처럼 파고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외화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절대 권력자인 교수나, <괴물>에서 그려지는 미국은 관음의 대상이나 선망할 만한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추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생충>의 박 사장 네 집은, 가정은, 아름답고 반짝이고 미학적인 어떤 것이다. 돈으로 구김살도 쫙쫙 펴진 선하고 맑은 것이다. 반면 최하층 근세의 세계는 어떤가? <설국열차>에선 바퀴벌레를 먹었지만, <기생충>에선 그들이 네발로 기는 바퀴벌레가 됐다. 이런 게 봉준호식 블랙코미디였던가? 가난의 처절함과 부의 찬란함이 영화적 스펙타클에만 복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봉준호 감독은 언론시사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이게 사회경제적으로 부자와 빈자들을 분석하는 영화는 아니잖아요? (…) 요즘 드는 생각은, 부자와 빈자 그 자체보다도 서로에 대한 예의에 관한 문제랄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어디까지 지키느냐에 따라, 기생이 되느냐, 좋은 의미에서의 공생, 상생이 되느냐가 갈라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계층 이동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서로에 대한 선을 지키자’라는 것인가? 영영 이동 불가능한, 넘어선 안 될 선에 대해 말하는 건 박 사장이 아닌 감독이었던가? 영화가 끝나고도 다음 세대인 기우의 세계는 닫혀있다. 그는 평생 자신의 영역을, 선을, ‘예의’를 지키며 살(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들러 붙어있던 지근한 기분의 정체가 확실해졌다. 경애하던, 그러나 마침내 꼰대가 된 386을 마주한 기분이라 하면 이해하겠는가? <기생충>을 기점으로 봉준호의 세계는 선명해졌다. 이후의 세계를 보고 싶은 궁금증은 사라졌다.
글/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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