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더는 엄연한 술이다. 초여름 정취를 부채질하는 마법 같은 술.
사이더(Cider)라는 술이 있다. 사과즙을 발효시킨 일종의 과실주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사이다(Cider)와는 철자만 같을 뿐, 성질은 전혀 다르다. 사이다는 탄산음료, 사이더는 엄연한 술이다. 착향 탄산음료인 일본의 사이다가 우리나라에 그대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혼란이다. 실제로 뉴욕에서 애플 사이더를 사과 맛 사이다인 줄 알고 주문했다가 당황한 적이 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탄산음료를 시켰는데 술이 나오다니 주당이라면 할렐루야를 외칠 일이다.
아무튼 사이더는 술이다. 나는 그 단순한 진리를 5년 전, 5월의 어느 토요일 저녁에 격렬하게 체감했다. 그러니까 나의 결혼식. 주례와 폐백을 생략한 예식은 곧 흥겨운 파티로 이어졌다. 순후한 초여름 오후 6시에 야외에서 시작된 피로연은 술이 떨어진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애주가인 신랑 신부가 애주가인 하객들을 위해 작정하고 준비한 뒤풀이였다. 식이 끝나기 무섭게 직원들이 맥주, 사이더, 와인, 소주가 담긴 양철 버킷을 차례로 들고 나왔다. 질 좋은 피노 누아부터 값비싼 증류식 소주까지 온갖 종류의 술이 즐비했다. 놀랍게도 사이더가 가장 먼저 동이 났다. 맥주를 수입하는 지인이 부록처럼 몇 박스 얹어준 술이었다. 그건 초여름 야외에서 열린 결혼 피로연에 꼭 어울리는 술이기도 했다.
탄산이 들어간 사과 맛 술은 맥주보다 상큼하고 와인보다 가벼웠다. 너무 취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기분을 돋우기에 그만한 게 없었다. 두 끼를 내리 굶은 데다 종일 긴장한 탓에 정신이 혼미했던 5월의 신부에게도 사이더는 썩 괜찮은 선택처럼 보였다.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마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이더 한 병을 땄다. 언뜻 음료수처럼 보이는 그 술은 과연 맛도 음료수처럼 시시했다. 일본까지 가서 호로요이 따위를 마시는 샌님들이 좋아할 법한 술이었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지 싶었다. 천천히 알딸딸해지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병을 훌떡 비우고 일어서는데 멀리서 신랑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휘청대는 신부라니, 엄마가 봤으면 등짝을 후려쳤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내가 마신 사이더의 도수는 4.5퍼센트였다. 빈속에 맥주 두 캔을 연달아 들이부은 셈이었다. 이 또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사이더에 취해 필름이 끊긴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들 사이더를 만만히 본 것이다.
그때부터 사이더는 내게 영락없는 초여름 술이다. 때 이른 더위에 몸이 축 늘어지는 이맘때면 차가운 사이더를 약수터 아저씨마냥 꿀떡꿀떡 들이켠다. 풋사과를 베어 먹는 듯한 청량함, 따가운 목 넘김과 시큼한 뒷맛이 참 좋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 취기가 사르르 몰려온다. 그 나른한 기분이 좋아서 이따금 하오의 사이더를 즐기기도 한다. 맥주만큼 센 술이지만 대낮에 마셔도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이더의 오묘한 미덕 중 하나다. 술꾼들의 음료수, 말하자면 우롱차로 만든 하이볼 같은 존재다.
사이더를 마시는 건 여름 도락이기도, 겨울 풍류이기도 하다. 뉴욕에서 사이더는 명백한 F/W 시즌 음료다. 할로윈을 시작으로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까지 그야말로 주야장천 마셔댄다. 다섯 살짜리 꼬마조차 ‘사이더 도넛’을 우물대는 시기다. 초가을부터 초겨울 사이에 대대적인 사과 수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뉴요커들의 사이더 사랑은 정말 지대해서, 한겨울에는 뜨끈하게 데운 ‘핫 애플 사이더’를 감기 예방용으로 마시기도 한다. 물론 알코올을 거의 날린 사이더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이더 이야기가 나오면 애주가들은 말이 빨라진다. 이야깃거리가 워낙 많은 데다 나라마다 명칭도 제각각이라 아는 척하기 좋아서다. 그러므로 아는 척을 좀 하자면 사이더는 크게 하드 사이더와 소프트 사이더로 나뉜다. 하드 사이더는 사과즙을 발효시켜 얻은 사과주, 소프트 사이더는 발효되지 않은 사과 주스를 뜻한다. 나라마다 다르기는 하나 보통 사이더라고 하면 알코올을 포함한 하드 사이더를 가리킨다. 프랑스의 시드르(Cidre), 스페인 북부의 시드라(Sidra), 독일의 아펠바인(Apfelwein)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친척지간이다. 이 밖에도 영국, 벨기에, 뉴질랜드 등 품질 좋은 사과가 재배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사이더의 양조 방식은 스파클링 와인과 비슷하다. 사과를 압착한 즙을 서서히 발효시킨 다음 이를 병입해 추가 발효 과정을 거쳐 탄산가스를 더하면 끝이다. 이걸 증류하면 사과 브랜디인 칼바도스가 된다. 이 방식을 처음 적용한 곳이 프랑스 북서 지역에 속하는 노르망디다. 비옥한 곡창지대였던 노르망디는 남프랑스와 달리 비가 많이 와서 포도 농사를 짓기 어려웠다. 대신 쉽게 재배할 수 있는 사과를 발효시켜 와인을 대신할 발포성 술을 만든 것이 시드르의 시작이다. 프랑스의 시드르는 사이더의 원조답게 규정이 꽤 까다로운 편이다. 영국이 최소 35퍼센트 이상, 미국이 50퍼센트 이상의 사과즙을 함유하면 사이더로 인정하는 반면 프랑스는 오직 사과로만 빚어야 시드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이 시드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사과 향과 알코올을 뺀 청량음료, 즉 우리가 아는 ‘사이다’의 전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기묘한 이야기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는 대부분의 사이더는 과일 향과 탄산을 더한 즉석 음료에 더 가깝다. 정성 들여 빚은 오리지널 사이더와는 애초에 비교 불가다. 시드르도 마찬가지다. 질 좋은 시드르를 급한 마음에 벌컥벌컥 들이켜는 건 주도에 어긋난다. 그보다는 잔에 따라 살살 흔들면서 특유의 고릿한 ‘발효취’를 느끼는 편이 훨씬 즐겁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이더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이더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 건 지난 2016년 가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장에서였다. 나를 포함한 일행은 막간을 이용해 투어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목에 카메라를 메고 뚜껑 없는 2층 버스에 올라탄 동양인 무리라니, 누가 봐도 초보 관광객처럼 보였을 것이다. 프랑크푸르트는 마치 여의도 같았다. 유럽에서 보기 드문 고층 빌딩이 가득했지만 대부분 금융 관련 건물이었고 그래서인지 운치도 좀 부족했다. 역시나, 다들 맥이 풀린 표정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맥주를 주문했다. 적어도 ‘독일 맥주’만큼은 실망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직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주문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의 얼굴에서 ‘얼치기 관광객이군’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둘러보니 모든 탁자에 파란색 문양이 그려진 투박한 도자기 술병이 놓여 있었다.
직원에게 물어보자 “식당에서 직접 담근 사과 와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프랑크푸르트의 명물, 아펠바인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에서 사이더는 제각각 고유의 레시피를 뽐내는 가양주 같은 존재였다. 직원의 권유로 마셔본 아펠바인은 사과 향을 첨가한 화이트 와인 같았다. 아주 맛있다고 할 수 있는 맛은 아니었지만 며칠 머물면서 마셨다면 생각이 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그런 맛이었다. 다른 식당에서 또 한 번 아펠바인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맛이 확연히 달라서 놀랐다. 똑같이 도자기 술병에 담긴 그 아펠바인은 엄청나게 시큼했다. 그래서인지 물을 섞어 마시는 사람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아펠바인 전용 잔 한 쌍을 샀다. 손에 묻은 소시지 기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표면에 마름모 무늬를 촘촘히 새긴 유리잔은 오직 프랑크푸르트의 사이더만을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뉴욕에 사는 친한 부부가 크래프트 사이더 한 병을 선물로 들고 왔다. 두 사람은 “지금 뉴욕에서 사이더는 제2의 크래프트 맥주”라고 입을 모았다. 과거 크래프트 맥주의 시작이 그랬듯, 젊은 생산자들이 사이더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며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말이었다. 요즘 뉴욕에서 사이더는 확실히 ‘인싸’들의 술인 듯하다. 브루클린에는 공장을 개조한 소규모 사이더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젊은 셰프들은 ‘사이더 페어링’이라는 새로운 마리아주에 골몰하는 추세다.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는 100여 개의 사이더 탭을 갖춘 전문 바도 등장했다. 사이더에 어울리는 발효 채소 요리에, 사과 베이스 칵테일까지 내놓는 곳이다. 매년 가을 개최되는 사이더 위크 기간이면 온 동네 힙스터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배를 첨가한 것부터 오크통에 숙성시킨 것까지 다양한 맛의 로컬 사이더가 개성 있는 라벨을 두르고 파머스 마켓 부스를 장식한다. 개중에는 알코올 도수 10퍼센트가 넘는 사이더도 흔하다. 이제는 정말 만만히 볼 술이 아닌 것이다.
사이더의 상승세는 서울의 마트에서도 실감할 수 있다. 맥주 코너 옆을 잘 살펴보면 캔에 담긴 사이더부터 노르망디에서 생산한 크래프트 시드르까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자체 제조 시설을 통해 천연 사이더를 생산하는 국내 양조장도 늘어날 전망이다. 경북 의성의 사과농장 ‘한국애플리즈’는 황토 옹기에 발효시킨 토종 시드르를 내놓은 지 오래고, 미국 유명 크래프트 사이더 회사에서 양조기술을 전수받은 뒤 충주 사과로 사이더 제조를 시작한 청년 사업가도 생겼다. 선택지가 넓어진 만큼 입맛에 맞는 사이더를 찾기도 수월해졌다. 누군가에게는 한겨울의 뜨끈한 사이더가, 누군가에게는 늦봄의 시큼한 시드르가 더 ‘제철’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물론 내게 사이더는 초여름 술이다. 반팔 입은 사람과 데님 재킷에 스카프를 두른 사람이 함께 돌아다니는 계절의 길목에 따끔따끔한 햇살을 받으며 마셔야 제맛인 술. 초여름 정취를 한 단계 시프트업 시켜주는 마법 같은 술. 글 / 강보라(칼럼니스트)
-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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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