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 하고 이니셜 보도 뒤에서 곡소리가 들려온다.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여겨지는 이니셜 보도.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양씨 성을 가진 배우들이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를 점령했다. 인기 영화와 지상파 드라마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양씨에게서 필로폰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보도가 나온 지난 5월 12일의 일이다. 모니터 안은 흡사 피도 눈물도 없는 정글 같았다. ‘양씨’라는 힌트는 먹잇감이었다. 네티즌이라는 사냥꾼이 양씨 배우 사냥에 나섰다. 그러자 언론이라는 하이에나가 달려들어 물고 뜯었다. ‘팩트 체크’ 따윈 없었다. 양씨 배우들의 소속사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전화로 경험했다. “그 양씨가 이 양씨 맞습니까?” 성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양씨 배우들은 자백을 강요받았다. ‘양씨 찾기’에 혈안이 된 상황 속에서 양씨들은 제대로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양동근 소속사 말처럼 “양씨 성 가진 죄”라며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경찰에 체포된 양씨가 단역 배우인 것으로 알려진 후에야 검색어에 오른 양씨 배우들은 죄인 혐의를 벗었다.
“여러분 펜대로 사람 죽이는 겁니다!” 나훈아는 기자들을 모아놓고 다그쳤다. 2008년 1월에 일어난 일. 사연은 이렇다. 중장년층 스타와 야쿠자의 애인인 글래머 배우 K 씨 염문설, 그리고 입에 담기조차 험악한 신체 훼손설 등의 괴소문이 뒤섞인 나훈아 괴담이 한 스포츠지 기자의 블로그에서 이니셜로 언급됐다. 누군가에게 이슈가 생기면 반드시 나타난다는 ‘네티즌 수사대’가 여배우 K 찾기에 나섰다. K라는 이니셜과 글래머라는 단어의 조합은 김혜수를 소문 한가운데로 끌어올렸다. 불똥은 김선아에게도 튀었다. 네티즌의 관음증과 근거 없는 추측을 인용한 기사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자 결국 나훈아가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나훈아가 말했다. “차라리 글래머 배우 A 양, K 양 하지 말고 실명을 거론했다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저 아무렇게나 쓴 이니셜 기사가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겁니다.” 직설화법으로 언론의 맹점을 콕콕 쑤셨다. 그는 단상에 올라 바지 지퍼를 내리고 괴소문을 무마시켰다. 이날 나훈아 루머의 진실 여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타가 악성 루머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식은 확실히 남았다. 물론 모든 연예인이 소문에 휩싸일 때마다 기자를 불러놓고 역공을 펼칠 수는 없는 일이다. 나훈아 괴담이 쓸고 간 2008년과 ‘양씨 찾기’ 광기가 일어난 2019년 사이, 수많은 연예인이 A 양이나 B 군, C 모 씨 등으로 거론되며 이니셜 보도의 간접 피해를 봤다.
기사의 기본 가운데 하나가 ‘육하원칙’이다. 그러나 연예 기사에서는 유독 ‘누가’가 이니셜 뒤로 숨는 일이 자주 목격된다. 가끔은 기사인지 퍼즐인지 혼동될 때도 있다. 기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이니셜 보도는 왜 난립할까. 미디어는 대중이 흥분할 만한 이슈를 찾아 헤맨다. 사건이 터지면 그중 가장 충격적인 면을 골라 전시한다. 이슈가 없으면 수면에 드러나지 않은 이슈를 끌어내기도 한다. 흥행을 위해 필요한 건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미스터리한 주인공이다. 이니셜 보도는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비옥한 토양이다 ‘톱스타 A 양과 B 군의 밀회’, ‘유부남 C의 일탈’, ‘L 씨 화장실에서 이상한 짓’…. 제목을 더 자극적으로, 더 선정적으로! 수위가 높을수록 기사 클릭 수도 오른다. 이니셜 보도는 취재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이지만, 대중의 호기심을 교묘하게 낚는 방식으로 변질됐다. 사실을 버라이어티하게 보도하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이니셜 기사’에 은근슬쩍 ‘힌트’를 투척, 누리꾼들의 CSI식 수사력을 자극하는 일도 많다. 가끔은 한 매체가 흘린 힌트에 다른 매체들이 힌트를 더한다. 그 과정에서 루머가 짜깁기되거나 부풀려져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완전한 익명도, 그렇다고 실명도 아닌 이러한 간보기 식 ‘이니셜 보도’의 결과물은 간접피해자다. 인기 가수 ‘김 모 군’의 건전하지 못한 사생활이 보도되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김씨 성을 가진 다른 연예인까지 덩달아 가십난에 오르내린다. ‘K 씨’로 표기될 경우 파장은 더 멀리 간다. 김씨, 고씨, 권씨, 강씨 등이 소환돼 심판대에 오른다. 양씨처럼, 표본이 적은 성을 지닌 연예인의 경우 이니셜 보도의 피해를 배로 받는다. “발라드풍 가요로 인기를 모아온 S 씨가 연예계 PR 비리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이니셜 보도에 날벼락을 맞은 신승훈이 대표적이다. 구설에 휘말린 신승훈은 “S자만 들어가도 가슴이 철렁하는 팬 여러분, 신 모 씨는 제가 아닙니다”라고 직접 진화에 나섰다. 2002년의 일이다.
B1A4의 산들도 지난해 무분별한 이니셜 보도의 피해를 직격탄으로 맞았다. “한 여성이 아이돌 가수 A 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니셜 보도에 아슬아슬하게 첨부된 “부산 출신에 2010년대 초반 데뷔해 음악 프로그램에서 가창력을 인정받은 아이돌 그룹 보컬”이라는 설명 때문이었다. 그룹 내 포지션, 출신 지역, 데뷔 연도, 음악 프로그램 출연 등의 이력이 산들을 불러세웠다. 네티즌의 의견이 사실인 양 거래됐다. 이를 언론이 재가공해 퍼뜨렸다. 산들은 반박 보도문을 통해 사실이 아님을 호소해야 했다.
법적 소송으로부터 도망갈 도피처로 이니셜 보도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니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공개된 상황에서도 사용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사실 여부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기사를 보도하거나, ‘명예훼손’에 따른 소송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니셜 보도가 늘 법망을 빠져나가는 만병통치약으로 기능하는 건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특정인임을 눈치챌 수 있는 이니셜의 경우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는 사례가 존재한다. 과거 ‘탤런트 S 자매 성상납-매매춘’이라는 이니셜 보도에 설수진-수현 자매는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을 추측하게 하는 기사였다. 이들은 “확인되지 않은 무책임한 보도로 개인적 명예가 심하게 훼손됐다”며 이니셜 보도를 한 스포츠 신문을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다. 해당 기사는 허위로 밝혀졌다. 혐의는 벗었지만 상처는 남았다.
이니셜 보도로 클릭 수 장사를 하는 것은 신문이나 인터넷 매체만이 아니다. 방송도 이니셜을 사랑한다. 지금은 폐지된 E채널 <용감한 기자들>의 경우, 실명 없이 이니셜로만 채운 ‘이니셜 토크’ 코너로 시청률에서 쏠쏠한 재미를 봤다. ‘현직 기자들의 용감한 폭로가 시작된다’는 키치를 내세운 프로였지만, “A 양과 B 군이 바람이 나서 C 씨가 난동을 부렸다”는 식의 사생활 관련 뒷담화가 주를 이뤘다. 이것이 과연 용감한 폭로인가. 방송이 끝나면 인터넷에서는 어김없이 이니셜 주인공 찾기 놀이가 이어졌다. 연예 전문 방송 채널을 표방한 ‘K STAR’라는 곳에서는 여전히 ‘이니셜 토크’가 성황 중이다. ‘Y 양의 독특한 성적 취향. 나 떨고 있니?’, ‘노총각 X 군, 꼬리가 길면 밟힌다?’, ‘철통보안 배우 S 군, 그의 매니저가 본 것은?’ 지난 5월 한 달간 이 채널을 통해 보도된 방송 제목들이다. 사실인지 추정인지 소설인지 모를, 얼굴이 화끈거리는 대단히 폭력적인 제목들이다. 누군가는 인터뷰에서 “유명인이기에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유명인이기에 감수해야 할 고통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이 합당하다는 건 또 무슨 궤변인가.
근본적인 의문은 늘 따른다. 작위적인 이니셜 보도가 뉴스로서의 가치가 있는가. 국민의 알권리에 해당하는가. 기사의 생명은 팩트 전달이다. 그러나 연예 저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건 정보가 아니다. 호기심이고 소문이고 가십이다. 어떤 연예인과 어떤 연예인과 어떤 연예인이 삼각관계인지가 정보일 리 없다. 대중이 궁금해할 만한 건 모두 뉴스가 된다고 믿고 싶은 연예 저널의 자기 세뇌, 잘 팔리는 기사를 싣고자 하는 데스크들의 욕망, 여기에 스타를 끌어내림으로써 너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위안을 얻으려는 네티즌의 무의식이 결합하는 순간 이니셜 보도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위험하게 탈선한다. 물론 목적에 맞게 쓰인 이니셜 보도가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 목적에 부합한 기사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네티즌들의 클릭을 유도하는 강태공 수준의 낚시 기사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흥행을 챙기고, 네티즌이 술자리 안줏거리를 챙기는 동안, 정작 챙겨야 하는 공적인 중요 사안들은 이니셜에 가려져 묻혀버린다. 뜬소문에 애먼 피해자가 생겨난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다. 무엇을 위한 이니셜 보도인가. 인권 보호를 위함이라 하려거든 입에 침부터 바르시라.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 에디터
-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