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남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푸꾸옥의 대학교를 찾아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상상은 현실이 됐다.
라마르크 대학의 본관에는 어른 코끼리만한 크기의 트로피 동상이 윤기를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샘이 신줏단지 모시듯 그 둘레를 감싸고 흘렀다. 공간 전체에는 흐르는 물처럼 맑고 담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엄숙하기조차 했다. 그 기운의 진원지처럼 보이는 트로피 동상은 괜한 허세나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라마르크는 베트남 최남단에 위치한 푸꾸옥섬 최초의 대학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이던 19세기 후반, 이곳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설립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옛이야기지만 부유층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규모와 시설 면에서 아시아 최고로 통했다고 한다. 우위를 점한 것은 또 있다. 라마르크 대학은 프랑스의 동식물학자이자 진화론자인 ‘장 바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라마르크’에서 이름을 가져와 자연과학의 전당을 꿈꿨지만, 정작 스포츠로 큰 명성을 얻었다. 럭비, 복싱, 크리켓, 라크로스, 사이클 종목에 걸쳐 라마르크 대학의 운동 팀은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했다. ‘리지백 군단’은 동남아시아의 굵직한 대회들을 휩쓸었다. 리지백은 푸꾸옥의 토종견으로 라마라크 대학의 마스코트다. 그들이 무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자금력으로, 한 수 위의 훈련 시스템을 갖추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게다가 자연재해 없이 1년 내내 온화한 푸꾸옥의 날씨는 운동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라마르크 대학은 외부인의 방문을 허락한다. 캠퍼스에 단기간 머무르면서 운동과 훈련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최고의 체육 전문 대학이라는 이름값, 바다와 해변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전 세계의 스포츠 팀과 운동 마니아들이 전지 훈련 삼아 이곳에서 담금질을 한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사람들을 구슬리는 매력은 더 있다. 2년 전, 라마르크 대학은 대규모 리모델링을 통해 숙소와 식당을 비롯한 모든 시설을 고급 리조트 수준으로 탈바꿈했다. 웅장함으로 압도하는 프랑스 콜로니얼 건축 양식은 그대로 살리고, 그 위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가미해 휘황찬란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살다 보면 난데없이 마주한 한 장의 사진이 지지부진한 일상 밖으로 이끄는 경우가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사진이 내게 미지의 섬이었던 푸꾸옥과 생전 들어본 적 없던 라마르크 대학에 대한 단서가 됐다. ‘고운 모래로 뒤덮인 해변에서 야자수에 설치된 농구 골대를 향해 한 남자가 슛을 던지는’ 사진을 잊을 수 없다. ‘#trainig #paradise #heaven #lamarckunivversity’라는 해시태그가 함께 달려 있었다. 호기심과 동경이 가슴팍을 밀치고 들어왔다. 아이스크림처럼 고와서 발이 푹푹 빠지는 해변을 달리고, 스팽글처럼 빛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사이클을 타며, 우승 기념 걸개가 주렁주렁한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치는 영상들이 라마르크 대학의 해시태그를 따라 줄줄이 엮여 나왔다.
이소룡 주연의 영화 <용쟁호투>가 떠올랐다. 비밀스런 쿵후 스쿨 같은 곳일까? 복싱 영화 <크리드> 시리즈도 생각났다. ‘록키’ 실베스타 스탤론의 애제자로 나오는 마이클 B. 조던이 수영장 바닥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서서 주먹질을 해대는 장면이었을 거다. 이국의 땅, 숨이 탁 막히도록 아름다운 바다와 해변, 활력 넘치는 육체, 노력의 양만큼 정직하게 흐르는 땀, 아드레날린, 강한 남자에 대한 통속적인 이미지들. 머릿속에서 라마르크 대학은 환상의 집결체로 응결됐다. 하루하루를 사생결단으로 버티고 사느라 몸과 마음이 고드름처럼 녹고 있는 것을 방치하고 있었지만, 이런 곳이라면 달리고 구르고 땀을 흘리고 싶다는 욕망이 쭉 뻗어 났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약 6시간, 마침내 동경은 현실이 됐다.
라마르크 대학은 과거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는 듯했다. 캠퍼스 곳곳에서 황금기 시대의 유물과 훈장들이 눈에 띄었다. 여권 도장처럼 수집한 트로피들이 도서관의 진열장에 층층이 쌓여 있었다. 복도는 마치 스포츠 역사 박물관 같았다. 경기 장면과 선수들의 흑백 사진, 대회 기록, 신문 기사, 실제로 사용된 옛 장비들을 모아 선배들의 업적을 기렸다. 캠퍼스 건물의 벽면에 그려진 20세기 초반의 대회 포스터와 빈티지풍 스포츠 일러스트는 소리 없이 ‘경쟁해! 승리를 쟁취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대학 본관에 버티고 있는 트로피 동상에는 이곳의 역사와 명분이 잔뜩 담겨 있었다. 마블 영화의 오프닝 로고처럼.
그런데 이를 어쩌나. 실은 상상 속의 이야기다. 오해를 풀자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랄까. 라마르크 대학은 실제로 존재한다. 당연히 푸꾸옥도 베트남 남단에 존재하는 섬이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생물권 보존 지역이며,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세계 10대 해변이 있는 휴양지다. 라마르크 대학에는 정말로 거대한 트로피 동상이 있다. 빛바랜 스포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마스코트인 리지백의 이미지가 캠퍼스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무엇보다 내가 라마르크 대학에서 4일을 보내고 돌아왔다는 사실이 가장 명백한 증거다.
라마르크 대학의 주소인 ‘Bai khem, Phu Quoc District An Thoi Vietnam’을 검색창에 넣으면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온다. ‘JW 메리어트 푸꾸옥 에메랄드 베이’. 이게 가장 진실에 가까운 진실이다. 라마르크 대학은 JW 메리어트 푸꾸옥 에메랄드 베이 리조트가 만든 독창적인 아이덴티티다. 2017년 문을 연 이곳은 1940년에 폐쇄된 대학 건물과 부지를 개보수하면서 대학이라는 ‘오리지널리티’를 모티브로 삼았다. 행세는 완벽하다. 리조트 입구에는 떡하니 ‘라마르크 대학’이라고 쓰여 있다. 총 234개로 이뤄진 객실과 빌라 동에는 동물학, 식물학, 어류학, 천문학, 해양학, 농업학 등 학과 이름을 붙였다. 가장행렬은 계속된다. 러닝 코스는 육상 트랙처럼 만들었고, 올데이 다이닝 레스토랑 ‘템푸스 푸지트’는 건축학과, 해질녘이 되면 분홍빛 하늘을 감상할 수 있는 칵테일 바 ‘디파트먼트 오브 케미스트리’는 이름처럼 화학과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스치는 요소 하나하나에도 대학의 흔적을 담았다. 리조트 안내 책자는 ‘스튜던트 북’처럼 생겼고, 유럽 전역에서 긁어 모은 5천 점 이상의 앤티크 가구와 오브제로 19세기 후반에 존재했을 법한 캠퍼스를 극사실적으로 구현했다. 그토록 자랑하는 스포츠 팀의 역사와 업적은? 그것도 정교하게 짜여진 각본이다. 이곳으로 전지훈련을 오는 팀은? 보지 못했지만 꼭 한 번 가보라고 추천한다.
이쯤이면 상상력의 비범함에 놀라게 된다. 확실한 주제, 짜임새 있는 세계관, 견고한 위트가 리조트라는 공간을 서사가 있는 드라마로 만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여타의 리조트처럼 성대하고 화려하게 보일 뿐, 딱딱하고 밋밋한 기억과 브랜드의 이름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리조트에서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소설 <해변의 카프카>의 문장처럼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단박에 운동의 욕망과 결의를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에 취해 반질반질한 나무 바닥의 체육관에서 땀을 빼고, 육상 트랙을 달리며, 자전거로 캠퍼스 주위를 오르내렸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는 물속에서 주먹질을 하기는커녕 두 발을 딛고 서 있기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켁켁거리며 깨달았다.
리조트에서는 쿠킹 클래스, 호이안 랜턴 워크숍, 티셔츠 페인팅, 베트남어 기초반 등의 프로그램으로 하루를 꽉 채워 교양 수업처럼 골라 들을 수 있었다. 커피 클래스에서 베트남 전통의 아이스 연유 커피를 일컫는 ‘카페 쓰어다’를 배워 주문할 때마다 쏠쏠하게 구사했다. 병맥주를 손으로 쥔 채 한 발로 서서 균형을 잡거나 다리를 꼬는 비어 요가는 동작이 힘들다는 핑계로 물 대신 맥주를 연거푸 들이킬 수 있어 이 또한 흡족했다. 라마르크 대학에서 겪은 나머지 일들은 상상에 맡긴다. 모든 게 상상 속의 이야기라 하지 않았나.
- 에디터
-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