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그리고 일흔둘. 불붙은 뇌관과 깊숙한 정적. 동해와 박근형. 두 남자의 초상.
동해
<판다양과 고슴도치>는 오랜만에 슬며시 웃을 수 있는 드라마였어요.
촬영장 분위기가 처음부터 좋았어요. 첫 장면부터 출연하지도 않으시는 박근형 선생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한마디씩 해주셨어요. 촬영이 아무리 힘들어도, 현장에 있을 때 제일 기분이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새기려고 노력했죠.
이제 막 데뷔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아 반가웠어요.
그것도 역시 박근형 선생님, 양희경 선생님이 아들처럼 잘 챙겨주셔 가능한 것 같아요. 대선배님이니까 어려웠지만, 정말 잘 대해주시고 매번 연기 지도도 해주시고.
방금 촬영할 때도 박근형 선생님과 격의 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니, 좀 낯설었어요. 엄하시지 않나요?
박근형 선생님이랑 연기했다고 하면 다들 무섭지 않으냐고 묻는데, 전 그냥 할배라고 불러요. 선생님께서 평생 문자로 답장을 보내신 적이 없으시다는데, 제가 문자를 보내면 문자 보내는 법을 배워 보내주실 정도였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자제분들이 질투한다고 비밀로 해달라고 말씀하시고. 사실, 첫 리딩 때 선생님께 막 가르쳐달라고 졸랐어요. 그랬더니 “너는 네가 준비한 걸 해야지 왜 가르쳐달라고 해? 내가 하는 거 보고 따라 할 거야?” 그러셨죠. 그래서 제가 “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발 좀 가르쳐주세요” 하고 졸랐죠. 다른 선배님들 모두 초토화됐어요.
하하, 당돌하다고 생각했겠네요.
와, 이 자식 뭐라고? 하하하. 다들 웃으시던데요. 작가님하고 감독님은 “얘는 남 신경 안 쓰는 애예요. 웃고 넘기세요”하고 말씀하시고.
솔직한 모습을 좋게 봤을까요?
제가 계산적이었다면 못 그랬겠죠. 말하고 싶었던 걸 말하고, 편하게 배우고 싶었어요. 선생님께서 지적을 받았을 때 듣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려고 노력했어요. 혼나고, 쪽팔려도, 그건 문제가 아니죠.
그런 자세 덕분인지 8, 9회 넘어가면서부터는 호흡이 안정돼 보였어요.
연기도 하면서 느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다 잘하면서 시작할 수 없으니까요. 2회에서 못하면 3회에 채워 넣을 수 있고, 3회에 못했던 부분은 10회에 채워 넣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고승지라는 캐릭터는 실제 동해의 모습을 닮았을까요? 어느 인터뷰에서 힘들었던 경험을 떠올리며 연기했다고 말했었죠?
특히 제 성격과 많이 닮았어요. 작가 선생님도 저의 어려웠던 환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이해하기 쉽게 써주신 것 같기도 해요.
배우 중엔 자신의 과거가 평탄해서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캐릭터가 겪는 어려움을 공감하기 힘들다는 거죠.
어릴 때부터 되새긴 말이 있다면, 제가 아무리 힘들어도 더 힘든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가족 문제나, 지금의 불행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연기할 때 슬픈 감정을 떠올릴 수 있는 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지난 경험을 통해 생긴 감정이 없으면 연기하기 더 힘들었겠죠. 다른 한계도 많이 느꼈어요. 특히 말을 빨리 하다가 호흡이 많이 끊겨서 고생했어요.
뭐랄까, 생각이 많아 보였어요. 한편으론 항상 진지하다는 반증이겠지만요.
맞아요. 이번 캐릭터에서 더 놀았어야 했어요. 고승지라는 캐릭터는 거침없는데, 연기하는 전 생각이 너무 많았어요. 사실, 헷갈렸어요. 화도 버럭 내거나, 눈빛으로만 낼 수도 있는데, 어떤 걸 선택해야 하는지 판단이 안 서는거예요. 하지만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서 충분히 즐거웠죠.
군대에 가기 전, 전환점이 될 작품을 기대하고 있을까요?
2년 안에 좋은 작품을 하면 좋겠지만, 조급하진 않아요. 서른 넘어서 잘 될 수도 있고, 마흔 넘어도 가능할 테니까요.
요즘처럼 좋은 이삼십 대 남자 배우가 많았던 시절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경쟁도 심해졌다는 뜻인데, 만약 정말 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감독이나 제작자를 어떻게 설득하고 싶나요?
설득보다 일단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죠. 스무 살 때 이수만 사장님하고 SM 직원 분들과 함께 강제규 감독님과 인사만 나누는 자리가 있었어요. 그 전날 독백 하나를 외웠죠. 인사드릴 때 전 동해라고 합니다, 저, 연기 하나만 하겠습니다, 하고 그냥 외워간 독백을 했어요. 그러곤 제 연기는 볼품없었겠지만, 나중에 꼭 감독님 앞에서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나왔어요. 아마 절 기억 못하실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저와 비슷한 또래 배우들의 능력 차이가 많이 날 수도 있지만, 전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보통 감독님들이 물어보시는 게 “연기 잘하냐?”인데, 그러면 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 잘해요. 시켜주세요. 진짜 미치도록 할 테니까, 안 시켜주면 죽을 것 같으니까 시켜주세요” 하고 말해요. 제가 연기를 정말 하고 싶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만약 저만의 매력이 있다면, 이렇게 공격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거겠죠. 전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어요.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해야 됐죠. 가수가 되기 전에도 TV를 보면서, 난 노래를 하고 있을 거야, 난 대상을 받을 거야, 했죠.
목표한 바가 있으면 자존심도 버리나요?
해내기만 하면 중간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열네 살 때, TV에 보아가 나오는 걸 봤는데, 쟤는 나와 같은 나이인데, 저기에 있구나, 난 왜 이걸 보고만 있어야 할까 하고 화가 났어요. 그래서 바로 사진 찍고 무작정 SM에 보내고, 연락이 와서 오디션 보고 연습생이 됐어요. 전 지금도 좋은 작품이 있으면 감독님이나 작가님에게 직접 전화하는 스타일이에요. 회사에서도 많은 힘을 써주지만, 본인의 의지를 표현하는게 더 좋지 않나요? “하고 싶대요”와 “저 하고 싶어요”는 전혀 다르니까요. ‘가오’ 이런 걸 다 떠나서, 역할을 가져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 저돌적인 성격과 소속사의 엄격한 관리는 상충될 수도 있겠네요. 지금 이렇게 솔직한 모습과, 인터뷰를 하기 전 질문지를 검토하는 매니저는 상반돼 보여요.
사실, 전 상관없어요. 제 생각과 회사 입장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하나의 콘셉트겠죠. 이해해줬으면 하는데…. 이런 건 있어요. 아이돌은 뭘 하면 안 되고, 그런 것. 지금은 자연스럽지만요.
평탄한 삶 때문에 힘들다는 배우처럼, 20대 때 경험을 제한 받는 것이 앞으로의 연기 발전을 힘들게 하진 않을까요?
연기를 하려면, 좀 많이 놀아봐야 되는 것 같긴 해요.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하죠. 일생에 논 기억이 없어요. 흔히 말하는 ‘나이트’, 이런 걸 즐겨본 적이 없죠. 나빠서가 아니라, 그걸 함으로써, 혹시 나한테 피해가 올까? 혹시나 그럴까 봐 걱정이 많이 돼요. 앞으로 좀 많이 놀아야겠어요. 솔직히 전 스캔들도 괜찮아요. 굉장히 빨리 결혼하고 싶고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애들이랑 더 많이 놀아주고 싶어요.
이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쉽지 않겠어요.
그런가요? 여자가 있으면 이 생활 접어야 하나. 근데 결혼하고 연기하면 안 되나요?
안 될 리가 있나요. 하지만 배우가 빨리 결혼하는 건 쉬운 결정은 아닌 것 같아요. 서른 이전이면, 좀 빠르다 싶고요.
전 딱 그때 하고 싶어요. 서른이나 서른 한둘. 제대하고 바로.
더더욱 앞으로 2년이 중요하겠네요. 배우는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 좋은 작품, 그걸 만드는 감독이 중요할 때가 많죠. 어떤 감독이 당신을 변화시켜줄 수 있을까요?
지금 절 변화시켜준 건 박근형 선생님이에요. 앞으로도 절 가장 많이 변화시켜주실 것 같고요. 박근형 선생님과 같이했던 그 장면들이 모두 소중해요. 굳이 감독님을 꼽자면 누굴 꼽아야 할지 막막해요. 아직 감독님들을 잘 모르기도 하고요.
배우 유준상은 인터뷰할 때마다 홍상수 감독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됐죠.
그런 방식은 좀 제 스타일이기도 한데요. 굳이 한 분을 선택해야 한다면 김지운 감독님. 느와르 영화를 하고 싶은데, <달콤한 인생>이 최고인 것 같아요.
뮤지컬은 어떤가요? 늘 하는 노래고, 연기도 하고 싶어하니까요.
하하. 저 노래 못해요. 요즘 <슈퍼스타 K>를 보면 노래 잘하는 천재가 엄청 많던데요.
배우가 정말 하고 싶은 것 같아요.
영화가 정말 하고 싶어요. 멋있는 역 말고 차태현 선배님이 하시는 로맨틱 코미디 같은 영화도 좋아요. 저 말고 시원이도 망가지는 역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시원이가 <귀신이 산다>같은 영화를 연기하면 대박이지 않을까요?
동해가 하면요?
어울릴까요?
- 에디터
- 장우철
- 포토그래퍼
- 목정욱
- 스탭
- 스타일리스트/김봉법, 헤어/김민정, 메이크업/김정명, 어시스턴트 / 문동명, 정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