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실제 캐릭터를 영화 속에 반영하는 홍상수 감독 방식대로라면,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이 말했던 대사가 그의 생각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우리 사람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냐고, 김상경은 스스로 물었다.
더우세요?
아니, 이제 좀 나아요. 전 더위를 너무 많이 타서 여름엔 영화도 안 찍어요. 촬영할 때 5분만 지나도 목 주위에 물이 들어 있어요. 땀으로.
그래도 집이 삼청동에 있는 한옥이니까 여름엔 시원하겠네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그래요?
유명해요. <사랑니>에도 나왔다고 들었는데. 실명을 말할까요?
아녜요. 와, 별 게 다 알려져 있구나. 동넷분들이 왜 배우가 강남 안살고 여기 와서 사냐고 신기해했어요. 전 강남이 싫어요. 시끄럽고 복잡하고. 근데 이상하게 내가 이사 온 이후로 삼청동에 사람이 많아졌어요. 주말만 되면 카메라 들고 와서 다들 사진 찍느라.
집값이 오르겠는데요.
재테크할 것도 아니고. 관심 없어요. 이제 줄 서서 걸어가야 해요. 왜 옛날에 어린이대공원 가면 줄 서서 걸었잖아요. 그런 것처럼.
과장이 좀 심하시죠?
아녜요. 주말에 한번 와봐요. 정말이에요.
그래서 사람 없는 산 다니고 사람 없는 강 가서 낚시 하고 그러는군요
제가 좀 아날로그를 좋아해서. 핸드폰도 여러 기능 있는 거 싫어해요. 핸드폰의 본질은 통화 아녜요? 왜 여러 기능이 있는 거예요? 본질을 왜곡하는 게 전 싫어요.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퓨전 음식이에요. 요즘엔 산 가면 우리끼리 옛 어른들처럼 호를 지어 불러요. <화려한 휴가> 김지훈 감독은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세리(世利). 전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밝은 거울’ 명경. 우리끼리“ 명경아” 이러고 불러요.
그래서 김지훈 감독이 복지리처럼 영혼이 맑은 사람이라고 그랬나 보죠?
그건 그 양반이 그냥 한 얘기고. 이번에 정말 팀 분위기가 좋았어요.
만날 촬영할 때마다 좋다고 하던데….
응. 정말 좋았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어려운 영화를 잘 찍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년은 찍었어야 할 영화인데 굉장히 짧은 기간에 몰아서 잘 찍었어요. 제가 볼 땐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5·18 민주화운동 때 용기 있게 돌아가신 분들이 도와줬다고 생각해요. 정말로요.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 사진을 촬영할 때 갖고 다녔다고 들었어요. <살인의 추억> 때는 술도 안 마셨죠? 그런 게 도움이 되나요? 왜요?
<살인의 추억>에서 그 죽은 여중생의 학생증 사진이 아직도 기억 나요. 자세가 달라져요. 영화 후반부의 그 비 오는 신을 한 달 반가량 찍었는데 놀러 다니질 못하겠더라고요. 캐릭터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고요. 이번에는 교복을 입은 소년 사진을 가지고 다녔어요. 힘들 때 그 사진 보면 내가 이러면 안되지, 이런 마음이 들어요.
연기는 연기일 뿐이라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렇게 현실과 극을 겹쳐서 생각하면, 촬영 내내 힘들지 않나요?
전 이 세상의 그런 기운을 믿어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믿는 편이거든요. 예를 들어 컵을 자꾸 만져주면 거기에도 생명력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거죠. 옛날에 그런 경험도 있었고.
무슨 경험요?
그거요? 하하. 고등학교 때 장난 삼아 돌로 만든 하마 모양의 인형 같은 걸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었어요. 너무 귀여워서 애완동물처럼.
아, 고등학교 때….
네. 소원을 빌기도 하고요. 그런데 정말 안 좋은 일이 생길 때 그게 깨지더라고요. 미신이라면 미신이죠. 뭐든지 공을 들여서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모았을 때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힘이 나온다고 믿어요. 그래서 전 다신교예요. 다 믿어요.
전 그래서 신이 없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하거나 착하다고 잘되지 않잖아요.
배우들도 이건 무슨 그런 생각도 없고 얼굴 가지고 먹고 살려는 사람도 있지만 잘 되죠. 결국은 정의가 이길 거라는 걸 믿고 살아야죠. 어차피 한번 태어나면 죽는 거잖아요. 헤밍웨이나 똑똑한 사람들이 왜 자살을 선택했겠어요. 결국 끝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 마음을 어떻게 가지고 나갈까 그게 중요한 거죠. 머리가 복잡하고 신중하게 생각할수록 세상 살기 힘든 거예요. 근데 예술 쪽에 있는 사람들이 머리 복잡하고 예민하거든. 다른 사람들이 못 느끼는 걸 자기들은 ‘이상하다. 왜 사람들이 저걸 왜 그냥 넘기지?’ 이러고요. 홍상수 감독님도 만날 그런 거 파고 있고. 예술가들이 그러니까 자꾸 뭘 만드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자극받는 거고요. 예민한 사람만 있다면 또 난리 나지. 다 자살하고. 세상 살아가는 포맷이 다 다른 거죠.
지금 점집에서 상담받는 기분이에요. 충고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인터뷰하는 분들이 항상 저에게 그 얘기해요. 근데 먼저 물어봐놓곤.
예민한 편이에요?
굉장히 예민해요. 그런데 전 주연배우가 다 커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촬영장에서 자기 몸 힘들다고 사람들과 얘기도 안 하고 그러면 안돼요. 얼마나 어렵겠어요. 사람 일은 정성이라고 항상 얘기하는 게 그렇게 카메라 막내, 의상팀 막내까지 신경 써서 친하다 보면 제가 연기할 때 다 집중해요. 심지어 소음이 들려서 NG가 나면요, 자기들끼리 막 더 화내요. 내가 정말 좋은 연기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배우라는 녀석이 ‘후까시’나 잡고 있으면 “아이씨, 빨리 대충 찍고 좀 가지. 피곤해 죽겠는데.”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가족같고 그래야 힘들 때 “우리 커피 한 잔 하고 힘내자” 이러죠. 그런 마음이 모여야 잘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대신 끝내고 나서는 조용한 데 가야 해요. 산에 혼자 가고 혼자 시간을 보내죠.
이번엔 일본 다녀오셨다고요.
놀러 갔다 왔어요. 근데 그런 거 쓰지 마세요.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닌데. 못 가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소외감이나 박탈감 느끼겠어요.
그럼 옷도 사면 안되죠. 점심 먹으러 제트기 타고 브라질 다녀오는 할리우드 스타들도 있는데, 그 정도로 죄책감 가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다고 다 안하고 살 순 없죠. 저도 옛날에 그런 오해 많이 했었어요. 그런 거 하지 말아야겠구나. 근데 그러면 술도 한 잔 먹으면 안되겠더라고요. 소주도. 하하. 죄책감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상처받잖아요. 그럼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배우에게 모순된 두 가지를 원하긴 하죠. 도덕적인 한계치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배우를 보면서 해방감을 느끼고 싶기도 하고, 캐릭터와 실제 배우 사이의 선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걸 요구하기도 하고요.
우리나라에선 배우에게 부처님 수준을 바라죠. 진짜예요. 할리우드는 이 배우랑 사귀다가 다른 배우랑 사귀고 그래도 그 배우의 영화를 보러 가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배우가 없어져요. 사람한테 사람 이상의 것을 바라는 나라예요.
<생활의 발견> 대사 같아요. “사람한테 사람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래?”
배우로서 한국에서 살 거면 조심해야죠.
지금까지 스캔들도 조심하고 자신을 단속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건가요?
상대방을 더 배려하자는 거죠. 배우들이 착각들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사람들이 좋아해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배우는 없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배우는 소비자가 소비해주는 거예요. 사진 찍자고 할 때 “아, 왜이래요” 이럴 필요가 없어요. “네”하고 그냥 찍으면 되는 거예요. 물론 사람이 너무 많으면 찍어주기 힘들겠죠. 뭘 그걸 인터넷에 초상권이니 뭐니 하면서…. 더 존중해야 해요. 자기를 좋아해주니까 자기가 밥 먹고 살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죠. 대부분 바보 같은 생각을 하죠.
배우 무서워 촬영 못하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아주 바람직한 생각이네요.
제가 좀 ‘똘아이’라서요.
그래서 그렇게 바쁜 와중에 이모티콘 날려가며 홈페이지에 글도 올리나요?
요즘엔 잘 안 올려요.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이상한 환상을 갖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하늘이 파란데 꼭 언제 내가 먹었던 맛있는 음식이 생각난다”라고 쓰면 그걸 미화하고 포장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꺄악, 김상경 님 너무 멋져요” 이런 거요?
네! 전 개인 김상경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라 각 작품 속의 저를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제 팬이 <살인의 추억> 보고 너무 좋았대요. 근데 드라마 <변호사들>에 나왔다고 하면 자기도 봤다면서 이래요. “근데 무슨 역할로?” 연결을 못 시키는 거죠. 배우는 그래야 해요. 만약 내가 쇼 프로그램 나가서 웃기는 이미지가 생겼다고 하면 심각한 역할 할 때 부딪혀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그렇게 훌륭한 인간도 아닌데 인터넷에 올리는 글로 포장되는 게 싫더라구요. “오빠는 너무 감수성이 예민하세요” 어쩌구 저쩌구. 사생활 노출도 그래서 싫어하죠.
근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얘기했어요?
오보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묻길래 “있죠. 어머니, 아버지도 사랑하고 홍 감독님도 사랑하고 다 사랑합니다”라고 했죠.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요.
근데 지금은 진짜 없어요. 진짜. 어쨌든 신비주의로 가야 해요.
신비한가….
그런 건 아니고. 여러분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배우에 대한 알 권리 주장하는데, 그거 알게 되면 서로 불행해져요. 제 영화를 못 봐요.
안 좋은 면이 많나 보군요.
굉장히 안 좋아요. 배우 연기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게 될 거예요.
하긴, <초대>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은 홍상수 감독 영화 나와서 싫다고 하고, 홍상수 감독 영화에 나온 모습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김상경이란 배우는 도대체 무슨 생각 하고 사는지 물어봐 달라는 사람이 많았어요.
평생 알 수 없는 배우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꿈이에요. <화려한 휴가>도 안 해본 캐릭터라서 많이 좋아할 거예요. 제 역이 택시 기사가 아니라 대학생, 지식인 이런 거였으면 안 했을 거예요. 5·18 민주화운동을 일반 사람들 시각에서 말하니까 편하게 볼 수 있을 거예요.
아까부터 너무 자랑이네요.
그게 중요한 거거든요. 내 얘기 하려고 인터뷰하는 게 아니라서요.
얼마 전 인터넷을 보니 ‘대한민국의 까칠한 남자 배우 12명’ 중 하나에 이름이 올라와 있던데요. 인터뷰 안 하고 자기 얘기 하는 거 싫어한다고. 같이 나란히 있는 배우들이 설경구 조승우 유지태 이런 분들이던데.
저 안 까칠한데. 드러내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많이들 오해하는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이 만났는데 기분 좋게 헤어져야지 왜 그래요.
인터뷰한 분들하고 기분 좋지 않게 헤어져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몇몇 성숙하지 않은 분들이 인터뷰 안 해줬다고 악의성 글 올
리기도 하는데, 그건 악플 다는 초등학생과 다를 바가 없는 거죠. 지난 번 영화 할 때도 홍보팀에서 “인터뷰 안 해주면 악의성 글이 나와요” 그러는데 “그런 게 세상에 어딨냐”고 그랬어요. 근데 실제로 존재하더라고요. 그게 소설가예요, 뭐예요?
자신을 좀 덜 드러내서 그런지 악의적인 글은 없는 것 같은데요.
네. 그래야 해요. 내가 믿는 한 진실성 보여주면 사람들이 알 거라고 생각해요. 기자 분들도 주위에서 다들 절 좋아한다고 말해줘요.
아, 그건 인터뷰할 때 기자들이 누구에게나 다 하는 말이에요.
네. 저도 그래서“ 주위에서 다 좋아하고요” 이러면 “인터뷰용인 거 다 알아요” 이래요. 전 한 번도 스타를 꿈꿔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많이들 얘기해요. 배우로서 욕심이 좀 없어 보인다고.
욕심 낼 게 뭐가 있겠어요?
<살인의 추억> 이후 계속 굵직굵직한 영화만 출연할 수도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역으로 갔어요. 드라마 한다고 하니까 다들 미쳤다고 그랬죠. 근데 배우들이 지들 편하자고 드라마 안 하는 거지. 40대 이상의 어머니 세대는 저녁 드라마 한 편이 하루의 노고를 잊게 해주는 큰 역할이라구요. 그걸 우습게 생각하면 안돼요. 근데 사람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돈도 안되고, 작품도 안돼요. 감독, 배우, 홍보사, 배급사, 머리 좋은 사람들 모여서 “자, 이번 영화는 100억 들여 가지고 20만만 드는 거야, 응?” 이런 사람 어딨어요. 사람이 자꾸 착각하면 안돼. 그런 걸 자기들이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려야 해요. 물론 통제하긴 하죠. 신인 때 드라마 촬영하는데 갑자기 CF가 들어온 거예요. 드라마 석 달 찍는 것보다 돈을 더 많이 주더라구요. 그렇지만 CF안 찍었어요. “저 새끼 치사해” 이런 말 들으면 안되죠. 10년 배우 한 보람은 하나밖에 없어요.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가 하나 생긴 거예요. 술 먹고 있으면 가끔 삐뚤삐뚤하게 쓴 쪽지가 와요. 연기 잘 보고 있다고. 아저씨들이 술 먹다가 보내주신 거예요.
그래도 수익 창출이 중요한 거대 매니지먼트사 소속인데 부딪힐 일 없나요?
거기서도 내가 똘아이인 거 알고 그냥 내버려둬요.
한 10년 정도 하면 누가 찾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없나요? 홍상수 감독이 있으니까 괜찮나요?
홍 감독님은 엊그저께도 만나 술 먹었지만, 정말 제가 사랑하는 분이에요. 배우란 직업은 항상 고용불안이라고 할까. 저도 지금 실업자잖아요. 어렸을 때는 금방 사라지는 건 아닐까 불안해했어요. 근데 그것도 내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저도 내공 쌓아서 이렇게 된 거예요.
산 다니더니 도인 다 됐네요.
저라고 왜 걱정 없겠어요. 사람의 마음은 다스리라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된 지 오래 돼서. 이젠 지루할 정도죠. 이제 또 제가 좋아하는 감독님들과 여행도 다니고 술도 마셔야죠. 궁금한 거 또 없어요?
- 에디터
- 나지언
- 포토그래퍼
- Roh Byoung
- 스탭
- 스타일리스트/신래영, 헤어 & 메이크업/ 위고 by 정승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