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초민감자 엠패스는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어쩌면 엠패스는 그저 현대의 아이러니 혹은 최신 유행 미신인지도 모른다.
2017년부터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에 “내가 엠패스(Empath)”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가디언>이나 <바이스> 등의 매체는 대체 엠패스가 뭔지 탐구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엠패스를 자처하는 이마다 엠패스의 정의를 다르게 내리기는 하지만, 교집합만 모아보자면 엠패스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처럼 느끼는 능력 또는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사이언스 픽션의 팬들에게 ‘엠패스’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1968년 12월 6일 미국의 NBC에서 방영한 <스타트렉 : 디 오리지널 시리즈>의 세 번째 시즌 열두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이 ‘엠패스’다. 광활한 우주를 탐사 중인 엔터프라이즈호의 커크 선장 일행은 미나라(Minara) 항성계의 두 번째 행성을 찾았다가 정체불명의 못난이 외계인들에게 사로잡혀 지하 감옥에 영문도 모르고 갇힌다. 이 외계인 여성에겐 미모 말고도 특이한 점이 있다. 성대가 아예 없어 말을 못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커크 일행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안다는 사실이다. 마치 텔레파시처럼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내는 이 외계 생명체의 존재가 엠패스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와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에 등장하는 맨티스도 엠패스 능력자다. 맨티스 역시 접촉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읽고 공감한다.
초능력의 일종인 엠패스는 23세기의 미나라 항성계나 마블 유니버스에만 있는 게 아니다. 엠패스를 학술적인 용어로 그럴듯하게 정의하고 이를 자기 홍보의 방편으로 쓰는 정신과 의사가 21세기의 지구에도 있다. 최근 한국어로 출간된 <나는 초민감자입니다>의 저자인 정신과 의사 주디스 올로프가 대표적이다. 올로프에 따르면 엠패스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있는 공감 거름막이 없어서 타인의 감정과 에너지, 신체 증상을 우리 몸으로 고스란히 느끼는 사람”이며, “공감 능력이 떨어지거나 없는 에너지 뱀파이어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경계선을 긋지 못한 채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엠패스’를 공감각자가 아닌 ‘초민감자’로 번역한 이 책을 살펴보면 초민감자 중에는 ‘타인에 관한 직관적인 정보를 즉각적으로 수신’하는 텔레파시 초민감자도 있고, ‘수면 중에 미래의 징후를 보는’ 예지적 초민감자도 있고, ‘식물의 욕구를 느끼고 그들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식물 초민감자도 있다고 한다.
이런 허황된 내용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진짜 문제는 주디스 올로프의 책이 세상을 초민감자와 에너지 뱀파이어의 세계,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는 세상으로 가르고 독자에게 피해자의 월계관을 씌워 준다는 점이다. <나는 초민감자입니다>라는 책에 따르면 나도 초민감자다. 이 책에는 초민감자인지 아닌지를 자가 진단할 수 있는 설문이 담겨 있다. “말싸움이나 고함을 들으면 불편한가?”, “군중 속에 있으면 녹초가 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기운을 차려야 하는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과식을 하는가?” 등의 20개 질문에 ‘예’라고 답한 문항이 1~5개라면 ‘부분적 초민감자이며, 6~10개라면 중간 정도의 초민감자라는 식이다. 마감 때면 피자를 다섯 조각씩 먹고, 놀이공원이나 대형 마트에 가면 지치고, 도로에서 소리 지르며 싸우는 접촉 사고 운전자들을 보면 힘들었기에 몇몇 문항에 ’예’라고 답했더니 중간 정도의 초민감자가 됐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감정 거지’, ‘눈치 거지’라는 핀잔을 들으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초민감자가 됐다. 이왕 초민감자가 된 김에 옆방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의 감정을 읽어내보려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기분 안 좋으니까 저리 꺼지라”는 말만 들었다.
나만 그런가 싶어 작은 실험도 해봤다. 구글 설문으로 주디스 올로프가 쓴 자가 진단과 초민감자의 정의를 적어 15명에게 보낸 후 자신이 초민감자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의외로 ‘내가 초민감자’라고 답한 사람이 꽤 있었다. 이 중 급하게 연락이 닿은 네 명에게 “정말 초민감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내가 초민감자니까 당연히 존재한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네 명 중 그 누구도 지금의 내 기분을 제대로 맞히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싶어 한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초민감자는 대체 무슨 감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말거리라는 얘기다.
그럼 대체 세상에 있는 이 많은 초민감자는 다 어디서 온 걸까? 초민감자들은 주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 다른 초민감자들을 치유하며 서식한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데이비드 소바지 역시 유튜브 엠패스다. 소바지는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다.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아 상대방을 살펴본 후 “당신에게선 감정의 레이어가 느껴져요. 겉으로는 기쁜 척하지만, 그 안 깊은 곳에는 옅은 슬픔과 분노가 묻어 있어요”, “깊은 절망이 느껴지네요” 따위의 말을 건넨다. 누가 아니겠는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 중 가슴에 슬픔과 분노 한 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엠패스를 찾아가 돈까지 내며 자신의 마음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즐겁고 유쾌한 상태일 리는 없다. 뉴욕의 비즈니스맨을 주로 상대하는 소바지에게 개인 세션을 받으려면 시간당 2백 달러를 내야 한다.
어쩌면 엠패스는 그저 현대의 무당 혹은 최신 유행 미신인지도 모른다. 글로벌 온라인 미디어 바이스의 유튜브 영상을 보면 한 리포터가 앞서 언급한 소바지에게 “엠패스 흉내를 내며 사기를 치는 사람도 있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소바지는 “엠패스라는 단어가 유행하니까 돈을 벌려고 뛰어드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라며, “이제 ‘사이킥’(심령술사)이라는 단어는 사라지는 추세다. 엠패스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니까 자기가 엠패스라고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라고 말한다. 이 영상 아래에는 “나는 진짜 엠패스인데, 이 영상에 나온 사람들은 다 가짜다. 진짜 엠패스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고독을 즐긴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이게 바로 엠패스의 아이러니다. 진짜 엠패스라면 자신이 엠패스라는 사실을 광고하고 다닐 수가 없다. 왜? 나 같은 사람이 욕을 하면 너무 괴로울 테니까. 에너지 뱀파이어들의 악플이 엠패스의 프라나(산스크리트어로 호흡, 숨결을 의미. 엠패스들이 자주 사용한다)를 죄다 빨아들일 테니까.
다른 사람의 감각을 느끼는 능력은 이미 오래전에 과학자들이 발견했다. 다만 과학은 이를 엠패스라 부르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거울 공감각이다. 거울 공감각이란 눈으로 본 다른 사람의 촉각을 실제로 느끼는 매우 특이한 뇌과학적 현상이다. 2007년 영국 서식스 대학교의 뇌과학자 제이미 워드 교수는 진짜 ‘거울 공감각’을 가진 사람을 골라낼 수 있는 실험을 설계했다. 실험 참가자에게 비디오 모니터만 보게 한 뒤 옆에서 살짝 볼을 찔러보는 간단한 실험이지만, 지금까지 나온 모든 공감각 실험 중 가장 확실하다. 참가자가 보고 있는 비디오 영상에는 한 배우가 등장하고, 참가자가 보기에 오른쪽에서 손이 쑥 나와서는 배우의 오른편 볼을 찌른다. 참가자가 이 장면을 시각으로 보는 동시에 연구진은 실제 손으로 참가자의 왼쪽 볼을 찌른다. 참가자에게 어느 쪽 볼을 찔렸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 보통 사람들은 당연히 왼쪽 볼을 찔렸다고 답했다. 그러나 거울 자극 공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오른쪽 볼이라고 답하거나 양쪽을 다 찔렸다고 답했다. 눈으로 본 시각 자극을 실제 촉각으로 느껴 어느 쪽 볼을 찔렸는지 헷갈린 것이다. 이 테스트를 통과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당시 연구진은 거울 공감각자를 찾기 위해 대학생 567명에게 다른 사람의 몸에 가해지는 촉각을 느끼는지를 물었는데, 61명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이 중 제작진이 설계한 실험을 통과한 사람은 9명뿐이었다. 그러나 엠패스는 볼을 찔리는 감각 따위를 공감하는 정도의 능력이 아니다. 엠패스들의 주장에 따르면 심연의 깊은 감정, 자신도 몰랐던 숨겨진 감정까지 공감하는 게 진짜 엠패스다. 엠패스를 자처하는 사람 중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초민감자는 몇 명이나 될까? 단 하나 확실한 건 있다. 진짜 엠패스라면 절대 내겐 고백하지 말아달라. 내게 고백하는 순간 당신은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짙은 회의감에 압도당할 것이다. 글 / 박세회(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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