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희의 얼굴은 봐도 봐도 잡히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은 매일매일 바뀐다. 과연 하나의 얼굴로는 기억할 수 없다.
오늘 촬영하면서 꼭 지키고 싶은 게 있었어요. 앞머리가 없는 천우희. 좋아요. 매번 학생 역할을 해서 항상 앞머리를 짧게 잘랐어요.
여러 자료들을 찾아봤는데, 똑같은 질문과 대답이 반복돼서 어떤 사람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촬영 내내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볼게요. 혈액형이 뭐예요? 하하하하. 데뷔 이후 처음 듣는 질문이에요. O형이에요. O형 같나요?
0형이나 A형을 의심하긴 했어요. 내친김에 프루스트의 질문을 해볼까 해요. 살면서 가장 용서하고 싶은 실수는 어떤 거예요? 심오한데요? 젊었을 때 너무 소극적으로 살았어요.
지금 스물여덟 살이죠? 아, 20대 초반에 그랬어요. 청춘을 불태우지 못한 것 같아요. 주저주저했어요.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가봤어요.
해외를? 해외는 자주 갔어요. 대부분 동남아였죠. 그리고 일본 가봤어요.
두 번째 프루스트 질문이에요. 어디서 살고 싶어요? 태어나고 자란 이천요. 정말 좋아요.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농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있어요. 항상 자연과 함께하며 자랐어요. 집에서 동물을 많이 키우고 교감하면서 컸어요.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는 건 정말 중요해요. 시간 날 땐 가재도 잡으러 가야 해요. 지금은 어머니와 합정에서 사는데 주말마다 내려가요. 이천이 워낙 가까우니까요.
합정 집에선 뭐가 보여요? 앞 건물. 답답해요. 서울 사람들은 참 피곤하겠어요. 이렇게 공기도 안 좋은데서 자라다니.
답답할 땐 뭘 해요? 작년에 제주도 다녀왔어요. 제주도에 간 것도, 혼자 여행 간 것도 처음이에요. 막상 가보니까 별거 아닌데, 왜 그렇게 미뤄왔는지. 혼자 외국도 가보고 싶은데 겁이 많아서…. 그래서 ‘안전할 것 같은 제주도에 가자’ 해서 다녀왔어요. 진짜 제주도는 최고예요. 매번 가족들과 여행 다니다가 혼자 가니까 더 좋았고요.
영화 <써니>에서 본드를 부는 상미 역할을 할 때부터 어떻게 자랐을까 궁금했어요. 하하.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해요. 매번 어두운 역할을 해서 그렇겠죠?
영화 <한공주>는 관객의 분노를 유발하려고 애쓰지 않고, 불안에 집중해요. 그 불안이 철저하게 개인의 것일 수 있는 건, 한공주를 연기한 당신의 ‘눈치 보는 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전 사랑을 정말 많이 받고 자랐어요. 오히려 그게 스트레스일 정도로요. 특히 오빠가 저를 너무 예뻐해요. 때리거나, 욕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 점이 좀 숨 막힐 때도 있었어요.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늘은 누구에게나 있겠죠? 제겐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증이 그늘일 수도 있고요. 대학교 때도 10시 안에 들어가야 했어요. 일할 때는 터치를 안 받아도 되니까 일이 더 좋아졌어요. 가족의 간섭이 없으니까.
자유롭게 살고 싶으니 결혼 생각은 미뤄뒀을까요? 아뇨. 결혼에 대해선 항상 생각해요.
마지막 연애는 언제예요? 올해 들어서 못해본 거 같아요. 12월…. <카트>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얼마나 만났어요? 뭘요?
남자친구요. 아, 연애! ‘여행’으로 들었어요. 지금 제가 스물여덟이죠? 음, 스물다섯 살이 마지막 연애예요.
영화 찍을 때인가요? 제가 일이 없을 때 같은데요? 일이 없어지면서 연애도 그만 뒀어요. 그때는 친구를 비롯한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혼자 있고 싶었어요. 그걸 보기가,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서로서로.
세 번째 프루스트 질문이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남자는 누구에요? 평생 저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겠죠? 근데 그럴 수는 없다는 걸 누구나 알잖아요.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건 정말 쉽지 않죠. 전 남자의 얼굴, 키 그런 거 다 안 봐요. 착한 사람이 좋고, 지낼수록 괜찮은 사람이 좋아요. 특히 위트 있는 사람. 제일 중요한 건 힘든 일이 있어도 재치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바람직한 결혼 상대네요. 나이가 좀 들었을까요? 요즘엔 거울 볼 때마다 느껴요. 하하. 매번 고등학생 역할을 하다 보니까 어린 친구들하고 연기를 많이 하잖아요. 어렸을 땐 뭐가 그리 신나는지 기운이 팔팔 넘쳤는데, 이젠 아무리 방방 뜨려고 해도 ‘하이’ 되진 않아요. ‘다운’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나이를 먹을수록 감정 상태가 일정하게 이어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노력해야 에너지가 생기죠.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삭이는 편이에요.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서 좀 힘들죠. 항상 자기 성찰을 하죠.
O형 같지 않은데요? O형이 은근 소심하지 않아요? 하지만 무관심한 것엔 정말 신경을 안 써요. 특히 남 일에 관심이 없어요.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볼지, 저 사람이 무슨 얘길 할지 상관 안 해요. 누군가는 다른 사람 시선에 맞추려고 노력하잖아요. 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편이에요.
관객의 시선도? 아뇨, 알고 지내는 주변인에 대해서만요. 제가 걱정한다고 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에 본인한테 신경을 쓰는 게 더 좋지 않나요? 남 얘기하거나, 다른 사람 신경 쓰는 게 굉장히 소비적인 일인 것 같아요.
설마 뒷담화를 안 한다고…? 뒷담화 하죠. 하는데, 한 번 하면 완전히 풀려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얘기를 하고 나서 더 신경 쓰고 더 미워하고 이러잖아요?
혼자 있을 땐 주로 뭘 해요? 생각을 많이 해요. 연기에 대해 파고들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의 행동이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을 때, 저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대입해보기도 해요. 지나간 일을 반성할 때도 있고요.
혹시 종교 있어요? 없어요. 만약 종교를 갖는다면, 저는 굉장히 성실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그럴 자신이 없어요. 그럴 정도의 믿음이 생기지도 않고요. 그래서 아예 시작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사주나 타로 같은 건? 연초마다 부모님께서 토정비결을 보시는 것 같아요. 근데 올해는 안 봤어요. 계속 비슷한 얘기들인 것 같아서요. 앞으로 정말 잘 될거다, 늘상 그런 얘기들.
그런데 잘 안 된 적이 있어서? 그런 예언이 실제와 비슷하게 일어난 것 같지만 언제나 조금씩 비켜나가죠.
천우희에게 올해는 아주 아주 중요한 해 같아요. <한공주>는 호평을 받았지만, 다음 작품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수도 있어요. <오아시스>에서 똑같은 이름의 한공주를 연기한 문소리는 그 영화로 베니스에서 상까지 받았지만 그 이미지를 뛰어넘기 위해 다음 작품으로 <바람난 가족>을 선택했어요. 문소리 선배님과 친한 분이 제 성격이 문소리 선배님과 비슷하대요. 그리고 저에게 문소리 선배님처럼 될 것 같다는 얘기도 해주셨어요. 감사하죠.
스타보단 배우로 향하는 것에 만족하나요? 스타보다는 인기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분명히 어느 정도 인기가 있어야 그만큼 기회가 늘잖아요? 저도 지금 주어진 것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하고 싶은 배역도 많고 큰 욕심이 있는데, 그렇게 다양하게 하려면 결국 기회가 늘어나야 하니까요. 스타든 배우든 인기가 있어야 기회를 얻을 수 있어요.
인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인지도겠죠. 인지도가 없으면 저를 싫어할지, 좋아할지, 호감인지, 비호감인지조차 정할 수 없으니까요. 제가 생각했을 땐, 전 밉상은 아닌 것 같아요. 하하하하. 배우의 인기는 배우 개인이 지닌 평상시의 매력으로부터 나오죠. 그러니까 배우 내면의 얼굴을 대중들이 본다고 믿어요. 만약 사람들이 저를 싫어한다 해도 괜찮아요. 일단 절 알고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싫어해도 여전히 절 모르는 사람은 많을 테니까요. 하지만 절 많이 알아준다면 마땅히 좋아해주지 않을까요?
사랑스럽게 보이는 방법이 있어요? 매력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좀 아는 것 같아요. 본능적으로요. 이 사람한테 어떻게 행동해야지, 작정하는 순간 의도가 읽히잖아요? 예민한 편이라서 그런 것들을 잘 알아요. 사람들은 어필하려고 할수록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그런 식으로 남자에게 어필하는군요. 저는 여자 분들이 더 좋아해주는 것 같아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보다 여자가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이 광고를 더 많이 찍는 것 같아요. 여자 팬 중요하죠. 그리고 남자 팬들은 표현을 심하게 하지 않아요. 여자 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을 하기 때문에 인지도나 인기에 훨씬 영향을 미치죠. 여고에서 반장 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여고 나왔어요. 고등학교 땐 연극한다고 임원을 못했지만 초, 중학교 때는 항상 했어요. 전교 회장, 부회장 모두. 중학교 땐 전교 회장 된 애보다 인기가 더 많았는데, 선생님이 그 친구보다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부회장을 시켰죠. 그 친구가 전교 1등이었거든요.
배우로서 질투를 느낄 때가 있었나요? <써니> 했을 때도 앞으로 일을 더 해야지, 더 큰 배우가 돼야지, 하는 생각 같은 건 없었어요. 그땐 회사 없이 혼자 일했죠. 일할 땐 하고, 안 할 땐 평범하게 학교 다녔어요. 오히려 <써니>가 잘된 다음에 회사에 들어가고 주변 기대에 들뜨기도 하면서 욕심이 생겼어요. 알려진 배우가 되고 싶다, 작품을 많이 하고 싶다. 그러다 뜻대로 안 되니까 정말 자신을 하찮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대부분의 20대가 겪는 기분일거예요. 자신이 엄청나게 특별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막상 세상에 나오니 보잘것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 제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 제일 힘들었어요.
운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연기도 못하는데 잘되는 건 그 사람 복이죠. 으하하하. 일하면서 계속 느끼는 거지만 참 대중예술이라는 게, 재능만으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 깨달음의 연속이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포기의 연속, 부족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정의 연속.
뭘 인정했어요? 뭐가 부족할까 생각하면 결국 얼굴을 고쳐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향해요. 좀 모자란 것 같지만 그럼에도 마냥 제 얼굴이 좋아요. 배우 천우희로서 존재하는 얼굴이죠. 요즘은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얼굴을 고쳐서 더 예뻐지면 더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고. 지금보다 더 잘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결국 자신을 잃는 거잖아요. 전 스스로 지켜야 할 제 자신이 있어요. 존재감마저 버릴 순 없어요.
성형하지 않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군요. 시대는 바뀌니까 어느 순간 통할 때가 있지 않을까요?
갑자기 <한공주>를 관통하는 아카펠라 노래 ‘Ciao, Bella, Ciao’가 생각나네요. 아, 그 노래요. 감독님께서 노래가 좋아서 영화에 사용했다고 했어요.
전 노래의 의미와 가사 때문에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노래인데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주의에 맞서 싸운 파르티잔이 부른 노래이고, 세계적으로 저항운동에서 많이 쓰인 노래라고 알고 있어요. 특히 가사가 한공주의 삶과 닮았어요. “오 사랑스런 사람아. 침입자를 발견했다. 이제 죽을지도 모르니 만약 내가 죽는다면 꽃 아래 묻어다오. 사람들은 날 보고 아름다운 꽃이라고 하겠지. 그러면 자유를 위해 죽은 꽃이라고 말해주오.” 와…, 띵한데요. 전혀 몰랐어요. 가사를 알고 나니까 왜 안 알려줬는지도 알 것 같아요. 어떤 노래인지 알았으면 극중 한공주처럼 듣자마자 좋다고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노래를 연습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무작정 끌려야 했으니까요.
영화에선 긴 전주만 나오죠. 가사가 나오기 전까지의 화음 부분만 사용해요. 아마도 가사가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당신과도 어울리죠. 전 어떤 식으로든 힘들어 보이나 봐요. 하하하하.
연기에서 투쟁이 느껴졌어요. 당신이 생각하기에 넘어설 수 없는 배우는 누구예요? 이영애 선배님요. 연기력 같은 능력이 아니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혹적인 분위기. 그건 정말 놀라워요.
우아함이라는 건 그런 거죠. 맞아요. 그건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제겐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아서 더 갖고 싶어요. 저도 신비로운 배우가 되고 싶어요.
사진 찍는 내내, 당신에게서 수많은 얼굴이 스쳤어요. 얼굴이 다양하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덕분에 어떤 배역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매일매일 얼굴이 달라요. 어쩔 땐 엄마도 “내가 낳은 딸이지만 어쩜 그렇게 못생겼니, 정말 괴물 같다”고 하시죠. 하하. 근데 그 말에 동의해요. 분장팀도 항상 놀라는걸요. 굉장한 장점이자 단점이죠.
장점에 가까울까요? 전 고치고 싶지 않아요. 피부를 좀 어떻게 하는 건 있어야겠지만, 이목구비를 고친다거나 보형물을 넣고 싶진 않아요.
지금 약속하는 거예요? 제가 만약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자신 있어요? 자신 있어요.
아마 이 약속이 오래오래 기억될 거예요. 그러니까 대중예술을 하는 많은 분이 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외모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식을 좀 깨야 될 것 같아요. 여배우가 꼭 정형화된 모습으로 아름답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하고,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면 매력적이죠. 그 자체가 아름답고요. 제대로 역할에 빠져서 연기를 해보기도 전에 단지 얼굴만 보고 배우를 거부하는 것 같아요. 외국에선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하잖아요. 심지어 어떤 여배우는 외모를 망가뜨리죠. 반대로 굉장히 매력적으로 몸매를 만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이제는 인식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바뀔까요? 안 바뀌면 그만둬야죠.
- 에디터
- 양승철
- 포토그래퍼
- 김지양
- 스탭
- 헤어 / 케일라 by 김활란 뮤제네프, 메이크업 / 조수민 by 김활란 뮤제네프, 어시스턴트 / 이혜원, 이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