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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의 K-POP 탈덕기

2019.11.08GQ

‘신화’ 이후에 20년 만에 ‘팬질’을 시작한, 어느 8x년생의 K-pop 입덕부터 탈덕까지의 롤러코스터같은 6개월을 소개합니다.

뒤늦은 K-pop 입덕부터 탈덕까지 딱 6개월이 걸렸다. 20년 전의 팬질과는 너무나 달라진 환경에 깜짝 놀랐고, 그 변화 때문에 밤을 새가며 행복한 덕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멘탈을 위협하는 K-pop의 도끼질이 시작됐고, 10번의 도끼질에 탈덕을 결심하고 말았다. 그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하루의 기록.

1 브이라이브의 충격
90년대에는 이런 ‘창고 대방출’ 같은 팬서비스는 없었다.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1시간 넘도록 팬들과 화상통화 같은 대화를 한다? 시시콜콜하다못해 일반인과 다름없는 것 아닌가 싶은 소박한 이야기마저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처음엔 너무 좋았다. 출근길이나 퇴근길에도 남친과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브이라이브 켜서 시청했다. 그런데 갈수록 피로감이 몰려왔다. 배경화면에 걸리는 시시콜콜한 장면, 브이라이브를 하는 태도나 자세까지 문제 삼는 팬들이 보였다. 회사에 대해 은근히 불만을 표출하는 아이돌, 스케줄이 없어 의기소침해진 내 사랑스러운 아이돌의 그늘진 표정, 이런저런 궁색함이 드러나는 ‘자제 컨텐츠’의 안쓰러움이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계속 더 내밀한, 더 못보던, 더 옆집 남자같은 내 아이돌의 모습을 싶어하는 나를 마주할 때도 약간 괴로웠다. 발톱의 때 하나도 없기를 바라는 팬의 마음과, 더 소탈한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팬의 마음이 쉴 새 없이 교차했다.

2 차트아웃의 충격
컴백을 하고, 음원을 발표하면 ‘총공’이 시작된다. 90년대에도 열심히 CD를 샀지만, 지금은 CD플레이어도 없는 학생들이 CD 사재기를 한다. 여유가 있는 누나 팬들은 박스떼기로 앨범을 샀다. 앨범에 돈을 쓰지 않고 입으로만 팬심을 외치는 이들을 비난했다. 아이돌을 보며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하루에 스무번 정도 짓는 나도 틈틈히 열심히 앨범을 샀다. ‘숨스밍’을 했다. 팬들은 이를 두고 ‘노동’이라 불렀다. 아이돌은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대신 “고생했다, 수고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도 컴백 첫 주에 생각보다 쉽게 차트아웃이 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돌이 컴백하고, 얼마나 많은 팬들이 ‘노동’하길래 100위 안에 드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것일까? 팬덤의 노동과 인기를 1:1로 맞바꾸고, 그것을 인정하는 아티스트와 K-pop 질서에 놀란 턱이 한동안 다시 올라올 줄 몰랐다.

3 부상의 충격
내 아이돌이 인기가 있건 없건, 그래도 무대에서 해사하게 미소짓는 아이돌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저 나이에 어쩜 저리 프로처럼 카메라에 반응할까, 얼마나 연습실에서 노력했을까, 할미의 마음으로 화려한 그 무대를 즐겼다. 다만 수도없이 많은 아이돌이 무릎 부상, 발목 부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만…. 해외 스케줄을 가는 어느 아이돌의 트렁크에 진통제가 가득했다는 출처 모를 루머, 진통제를 먹고 신나게 무대를 한 뒤 스탭의 어깨에 기대어 절뚝거리며 퇴장했다는 목격담 등을 보면서는 엄마의 마음으로 눈물이 났다. 갈수록 기예에 가까워지는 춤을 보며 내가 과연 웃을 수 있을까? 누가 내 아이돌의 인권을 지켜주는 거지? 질문을 수없이 던졌지만 어디서도 답은 얻지 못했다.

4 사생팬의 충격
집 앞에서 대기타고, 집 주소를 알아내 밤낮으로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은 90년대 팬들도 다 했던 일이다. 택시를 타고 밴을 쫒아갔다는 이야기도 익숙했다. 하지만 해외 스케줄의 비행편에 동승하고, 기내식을 먹는 아이돌의 사진을 찍고, 입국 수속을 받는 아이돌의 얼굴을 대포 카메라로 당겨 찍고, 브이라이브를 하는 아이돌의 개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번호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홈마’는 사생팬과 ‘프로 팬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한번도 초상권 비용을 지불했을리가 없는 각종 ‘비공식 굿즈’를 판매하고 전시회와 영상회를 열어 티켓을 판다. 홈마 덕에 인기에 불을 지핀 아이돌은 홈마로 괴로운 날이 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5 팬싸의 충격
PC통신으로 아이돌 목격담을 공유하고 상상하고 키득대던 90년대에 비하면, 내가 씌우고 싶은 머리띠, 강아쥐 귀 코스튬, 화관, 간호사 모자, 의사 가운, 경찰 모자 등을 씌우고 원하는대로 셔터를 누를 수 있는 팬싸의 시대는 가히 충격이다. 이름을 부르면 카메라를 보고 하트를 날리고 춤을 추고 또 다시 하트를 날리고 입술을 삐죽이고 하트를 날리고 하트를 날리고….

6 ‘살빼’의 충격
극한의 다이어트를 하는 여자 아이돌의 세계를 남의 집 담 넘어보듯 여겼지만, 막상 아이돌의 팬덤이 되고 보니 ‘살빼’는 너무나 충격적인 한마디였다. 내가 좋아하는 대다수의 아이돌은 180cm가 넘는 ‘팔척’이었는데, 60kg 초반 대 몸무게를 유지하면서도 ‘살빼’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기아 수준으로 앙상해진 몸을 보며 “다이어트 성공해서 만족한다”는 내 아이돌이 웃을 때 내 온몸의 지방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홈마 사진을 보며 ‘살 빼서 미모 만렙 찍었다’고 좋아하는 어느 팬의 말을 들으며 두 손으로 빨개지도록 이마를 쳤다.

7 설리가 불러온 충격
늘 불안했던, 마음 한 켠에 늘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걱정했던, 그 일이 터지고 말았다. 과연 설리만 괴로울까. 지금 울고 있는 아이돌은 누구일까.

8 <퀸덤>의 충격
걸그룹 서바이벌 프로그램 <퀸덤>의 화려한 무대의 제작비를 제작진이 아닌 걸그룹이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반박기사라 떴지만, 쉽게 믿을 수 없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TV 프로그램 제작진은 아이돌에게 ‘인지도’와 ‘화제’를 제공한다는 빌미로 갑 중의 갑으로 군림한다. 엠넷의 <프로듀스 X 101> 시리즈 비하인드 영상에서 잠깐 스친 안준영 PD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러분만 잠 못자는 거 아니거든요? 우리도 잠 못 잤어요.”

9 몬스타엑스 원호와 셔누가 불러온 충격
그리고 몬스타엑스 원호와 셔누의 과거사 폭로 사건이 터졌다. 겨털 하나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던 팬들은 듣고 싶지 않던 과거사에 분열했고, 오열했고, 응원했다. 신화의 김동완은 언젠가 이런 글을 남겼다. “어린 친구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편히 자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건강하고 밝은 미소를 보여주길 바라는 어른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섹시하되 섹스하지 않아야 하고, 터프하되 누구와도 싸우지 않아야 하는 존재가 되길 원하고 있죠.” 잠깐 위로가 됐지만, 그야말로 털리는 멘탈은 잡을 길이 없었다.

10 <프로듀스 X 101> 조작 인정의 충격
그리고 11월 6일, <프로듀스 X 101>의 안준영 PD가 조작을 인정하고 구속됐다. 엄하게 아이즈원과 엑스원의 활동에 비상이 걸렸다. 아이돌 판에서, 진심으로 꿈을 좇는 사람은 스물한두 살의 아이돌 당사자뿐이라는 게 다시 한번 확인됐다. 꽃가루를 왕창 뿌려 아름답다 못해 눈물나는 청춘들의 엔딩 무대를 연출해낸 연출자는, 기획사로부터 40차례가 넘는 유흥업소 접대를 받았다. 환멸의 탈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뉴스였고 탈덕을 결심했다. 두 눈 질끈 감은 나는 한동안은 편하겠지만, 한 때 내가 사랑했던 아이돌은 어떡하나. 지금 K-pop 팬덤은 지금 건강한가. 오로지 돈으로만 움직이는 아이돌 산업은 과연 언제까지 승승장구할 것인가.

    에디터
    글 / 전혜선(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