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남자의 사려 깊은 눈웃음에 빠진 채 놓쳤던 것들. 이제 진짜 배용준을 만날 시간.
배용준을 볼 때마다 두개의 낱말이 생각난다. ‘기준’과 ‘정직’. 지금까지 그를 세 번 만났는데, 세 번째 그를 만난 날의 감흥은 조금 복잡했다. 마치 서울역에서 옛날 친구를 만났는데, 결혼도 하고 빌딩도 짓고 성공했단 소리는 분명 듣긴 들었는데, 뭔가 사색적인 음영으로 더 까칠해진 턱을 볼 때 같은 연민이랄까. 그래서 한개 낱말만 더 보탠다. ‘허심탄회’. 날씨가 지붕 아래 낮게 내려온 날, 청담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발레 맡겨두었던 차를 기다릴 때, 그는 (차고 사람도 마구 지나다니는) 한데 테라스에서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야외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늘도 그랬지만, 당신에겐 길을 걷고 쇼핑하는 식의 모든 일상이 박탈당한 것처럼 보여요.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누리는 일상이 결코 없는 것처럼. 없어요, 그런 거.
하나도? 네.
그럼 뭐라도 사고 싶을 땐 어떻게 하죠? 살다 보면 눈깔 사탕이라도 사고 싶을 때 있잖아요? 제 스타일리스트가 사줘요.
그럼 언제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스크리닝해 주는 상태 속에서 다녀야 하나요? 꼭 그렇진 않은데 행동 반경 자체가 작아요. 집, 사무실, 체육관.
그럼 서울 지리도 잘 모르겠네요? 예전엔 그래도 좀 다녔죠. 차 타고도 다니고. 어디, 호텔 가서 누구 만나면 거기 그냥 딱…. 그 담에 차 타고 나오고. 롯데 가면 거기, 저희 회사에서 하는 커피숍이 하나 있어요. 거기도 뒷문을 통해 위까지 그냥 가니까.
옛날 우상들은 배짱이나 본능에 의해 움직였죠. 그러나 지금 당신처럼 그렇게 존재감을 제한하면서 산다는 건 뭔가요? 못살 것 같아요, 이렇게 평생 살라면요. …고통스러워요, 어떤 때는. 그런 환경이라도 자유롭게 생활하는 분들 있잖아요. 저는 성격 자체가 그렇지 못해요. 제가 그어놓은 선에서, 아니면 남들이 그어놓은 선에서 튀어나가지 못하는 거예요. 자꾸 이 안에서만 있게 돼요. 그게 솔직히 저한테는 많이 부딪히는 부분이거든요.
방금, 당신을 만나기 전에 <외출>을 또 보고 왔어요. 그런데 겨울 옷을 백 벌이나 껴입은 것처럼, 가슴에 동계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갑갑했어요. 답답하다기보단 갑갑했어요. 솔직히 <외출>을 할 때 그 답답함과 우울함과 외로움, 그런 모든 부딪힘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외출> 속에서 내가 갖고 있는, 담아 놓고 있는 걸 표출 못했다는 답답함, 쏟아버리지 못했다는 답답함이 계속 이어져 가더라구요, 영화를 끝내고 나서도요. 뭐가 뭔지 모르겠고. 김태우, 그 친구 만나서 연기에 대해 막 얘기 했어요. 난 연기가 너무 어렵다.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 그 친구가 딱 한 마디 하더라구요. 너는 연기에 모든 걸 다 쏟아 붓지 않잖아, 거기에 미치질 않잖아. 근데, 너가 연기에 미친다면 어느 누구보다 잘할 것 같아.
<챔프>에 리키 로슈더란 아역 배우가 나오죠. 아홉 살이었지만, 30세의 감수성을 가졌었다죠. 그렇게 본성이 이미 배우인 사람도 있고, 계산은 있지만 천재는 아닌 배우도 있지만, 당신은 팔 하나 뻗을 때도 너무 고뇌가 많으니까…. 그러나 <외출>에서, 거두절미하고, 당신이 손예진을 문 밖으로 배웅하는데, 그게 콘티에 있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의식해선 건지,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당신이 뒤로 들추어진 티셔츠를 왼손으로 잡고 내리는데, 난 거기서 ‘배용준만의 연기’를 느꼈어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배우를 왜 하지? 연기를 왜 하지? 한 가지에 미쳐서 연기는 내 인생이야, 이런 사람도 있잖아요. 송강호 선배님 같은 분들. 사람들이 절 볼 때는 그렇게 안 본단 말예요. 근데 난 연기를 왜 할까. 전 솔직히 연기를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요. 그 자체가 고통스러워요. 어떤 인물을 만들어 카메라 앞에서 표현한다는 것. 표현이 잘 안 될 때도 많구요. 근데 왜 할까.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는 것들? 그 사랑 때문에? 오케이. 그리고 내가 돈을 많이 버니까? 뭐, 많은 것 같아요, 그래도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부분들이. 보상도 있는 것 같아요. 연기 하나에만 빠져서 미칠 순 없는 건, 관심 둘 게 너무 많아서 그런가 봐요.
누구는 당신이 비즈니스 수완이 아주 발달한 데다, 뛰어난 전략가랍디다. 당신은 배우와 비즈니스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상이라는 무엇들을 동시에 운반하는 게 부대끼지 않나요? 한편 당신도 연기로 존중 받는 기분을 알고 싶지 않나요? 그렇죠. 나도 잘 하고 싶단 생각이 들죠. 그거잖아요. 열심히 하는 것과 잘하는 것관 다른 거잖아요.
당신의 이미지가 명예이자 멍에가 돼버린 거죠. 보상이 크니까 고통이 늘어나버렸죠. 그게 삶의 더러운 신비지만. 그렇죠. 얻는 만큼 잃어버리니까.
당신을 긴장시키는 누군가가 있나요? 모르겠어요. 동료 배우들 보면 저랑은 너무나 다른 사람 같아요. 저는 솔직히 배우들 보면 신기하거든요. 전 잘 못 어울려요. 배우들하곤 더 못해요. 끼가 없나, 이런 생각도 들거든요. 근데 친구들과 있으면 그렇진 않아요.
고아 의식이에요. 친구들끼리 잘 놀다가 양부모 될 사람이 나타나면 구석에서 주춤거리죠. 그들이 다른 애 데리고 사라지면 행복한 차 꽁무니 잠깐 쳐다보곤 다시 놀기 시작하죠. 그런데 당신이 지금 처지에서 바꾸고 싶은 게 있을까요? 저도 솔직히 키가 컸음 좋겠어요. 제 키도 크지만. 그리고 동선이나 우성 씨 보면 참 잘생겼다는 생각 들거든요. 솔직히 배움의 대상이 되는 부분들은 있어요. 하지만 한도 끝도 없는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하려구요. 앞으로 가는 길, 내가 만들어가는 거고. 어렵더라도.
당신 인생에 욘사마가 없었다면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 것 같아요? 똑같았을 것 같아요, 지금과. 전, 계속 그랬던 것 같아요. 이쪽 일을 하면서 쭉.
당신의 ‘기피’는 잘 알려져 있죠. 사람들은 당신을 보면서 완벽주의자다, 까다롭다 하지만 그건 주의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문젠 것 같아요. 못 하겠는 걸 어떡해요.
사람들이 만들어준 그 유령이 나는 아니니까. 언젠가 롯데 면세점에 갔더니, 사진 속의 당신은 일정한 수위의 웃음과 치아 개수로 팔을 벌리기도 하고 꽃을 주기도 하죠. 일본 여자들은 당신이 거기서 더 웃거나 덜 웃기를 바라지 않는다네요. 그런 얘긴 못 들었어요.
내 말은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한 치 거슬림 없어야 한다면, 그 ‘규격’ 때문에 스스로 피곤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저는 배우잖아요.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이고, 연기를 잘하고 싶은 사람인데, 어떻게 항상 그런 모습만 유지할 수 있어요? 얼마 전에는, 롯데 면세점 광고를 찍으면서, 난 이제 이런 표정이 싫다, 내가. 식상하다, 내가. 너무 싫증난다, 이게. 다른 것 좀 했음 좋겠다, 정말. 이런 얘길 했어요.
그랬더니요? 그냥 웃죠, 사람들은.
왜죠? 그냥, 그냥 웃더라구요, 사람들은.
당신도 취하고 싶을 때가 있겠죠? 나는 허구한날 그렇지만.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적은 몇 년 동안 없었던 것 같아요.
절제를 다치기 때문에? 먹어도 취하지 않아요.
칼로리 문제가 아니구요? 아뇨, 먹어도 취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술 마시면 기분 좋아요.
하나님은 먹을 걸 많이 주셨는데 술은 제일 잘 주셨어요. 물론 그건 있어요. 어느 순간부터 먹는 것에 굉장히 신경을 쓰다 보니까, 지금은 술 마실 땐 와인을 마시거든요. 와인은 보통 한 병 마시면 취하잖아요. 근데 한 병 다 마셔도 안 취하니까.
그럼 두 병 마시면 되잖아요. 근데, 계속 먹어봐야 나중에, 그 다음날 속이 불편할 뿐이지, 정신이 놓아지거나 풀어지는 걸 못 느껴봤어요.
술 취한 당신, 뻔한 고해성사를 하는 당신을 볼 순 없군요. 근데 눈물은 술 안 먹고도 나요.
배우의 감수성인가요? 그냥, 힘들고 그럼 눈물이 날 수 있는 거잖아요. 특별히 기억나는 건, 언젠가 세수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길래 그냥 계속 세수를 했던 적이 있어요.
당신 거죽이 부처처럼 고요해도 지푸라기 같은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매순간 존중 받는다고 해도. 얼마 전에 한 번 치료를 받았어요, 불면증 때문에. 정말 피곤해서 잤는데 한 시간, 두 시간 만에 깨는 거 있죠. 딱 깼을 때, 아, 지금 한 새벽 6시 됐겠지, 눈 못 뜨고 계속 불안한 거예요. 딱 떴는데 시계 보면 한 시 두 시, 깜깜해요. 정말 막막하죠.
그럴 때 인생은 너무 길고 괴로워요. 너무 괴로워서 병원 갔어요. 내 몸에 이상이 있나부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검사했어요. 근데 전혀 이상이 없는 거예요. 맨 마지막에 머리도 하얀 선생님이 들어 오시더라구요. 정신과 박사 누굽니다, 이러시는 거예요. 신경 자체가 늘어나 있대요. 계속 긴장하다 보니까 그 자체가 수축이 안 되고 늘어나 있는 거예요. 정신학적으론 그렇대요. 약을 몇 알 주셨는데, 열흘 만에 극복됐어요.
나도 먹어본 적 있어요. 그런데 한 번만 먹고 안 먹었어요. 입은 웃는데 눈은 안 웃는 정신과 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싫었어요. 세상에 아무리 싫은 게 많아도 싫은 사람만큼 싫은 건 없거든요. 음, 어떤 사람들은 배용준 신드롬은 타이밍의 경과라고 생각하죠. <겨울연가>엔 시대가 요구하는 필연적인 부분이 있었어요. 배우로선 운명 같은 부분도 있었고, 행운 같기도 하고. 열심히 했다는 게 전제겠지만요. 어느날 일본에 갔는데, 갑자기 주목받고, 저도 너무나 당황스러운 부분들이잖아요. 되게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넌 참 많은 걸 잘 하는 것 같애, 뭔가 있어. 근데 전 그런 게 없거든요. 그런 불안함, 두려움, 우리나라를 일해야 되는 일꾼 같은 이미지로 각인되는 것. 일본 가면 난 정치인도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대변해 한일관계에 대한 얘기도 해야 해요.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게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제스처가 영향력을 갖는다면, 그건 그 이름을 나누어가지려는 세상의 법칙 때문인 거죠. 어떨 때는 짓궂은 질문도 받아요. 우리 일본 사람들은 당신들을 좋아하는데 왜 당신들은 일본에 적대감을 갖느냐, 그게 제 생각만 맞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한국을 위해 말해야 하는 부분이고. 그런 무게가 크죠.
그런데요, 당신이 지금 결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제 주가가 떨어질까요? 농담이구요. 굉장히 좋아해주는 사람들 있을 것 같구요, 그리고 서운해하시는 분들은 바로 좋아하시는 맘으로 바뀔 것 같은데요?
일본 사람들이요? 네. 빨리 결혼했음 좋겠다고 다들.
친척 같군요. 제가 가족이라고 얘기 하잖아요. 빨리 결혼해서 애 낳으라고, 보고 싶다고.
보통 배우들은 섹슈얼의 대상이지 가족은 아니죠. 게다가 여잔 관 속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여자죠. 아줌마라고, 일흔이라고 성적 판타지가 없다고 생각하진 마세요. 아뇨 한번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일본에서 소문들이 많잖아요. 근데, 지방에 사는 어떤 여자가 임신했다고 소문이 난 거예요. 근데 일본 사무실 앞에 많은 일본 가족들이 오신 거예요. 절 붙들고 이거 어떻게 하냐고, 임신했는데 빨리 어떻게 해야 되지 않냐고.
지우라고요? 아뇨, 결혼하든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일본 사람들도 아이를 가지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군요. 어쨌든 모든 건 기한이 있으니까요. 옷을 꿰맬 때가 있고 찢을 때가 있듯이. 사람들은 포스트 배용준이 없으면 한류는 끝이라고 말합니다. 언젠가 한류도 끝나겠죠. 그러고 나면 당신에겐 무엇이 남을까요? 그건, 처음부터 생각했던 부분이거든요. 홍콩이나 일본 문화가 들어왔다가 흐름으로 그쳐버렸잖아요. 한류 자체를 사업적으로만 거두어 들이려고 하면, 그럼 끝나요. 그럴 게 아니라 아시아류를 만들어가면 어떨까, 아시아 문화 공동체를 하나의 영역으로 만들면 어떨까, <태왕사신기>에도 해외자본과, 피터 잭슨이나 히사이시 조 같은 해외스태프들이 들어와요. 근데 답답했어요. 이런 말 해서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 속담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잖아요. 근데 왜 그 팔이 안으로 안 굽는지. 언젠가 친한 기자한테 제발 한류란 말 쓰지 마, 그리고 한류로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그런 게 왜 중요해? 이걸 더 크게 만들 생각을 해야지, 좀 도와줘, 그런 얘기 했거든요.
그랬더니 도와주던가요? 알았다 그러는데, 안 도와줘요.
미디어의 속성이 그렇게 거룩하고 숭고한 줄 아세요? 미디어의 중요한 존재 이유는 가십이에요. 그러나 당신이 명분을 갖고 주장하는 건 중요하죠. 시시한, 꿈만 많은 일개 속물이 아니란 얘기니까. 당신은 쉽게 살 수 있죠. 이 시대의 응석받이 권력자가 된 요즘 엔터테이너들처럼. 명성은 임대업이나 같아요. 어딜 가나 대접 받고, 내 돈 안 들이고 밥 먹을 수 있죠. 전에 나는 그들이 착각하는 지위를 우리 중의 누구도 준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그들에게 바치더라구요. 정말 말도 안돼. 그러나 내가 당신이라면 오래 살고 싶을 거예요. 이름, 당신을 존중해주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 대륙적 영향력, 돈, 모든 걸 다 가졌으니. 근데 가끔 마더 테레사가 했던 말이 생각나요. 인생은 이류 호텔에서 보낸 하룻밤만 못하다. 일찍 죽을까봐 걱정 같은 건 안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러니까 일찍 죽으면 안되겠죠.
스타로서의 커리어가 회고담이 되는 게 두려워 매니지먼트의 경력 관리 전략만 따랐는데도 전성기가 지나버린 사람들의 영락한 순간을 많이 목격합니다. 당신에게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으리란 두려움이 있나요? 언젠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촬영중에 나는 대본 읽고 있는데, 애들이 막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 소릴 듣고 나는 내 자신을 감추려고 하는 거예요. 방해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랬는데, 나한테 안 오고 김혜수 씨에게 갔어요. 그 선배가 먼저 보여서 그랬을 수 있지만, 그 순간 너무나 창피했어요. 아, 이건 아니구나… 이젠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것 같아요.
두려움 없는 배용준의 하루는 어떻게 짜여져 있나요? 똑같애요. 재미없게.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운동하고. 요즘엔 헬스는 기본적으로 한 시간 하는 거구요. <태왕사신기> 때문에 승무나 무술도 해야 하고. 그리고 회사 가서 잠깐 미팅하고 작품 얘기하고, 그리고 아시다시피 비즈니스로 해야 되는 부분들만 잠깐 보죠.
8년 전 당신은 내 앞에서 거울을 보면서 혼자 말했지요. 아, 왜 이렇게 주름이 많아? 잘 웃으니까 그렇죠.
우리는 모두 노화의 단계를 축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배우는 다르죠. 모든 배우들이 제임스 딘처럼 방부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젊어 죽지 않는 한 말론 브란도처럼 늙어가리란 두려움이 있겠죠. 예전엔 거울 그렇게 많이 안 봤어요. 지금은 자주 봐요. 옛날에 저는 피부과란 델 가볼 생각을 못했어요. 요즘은 트러블 생기면 가끔 가요. 정말 새로 발견한 건, 내가 항상 즐겁게 웃을 때의 얼굴과, 스트레스 받고 안에서 차오르는 걸 겪었을 때의 얼굴은 천지 차이인 거예요. 트러블도 그렇고 안색이며 얼굴의 셰이프까지 달라져요. 그래서 생각 자체를 긍정적으로 하려고 해요. 주름은 더 많이 생기겠지만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내가 몰랐던 나에 대해 더 알아간다는 것 자체가 즐거워요. 또 예전엔 성격이 급했는데 조금 느슨해졌어요. 재밌는 건요, 제가 원래 바지를 치켜올려 입었어요. 내려 입으면 왜 그렇게 허전한 것 같은지요. 또 뭐가 이렇게 많이 남으니까.
엉덩이에 꼭 껴요. 2001년까진 그랬어요. 골반바지는 상상도 못했고, 딱 붙은 옷도 상상 못했어요. 머리를 묶는다는 거? 말도 안돼. 수염 기르는 거? 안경을 안 쓰는 거? 말도 안됐죠. 근데 어느 순간부터 변하는 거예요. 머리를 길렀을 때, 수염 길렀을 때, 색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었을 때 재밌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주책 없는 게 아닌가, 나이 먹는 게 아닌가. 근데 꼭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즐거워요. 조금 더 오픈된 모습이 생긴다는 게.
문명은 60만 년 전에 생겼는데, 고작 삼사십 년 살고 늙고 젊고를 말할 수 있나요? 난 사는 게 좋아요. 인생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릴 기쁘게 해주니까. 우리가 네 시간 전에 죽었으면 이런 얘기 못하잖아요. 그리구요, 나중엔 농사 짓고 싶어요. (남들은 밖에 나가서 얘기하지 말래요. 배우로서 사업적인 부분에 대해 얘기하면 좀 그렇지 않냐고.) 사람들이 맘놓고 먹을 수 있는 원재료를 공급하고 싶어요. 전 환경과 건강에 관심이 많아요.
같이 먹어요. 역시 아무리 훌륭한 명분도 자본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부도덕한 거군요. 근데 삽시간에 그렇게 부자가 되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아, 참 난감하다. 모르겠어요. 주식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근데 전 옛날부터 돈이 많았어요. 이 일을 10년 넘게 했으니까. 이 일을 처음 시작했던 건, 재밌게도 돈을 가장 빨리 벌 수 있는 게 뭘까, 그 생각 때문이었어요. 목표가 1억이었는데 2년쯤 됐을 때 1억을 벌었단 말예요.
많이 벌었네요. 신인일 땐 바우처도 적었을 텐데. 저는 돈 벌어 영화공부하러 뉴욕에 가고 싶었어요. 막연하지만, 거기서 샌드위치라도 팔면서 공부하겠다, 그랬는데 조금 더하면 더 벌 수 있겠다, 이런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러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데, 내가 원한다고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책임감이 들고, 그래서 계속하게 된 거예요.
나도,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돈은 안되던데요. 그러다 일본에서, 삽시간에 사람들이 사랑해주시고, 아,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생각 많이 하게 됐어요. 좀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들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
8년 전 당신은 학교를 세우는 꿈에 관해 말했었지요. 배우로서받아야 되는 교육이라는 게 있거든요. 제겐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때도 전문화된 학교를 만들어보고 싶었고,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지금도 그 꿈을 여전히 갖고 있어요. 아마 몇 년 안에는 그런 학교가 만들어질 것 같아요.
그럼 일종의 설립자가 되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죠.
언제부턴가 당신은 나이키처럼 일루전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지요.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은 오래 전에 내가 만난, 내가 익히 아는 그 배용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난 늘 똑같았던 것 같아요. 언제나. 난,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19 그리고 80>이라는 연극이 있어요. 거기서 열아홉 살 헤롤드가 여든 살 모드 집에 갔는데, 모드가 눈물을 흘려요. 방금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때와 나는 어쩜 이렇게 다를까, 그렇지만 어쩜 이렇게 똑 같을까. 나는 80이 돼도 모드처럼 그럴 거예요. 당신도 마찬가지죠. 당신도 나처럼 고아 같은 데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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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 이충걸(GQ KOREA 편집장), 스타일링 /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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