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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예감하게 되는 슬픈 섹스

2019.12.23GQ

나를 슬프게 한 섹스, 그 애잔한 기억.

너무 물컹해서
모든 게 다 완벽했다. 갑작스럽게 잡힌 무드, 키스, 그 전 단계들이 모두. 내심 황홀했다. ‘엇? 잘하네? 예상 밖으로 괜찮은데?’ 둘 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에 다다른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외관상으로는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는데 막상 들어갈 때는 입구에서 기역자로 꺾이는 것이 아닌가. 물컹하고 흐물거리는 자태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진 못했다. 두 번째였으면 더 단단했으려나 싶기도 한데 차라리 놀이공원 귀신의 집을 혼자 들어가면 들어갔지, 두 번은 못하겠다.
김예은, 35세, 여성

너무 촐랑대서
밝고 귀여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밝음이 낮밤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분위기를 잡아야 할 땐 입을 좀 다물었으면 좋겠는데, 그놈의 입이 쉬지를 않는 거다. 더 큰 문제는 이 친구가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는 데에 있었다. “와우, 쓋! 뎀 잇, 베이비” 등등을 무슨 방언처럼 터뜨리니까 처음엔 웃겼다. “그만해, 집중하자”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계속 영어로 나불대니까 너무 짜증이 나서 “퍽-큐”를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면 더 흥분해서 덤빌까봐 꾹 참고 굳은 얼굴로 옷을 챙겨 입었다.
최하나, 29세, 여성

너무 냄새나서
엘리베이터에서부터 격정적이었다. 키스를 퍼부으면서 이미 뒤엉킨 상태라, 호텔 방문까지 확실히 맨정신으로 걸어가진 못했다. 비밀번호 눌러야 하는 우리 집이었다면 이 흥분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아찔하다. 카드 키로 문까지 열고 두꺼운 외투부터 하나 하나씩 벗는데, 잠깐, 이게 무슨 냄새지? 코 끝을 훅 찌르고 들어오는 냄새의 발원지는 그의 몸이었다. 뭐 밤 늦게 샤워를 안 한 상태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한번 돌아온 정신은 다시 나갈 줄을 몰랐다. 강력한 냄새에 각성 상태가 된 나는 이후의 기억을 깨끗이 지울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전화번호와 함께.
정은정, 32세, 여성

너무 조용해서
아, 이게 그 사전에서만 보던 ‘목석’이라는 거구나. 보통 쾌락의 밤에는 돌비 서라운드까진 아니어도 사운드 효과가 따라오지 않나. 일본인들의 코맹맹이 소리나, 양인들의 로큰롤 괴성이나,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 아닌가. 늘 단정하고 차분했던 그 사람은 쾌락의 밤에도 마찬가지로 단정했다. 마치 무슨 소리를 내면 벌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수능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처럼 경건하게 누워만 있었다. 이리저리 회유를 해보아도 좀처럼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목석’의 정의를 확실히 깨달은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었다.
김재진, 29세, 남성

너무 미안해서
호리호리한 체형의 그 사람은 눈빛이 참 씩씩했다. 오지랖 넓고 예의 없는 사람들이 종종 그 사람에게 “보약 좀 지어먹어라”라면서 마른 몸을 지적할 때 나는 그 사람 대신 분노를 했다. 왜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까? 사귀고 나서 어른들의 연애가 그러하듯 첫 섹스를 하게 됐는데, 뭐 이렇다할 특징 없이 무사히 마쳤다. 문제는 그후 이 남자가 앓아 누웠다는 것. 기운을 너무 많이 써서일까? 면역력이 떨어지는지 컨디션이 안 좋다면서 며칠이나 만남을 미루는 거다. 이쯤 되니까 나도 “보약 좀 지어먹어라”라는 말이 나왔다.
장혜수, 34세, 여성

너무 시켜서
간섭 받는 걸 정말 싫어하는 편인데, 이 친구는 소위 말하는 ‘훈계충’이 아니어서 좋았다. 사귀는 단계로 진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데이트 마지막 코스로 그의 집에 가게 됐다. 침대 위에서 엎치랑 뒤치락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위로 올라올래?” 라고 하는 거다. 거기서부터 기분이 상하려고 하는데 이후로도 “옆구리 쪽을 만져줄래?” “아직 거기는 건드리지 말아줄래?” 등등 엄청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청유형으로 “해줄래”라고 하지만 이건 뭐 거의 명령 아닌가? 시키는대로 하기 싫어서 다시는 안 만난다. 내가 우리 엄마 아빠 말도 잘 안 듣는데 네 말 듣게 생겼나고.
안주희, 33세, 여성

    에디터
    글 / 도날드 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