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art

EDIOTR’S LETTER – 테이블

2019.12.30GQ

책상은 창으로 들어왔다. 가로 세로, 높이를 과감하게 정할 땐 엘리베이터와 현관 사이즈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결국 사다리차를 동원해 베란다의 창을 모두 열어제끼고야 거실에 들일 수 있었다. 옛날부터 크고 넓은 책상을 하나 갖고 싶었다. 어두운 색 나무로 투박하게 만든 대범한 디자인의 남성적인 테이블. 그 위에 투명한 유리 컵과 화분 몇 개, 읽다 만 책들을 ‘인텔리겐차’ 풍으로 올려두고 싶었다. 연어색 스웨이드 커튼, 호화로운 실크 벽지, 천장까지 화이트 셔츠를 쌓을 수 있는 수납장(바퀴가 달린 나무 사다리는 옵션), 납과 크리스탈로 만든 진열장과 샴페인 스무 병, 혹독하게 비싸지만 지독하게 멋진 보테가 베네타 코트 다섯 벌… 사고 싶은 걸 다 사는 용기야말로 명랑한 삶의 지름길일 테지만, 그걸 다 포기하고 자신을 위한 연말 선물로 고작 테이블 하나를 샀는데, 이럴 수가. 테이블이 집안의 어떤 가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온갖 동선을 막아선 채 때마침 떨어진 고무나무 잎을 지그시 밟고 있는 걸 봤을 땐, 스스로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일단 침실로 피신했지만 그사이 테이블이 알아서 적당한 자리를 찾을 리는 없고. 잠에서 깨어 다시 본 테이블은 캄캄한 거실에서 여전히 고독하고 난처하며 저 혼자 몹시 쓸쓸해 보였다. 처음 며칠간 책상에 어울릴 것들을 시험 삼아 올려봤다. 그처럼 커다란 테이블엔 어떤 것도 맞지 않았다. 작은 물건은 너무 작아서, 큰 물건은 너무 커서. 이유를 들자면 별 거지 같은 것도 다 이유가 된다. 심드렁해져서 한동안 테이블을 모른 척했다. 약속이 없던 어느 휴일, 옛날 잡지를 정리하다 여기저기서 오려 낸 미키 루크 사진을 책상 위에 주르륵 펴 보았다. 회색 스웨트 티셔츠와 쥐색 바지, 폭이 넓은 남색 울 블레이저를 입은, 부드럽게 빛 바랜 사진. 필터까지 탄 짤막한 담배를 짓이기듯 물고 있는 특유의 비틀어진 미소, 매듭을 예쁘게 맨 타이에 우아한 목걸이까지 하고 머리는 굳이 헝클어뜨린 우울하고 나이브한 옆 얼굴. 젊고 아름답고 거만하고, 놀랍도록 세련된 남자의 사진 여러 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때, 비로소 테이블은 제 역할을 찾은 것 같았다. 탁자 위에 나열된 미키 루크의 스타일과 태도는 낱장으로 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다른 날엔 외출을 하려다 차 키를 두고 온 게 생각나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들어왔다. 신고 있던 조금 낡은 초콜릿색 구찌 모카신과 테이블이 한 눈에 들어왔는데, 그게 꽤 괜찮게 어울렸다. 낮은 굽과 납작한 발등, 유연하게 둥글린 앞코와 홀스빗 장식이 무뚝뚝하고 교교한 탁자 다리와 제법 멋진 신을 만들었다. 과연 그렇군, 마음이 풀려서 테이블의 용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식탁으로도 쓰고 조리용 아일랜드로도 괜찮고, 여차하면 엎드려서 낮잠도 자고 울 팬츠를 다리기에도 넉넉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풀어보기도 좋겠지. 예쁘게 보기 시작하니 모든 게 다 좋아 보였다. 며칠 전 저녁엔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려고 마늘을 썰었는데 서툰 칼질 탓에 매번 사방으로 튀던 마늘이 온전히 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있었다. 튀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인 격이랄까. 하하하, 크게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발견’하는 자의 차지라더니, 그렇게 테이블은 그럴싸한 명분도 맥락도 없이, 애물단지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벗어났다.

    에디터
    강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