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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여성 아이돌로 산다는 것

2019.12.23GQ

2019년 한 해 한국 여성 아이돌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새해에는 부디 모든 여성 아이돌이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부침이 많았던 한 해를 정리해봤다.

2019년쯤 됐으면, 그러니까 ‘82년생 김지영’이 전 세계로 수출되고 영화화된 해, 노년의 삶을 유튜버로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박막례 크리에이터가 구글 CEO의 초청을 받은 해라면 아이돌 산업에 속한 여성들의 삶도 좀 달라질 법도 하다. 그런데 2020년을 목전에 둔 12월에도 한국 여성 아이돌의 인권이 침해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또다시 분노한 여성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대체 지난 2019년에 한국의 여성 아이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2019년을 세 등분해 돌아봤다.

<내일은 미스트롯>이 알려준 아이돌 되는 법

2월 28일부터 5월 2일까지 방송된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을 통해 장년층과 노년층에게도 여성 아이돌을 골라 좋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탄생한 우승자 송가인은 올해 가장 TV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 나온 출연자 중 한 명으로 남았고, 높은 공연 수익을 기록한 소위 ‘어르신들의 아이돌’로 거듭났다. 그러나 <내일은 미스트롯>은 한국 대중음악 산업, 특히 젊은 여성들이 어떤 이미지로 대중의 시선을 끌어야 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프로듀스> 시리즈의 교복과 ‘PICK ME’라는 구호는 붉은 옷을 입은 여성들을 일렬로 줄 세워 인사시키는 성인용 버전으로 바뀌었고, 여성 출연자들은 애교와 함께 효도, 어른 공경이라는 키워드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미디어 시장에서 한동안 소외돼있던 장년층과 노년층 시청자들이 흥밋거리를 찾은 순간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흥밋거리가 한국 대중문화 시장에서 연령대에 따라 조금씩 키워드만 달리한 여성 아이돌의 역할을 부각시켰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퀸덤>으로 얻은 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Mnet <퀸덤>은 앞으로 한국 여성 아이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으로 남을 것이다. 마마무, 오마이걸, AOA, (여자)아이들, 러블리즈, 박봄은 팬덤이 큰 남성 아이돌들에게만 음악방송이나 콘서트에서 허락됐던 화려한 무대를 보여주며 처음으로 TV 프로그램에서 개개인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넉넉한 퍼포먼스 시간을 보장받았다. 오로지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고 말하는 출연자들은 예민하고 감정적으로 날이 선 싸움을 유도했던 기획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며 어느새 “순위는 크게 상관이 없다”, “하고 싶은 걸 해 봐서 정말 좋다”고 속 시원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던 도중에 맞이한 설리의 부고는 변화의 기쁨과 좌절의 슬픔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2019년의 K팝 산업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준다. 설리가 떠난 후에도 <퀸덤>은 그대로였지만, 어떤 누구도 마음 편히 걸그룹들이 보여준 반전을 통쾌해하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스스로의 뜻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듯이 보였던 설리의 나날이 여성 아이돌, 나아가 한국 여성들에게 씌워진 굴레가 쉽사리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하라, 그리고 또 ‘아육대’

그 굴레 안에서 또 한 명의 여성 아이돌, 구하라가 고인이 되었다. 전 애인의 불법 촬영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그러게 왜 그런 남자를 만났냐”, “그 동영상 갖고 계신 분 있냐”는 말을 들으며 버텼고, 법정 싸움을 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설리와 구하라의 사례를 통해 여성 아이돌이 버티고 견뎌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수많은 말이 오가는 도중에도 일은 생겼다. SBS의 새 예능 프로그램 <핸섬 타이거즈> 측은 남성 아이돌, 방송인들이 농구를 하는 도중에 레드벨벳 멤버 조이에게 수건을 나눠주도록 지시했다. 여성 아이돌들을 대상으로 농구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남성들이 경기를 뛰고 와서 회의를 하고 쉬는 동안 그들을 챙기고 응원하는 매니저 역할을 여성 아이돌에게 맡긴 것이다. 또한 MBC <아이돌 육상 선수권대회>에서 한 스태프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는 이유로 다른 여성 아이돌의 머리카락을 잡아끌기까지 했다. 지난 추석에는 여성 아이돌에게 한정된 투구 종목을 신설해 몸에 달라붙는 유니폼을 입히고 포즈를 평가했던 바로 그 방송이다. 누군가 목숨을 잃어도, 여전히 벌어지는 성차별적 사례들. 그리고 이 모든 게 2019년 한 해 동안 한국의 여성 아이돌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에디터
    글 / 박희아(대중문화 저널리스트)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