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이제, 진짜 전인권이다

2014.03.13GQ

전인권을 처음 만난 건 2009년 4월이었다. 말은 이어지지 않았고, 그는 자주 눈을 감았다. 하지만 “5년 안에 진짜 괜찮은 앨범을 만들겠다”는 말, 갑자기 내지르는 노래만은 형형했다. 2014년 2월, 전인권은 정교함과 엄격함에 대해 말했다.

삼청동은 이르게 봄이었다. 사람들은 바빠 보였다. 5년 전, 전인권이 휘청거렸던 길이었다. 그때의 인터뷰는 조각조각이었다. 어딘가에 취해 있는 것 같았으니,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첫날은 가까스로 만나 사진만 찍고 헤어졌다. 이튿날 다시 만나 같이 물냉면을 먹었다. 냉면집 정원, 파라솔 아래서 그는 갑자기 노래 불렀다. “우리는 맘 한켠에/왠지 모를 설레임을/두두담담다다 사람답게/살고 싶은 힘이겠지 힘이겠지….” 그러곤 좀 쑥스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노래 어때? 신곡이야….” 오른손에 담배를 들고,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한국에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2009년 5월호에 실린 기사에는 이렇게 썼다. 이 노래가 요즘 회자될 줄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3월 7일 합정동에선 전인권과 친구들의 콘서트가 열린다. 거기서 라틴 록 스타일의 곡 ‘사람답게’가 곧 공개된다는 기사가 이제 눈에 띄었다. 자신의 5년 전 인터뷰 기사에서 지금 공개하는 곡의 가사를 발견한 전인권은 다시 쑥스러워했다. 하지만 또렷한 눈, 모험하는 소년같이 웃을 땐 고른 치아가 다 보였다. 5년 전에는 물냉면도 씹기 어려운 치아였다.

안경은 안 벗으시죠? 요즘은 안 벗어요. 그때하고 지금은 또 달라져서. 음악이 정말 재밌어졌고, 아주 열심히 하고 있어요. 생활도, 아홉 시에 딱 자면 새벽 세 시에 일어나고. 대여섯 시간 자요. 대개는 네 시간만 자면 그냥 일어나요.

요즘은 언제가 제일 좋으세요? 연습하고, 집에 딸하고 손녀가 일주일에 두 번 와요. 그때 참 좋고, 아들 볼 때도 좋고. 요즘은 모든 게 희망적이니까. 술도 안 먹어요. 모두 다 끊었어요. 담배 빼고 다 끊었어요.

5년 전에 동행했던 매니저는 연락이 끊긴 전인권을 찾아 온 삼청동을 헤맸었다. “집에 들어가 보면 기타를 치고 있어요. 네다섯 시간 후에 가보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타를 치고 있어요. 그렇게 멋있었던 남자가….” 매니저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었다. 전인권에겐 기억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날 중의 하루였다. 누구나 아는 그런 시기 중 하루. 하지만 드문드문, 전인권은 세 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때 당신은 웃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노래할 때만은 달랐죠. 그때는 ‘뻥’ 갔으니까, 간 맛에 노래를 한 거지 뭐. 이가 안 좋았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부른 가사가 뭐예요?

“내 머릿 속에 꽉 찬 이 멜로디들이 모두 거짓이겠어 아니면 모두 죄이겠어.” “우리는 마음 한켠에, 왠지 모를 설레임을 사람답게 살고 싶은 힘이겠지.” 이런 가사였어요. 여기 다 쓰여 있어요. 어, 나 이거 적어가야 되겠다. 내가 그때 많은 얘기를 했네. 나 가사를 잊어버려가지고. 그때 내가 몇 곡을 했어요? 내가 기억 못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 내가. 그땐 영화도 막 해보고 싶고 그랬어요. 답답하니까. …그래, 이런 노래가 있었어.

녹음 파일도 있어요. 어우, 그럼 줘봐요. 허허. 멜로디는 조금 기억나는 것 같고, 내가 팻말을 만들어서 그런 노래도 여기 있네요? 진짜 많았죠, 노래. 지금은 그때 만든 것들을 하나씩 꺼내고 있어요. 내가 그때도 나름대로 진지하고 제대로 만들었어요. ‘저 바다로 가는 길’도 그랬고. 목소리가 놀랍게 돌아왔어요. 그땐 굉장히 쉬고 답답한 소리가 있었는데, 그게 다 없어지고. 참 신기한 거예요.

‘어떻게 사람이 저럴까?’ 그땐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좋아졌을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해요. 그 과정이 궁금했어요. 다 걷어냈더니 음악만 남더라고 말한 적 있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그건 간단한데, 내가 지금까지 음악밖에 한게 없어요. 음악하고 미술. 미술을 열아홉까지 했죠. 어릴 때는 그림만 그린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음악. 그러니까 나한테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좋아서 택한 거고, 천천히 깨 나가는 거죠. 내가 나를 깨내니까 신기하더라고요. 음악 자체가 너무 좋고.

예전엔 음악이 이 정도로 좋지는 않았어요? 내가 그 옛날을 거의 기억 못할 정도로 가 있었던 거예요. 어떤게 올바른 세상인지를 모르고 살다가 요즘 아는 거죠.

그냥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기억만 남은 거예요? 사이사이에 약간의 제정신들이 포함되죠.

그때 ‘젊은 남자들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냐’고 물었어요. 당신은 이렇게 답했어요. “씩씩하게! 일자리 잡고 영혼! 영혼을 깨우쳐서. 그러니까 가난해도 재미있게 사는 방법이 있잖아?” 지금은 어때요? 내가 그래도 맞는 얘기를 했네. 그런데 재미는 없네요. 아유, 요즘은 얘기 별로 안 하고 싶고. 뭘 굳이 얘기해? 애들이랑 집에서 노는 게 제일 좋아요. 그리고 난 진원이, 우리 아들한테는 “너, 열심히 리듬을 파악해라” 그런 얘기를 하고. 걔도 음악 하거든요? 그럼 아들이 알아듣고. 박자의 정교함을 말하는 거예요. 정교함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모든 건 자유에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박자의 정교함요? 박자의 정교함은 그 차원이 엄청나요. 말로 하기는 어려워요. 일반적으로 ‘다- 다- 다-’ 이런 박자가 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짧게, 강하게 ‘따! 따! 따!’ 이런 식도 있다는 거죠. 이렇게 비트가 형성되는 거예요. 그걸 이제 인생론으로 보면 아, 이거 뭐 거창한데 나는 거창한 사람이 못되고…. 내가 그냥 느끼는 거, 그것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유를 막 구구절절하게 혹은 괴롭게…. 그런 걸 다 버리고 정교함 속에 다른 차원, 또 다른 세계가 있더라는 이야기죠. 그건 어떻게 설명하기가….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될 것 같아요. 내가 나에 대해서 까다롭다 뭐 그런 거죠. 꼼꼼하고.

정교함과 엄격함, 박자. 그 셋이 요즘 당신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인가요? 구성하고 있다?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죠. 내 색깔을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그거는 내가 그렇게 했을 때 딴 사람들이 보고 ‘어, 전인권은 저런 색깔이구나’ 얘기하는 거지 나는 모르죠. 보통 사람들이 나한테 노래를 지른다고 하잖아요? 근데 나는 그걸 몰라요.

젊은 사람들 이렇게 보면 쟤가 지금 저러면 안 될 텐데, 혹은 쟤 참 잘하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드세요? 그런건 굉장히 단편적인 생각이에요. 인생은 절대 단편이 아니에요. 장, 장, 장, 장, 장편이지. 단편적으로 뭐 ‘우리 아들이 저러다간 어떻게 된다’ 이건 그 사람 망치는 거예요. 자유를 줘야지. 록의 정신은 사랑과 평화와 자유예요. 동서고금, 다 통해서 아마 우주에서도 그럴 수 있을 거예요. 간혹 뭐 악마를 무슨 숭배하고 이런 사람들은 안 그러죠. 하하. 그 사람들은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록은 기본적으로 사랑과 평화와 자유를 동경하죠.

요즘 생각하는 올바른 세상은 뭐예요? 나한테 올바른 세상? 그건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나한테 엄격한 거예요. 음악을 하다 보면, 그리고 무슨 일을 하다 보면 오만해질 때가 있어요. 그럴 수 있는데, 그건 다 필요 없어요. 그걸 내가 이기니까 그렇게 재미나요. 내가 내 몸을 이기고 다시 태어나듯이, 다른 것들도 다 이기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거예요. 이랬던 적이 없었죠? 나는 굉장히, 탐욕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했던 거예요. ‘내 머릿 속에 그게 죄이겠어, 그 무수한 멜로디들이 거짓이겠어.’ 이건 굉장히 합리성이 있는 얘기죠. 거짓도 죄도 아니죠. 거기에 가치를 둘 순 있어요. 인권적으로도 굉장히 재미난 얘기예요. 이 좋은 가사를 잊어버리고 있었네.

전인권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선글라스를 들추고 2009년 5월의 인터뷰를 펼쳐 그 가사들을 옮겨 적었다. “이야,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찍었네, 내가.” 자신이 했던 말도, 집으로 올라가는 길 골목 담벼락에서 찍었던 사진도 좀 낯설어하면서. 다시 물었다. 기억과 허무, 엄격함에 대해서. 그는, 다시 전인권을 건축하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부분부터 정교하게, 원래 이 세상이었던 싸움의 상대가 바뀐 것 같았다. 지금은 전인권 자신과 상대하고 있었다.

기억이 안 나는 순간들을 후회하세요? 후회했다고 가끔 누가 기사에 쓰는데, 난 그런 말한 적 없어요. 소용도, 필요도 없고 지금 그대로 사는 거예요.

나중 생각도 하세요? 그런 생각은 항상 하죠. 하지만 나는 어차피 사회적이다, 이럴 순 없는 스타일이었잖아요.

한국이 그런 나라 아닌가요? 개인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취급하죠. 이제 그런거 신경 안 써요. 지금 내가 하는 계획이 맞고, 그 계획대로 음반도 내보고, 노래를 해보니까 내가 좋아졌고 사람들도 좋아하고. 그럼 나는 이제 계속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죠. 뭐 큰 문제가 없어요.

흠 없이 살아야, 혹은 그렇게 보여야 존경받는 나라 아닌가요? 흠이 있었고, 그걸 극복한 사람한테는 별 관심이 없죠. 방황은 마땅히 하는 건데도. 그렇죠. 여기 만나는 사람마다 다 고생하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무대에서 한번 이런 얘기를 했어요. 어떤 여학생이 묻더라고요. 지금 난 너무 고생스러운데, 어떻게 하면 이걸 좀 덜 수 있냐고. 그래서 여기 다 고생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죠. 그런 말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어요. 그건 세계적으로 다 그런 거니까. 자기만족을 해도, 돈이 많아도.

그래서 뭐 어떻게 살아도 괴로운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죠. 사람이 조그만 것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고, 고생하다 보면 또 작은 걸로 즐거워할 수 있고 그렇죠. ‘더스트 인 더 윈드dust in the wind’ 알죠? 그 노래 마지막 가사가 참 좋아요.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으로 1분을 살 수 없다고. 그러면서 또 그 세계가 보이잖아요. 허무하면서도

당신이 지금 엄격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내가 어떤 곡을 연습할 때 진짜 그 곡이 내 안에 확실하게 자리 잡았느냐, 그건 내가 판단할 수 있어요.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면 또 해보는 거죠. 또 해보고, 또 해보고. 김연아 선수는 그 한 무대를 위해서 같은 동작을 수년 연마하는 거예요, 그 생각을 하는데 소름이 끼치고 전율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왕이면 나도 똑같은 사람인데, 내가 무용만 안 한다 뿐이지, 내 자신과 한번 싸워보자’ 생각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그 음악 에너지를…. ‘여기서 내가 기타가 좀 모자란다’ 그럼 다시 기타도 배워보고, 쳐보고 그랬더니 다 되더라고요. 그런 신기함, 재미도 있었어요.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면 좋은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이겨보자는 마음보다는, 나 자신을 만들어가보자는. 이젠 어떤 것들이 나를 만들어가는지 아니까.

뭐가 전인권을 만드나요? 좋은 것. 어떤 좋은 노래가 있으면, 그 노래를 내가 가져오는 게 나를 만드는 길이에요. 다른 게 아니고. 그런데 그걸 구구절절 설명할 순 없고. 음악 하다 보면 자기 자신과 싸워야 된다는, 그런 거예요. 시간은 나나 다른 사람이나 똑같이 지나가죠. 그 시간의 만족도가 굉장한 거예요.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그 자체에 목표가 있는 거예요. 목표는 바로 공연이에요. 나는 공연을 통해서 나를 보여줄 거고, 그러려면 좀 더 철저한 나를 가져가자는 거죠. 내가 쓸데없이 바쁠 필요 없다. 나이도 있고 현실도 있지만, 어딘가에 얽매여서 마음 바쁘게 지내지 말자. 쓸데없이 히트 같은 그런 거 할 필요 없고…. 즐거움은 마찬가지니까, 모두 순간을 살아가니까. 이제는 거기에 내가 몰입이 된 거야.

2012년 7월 27일, 지산 밸리 록 패스티벌에 모인 사람들은 무대 위에 앉아서 노래하는 전인권을 갑자기 맞닥뜨렸다. 당시 헤드라이너는 라디오 헤드였다. 그들의 공연을 보고 감동했던 사람도 들국화의 공연을 놓치고 후회했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유튜브에는 그날의 습기를 가르고 솟아오르는 전인권의 목소리, 온화한 맹수처럼 의자에 앉아서 음절마다 정성껏 노래하는 전인권이 녹화된 영상이 여럿 있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누군가는 따라 불렀고, 몇몇은 울었다. 그날, 전인권은 무대에서 말했다. “정말 고맙다….”

지산에서 공연하셨을 때 다들 좋아했죠. “들국화가 죽여줬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엄청났죠, 그때. 나는 그렇게 연습하고 공부하고 했던 것을 보인 거고, 사람들은 막 난리가 났었어요. 우리 아들도 거기 있었고. ‘아, 내가 무대에 올라가서 또 한 번 했네’ 그런 만족감, 재미가 있었어요.

그냥 그 정도? 엄청난 희열이 아니라? 그게 희열이죠. 지금 나이가 되면 뭐 막 희열이라고 이렇게 좋아하는 거보다, 넌지시 즐기는 거 있잖아요. 그게 좋더라고요.

관조하는 건가요? 관조, 그건 어려운 건데. 좌우간 이젠 너무 기쁜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나를 이렇게 터득해나가고, 내 맘에 이렇게 들어오고, 그걸 표현할 수 있고 그러면 그게 좋은 거지. 그저 좋다고 막 ‘너무 좋다’ 그런 게 아닌 거죠. 그건 나이일 거예요. 애들은 안 그러지. 애들은 좋으면 ‘까르르’ 막 뒤로 자빠지는데.

노래 안 하실 때는 뭐 하세요? TV도 보고 검색도 하고. 그러다가 바로 또 음악 해요. 더 좋아지고 있어요. 이건 주변에서 하는 얘긴데, 내가 그렇대요. 나이라는 건 전혀 문제가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좀 짧아진다는 것뿐이지. 나이 먹어서 힘들다가나 불편하다거나 뭐 그런 건 없어요. 지금, 나로서는 아주 좋은 거죠. 굉장히 쾌감이 있고 매력이 있고 지금 세상이. 지금 내가, 이 세상에 대처하는 자세를 나는 좋아해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보면 물에 내놓은 애들같이 살았고, 어떻게 보면 진짜 반항으로 살아왔죠. 아예 사회하고 담 쌓고, 부랑하기도 했지만 할 일들은 또 했어요. 그게 희한한 거예요. 내가 열여덟 겨울부터 음악을 알아가지고 이후에 계속 이렇게 살아왔죠. 우리 마누라도 몇 년 전부터 맨정신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으니까.

좋으세요? 사랑스럽고. 정말 좋죠.

2011년 8월, 요양원에서 나와 갈 곳이 없었던 전인권을 받아준 건 당시 이혼 상태였던 아내였다. “내가 전인권 좋아하잖아.” 이 한 마디가 그를 살렸다. 2012년 5월 21일 들국화가 재결성됐다. 기자회견 약 1년 후, 27년 만의 새 앨범이 발매됐다. 들국화 재결성 이후에는 약 서른 번의 공연을 했다. 앨범 <들국화>에는 찬사가 쏟아졌다. “이번 앨범은 나도 좀 들어요.” 전인권이 말했다. 작년 10월 20일, 멤버 주찬권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는 들국화로서의 모든 활동을 접었다.

이번 앨범은 왜 자주 들으세요? 열심히 해보니까 좋더라고요. 참 좋게 나왔고. 아까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했잖아요? 나도 그래요. ‘걷고, 걷고’ 들으면 마음 편해지고. ‘노래여 잠에서 깨라’를 들으면 설레고 그런 게 있어요.

하지만 친구를 먼저 보낸 마음도 있겠죠, 한 구석에. 아, 주찬권…. 그건 그 당시에 너무 힘이 들어서, 너무 힘드니까 이제는 점점 나아지는 길밖에 없더라고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죠. 찬권이 일 이후로 내가 우울증, 허무주의 이런 쪽에 좀 빠졌어요. 옛날에 엄마 돌아가시고 이런 적 있거든요?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내가 기타 치면서 ‘더스트 인 더 윈드dust in the wind’를 다시 불러봤어요. 그러면서 좀 많이 잊고. 지금은 옛날 기억들이 참 좋아요. 이 세상에 없지만, 찬권이랑 옛날에 만났던 그런 기억들이 참 좋아요. 그게 힘이겠죠.

3월에 공연 준비하시죠? 그럼, 2월 14일부터 정원영이가 가세해서. 정원영 그 친구와는 음악적인 얘기가 재밌어서 벌써부터 연습이 기대가 돼요. 물론 함춘호는 이미 가입을 했고.

‘전인권 밴드’가 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전인권과 프렌즈’라고, 요즘 프렌즈라는 말을 많이 써요. 그런 식으로 가는 거죠. 음악적 동지죠. 함춘호, 정원영은 대단해요. 이번 앨범에서 전체적인 리듬은 정원영이 한 거예요. 그 친구가 피아노로 리듬을 살려냈어요, 안 칠 땐 안 치고 칠 땐 쳐서. 그거 보고 참 이 친구 피아노가 이렇게 도저할 수가 있나 생각했죠. 함춘호는 거기다가 아주 빛나는 기타 소리를 넣어줬죠. 정말 기타 소리가, 기타 하나로 가수의 역할을 해냈어요. 이번 앨범은 제가 좀 들어요. 들국화 1집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100대 명반 1위’ 이렇게 얘기하지만 우리 셋은 다 그거 안 좋아해요. 최성원도 안 좋아하고, 나도 뭐 그렇게 안 치고, 주찬권도 그랬고. 녹음 상황이 안 좋았죠. 녹음도 빨리 끝냈고. 보통 한 백 프로 쓰면 우리는 열네 프로에 다 끝내고 그랬죠. 바빴던 것밖에 없는 거예요. 나는 바쁜 걸 싫어해요. 바쁘면 뭘 못해요. 내가 해야 할 만한 걸 못하죠. 그냥 어수선하게 이렇게 있다가 끝나는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계속 이렇게 엄격하게 사시다 보면 어떤 전인권이 될까요? 내가 그게 재밌어서 지금 살고 있어요. 미술에도 입체가 있고 낭만이 있고 그렇죠? 뭐 초현실주의도 있고. 나는 미술로 치면 추상화, 추상화일 거예요.

엄격함과 자유는 너무 다른 얘기 아니에요? 아니에요. 옛날의 자유와 지금 자유가 달라진 것뿐이에요. 자유로운 내 세계가 없으면 나는 음악이고 뭐고 할 수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옛날에는 그냥 이렇게 내 끼와 젊음으로 방황하면서 그게 자유의 길이라 믿었다면, 지금은 그 수많은 경험을 음악이나 미술로 옮기고 싶은 거예요. 내 머릿 속에 상상이 많은 거죠. 엄격함은 내가 그 길을 제대로 갈 수 있게 도와주죠. 정신이 망가져서는 내가 뭘 할 수가 없으니까.

‘걷고 걷고’에서 ‘새벽 그대 떠난 길 지나’할 때 ‘새’자가 반음 떨어지는 그 순간이 좋아요. 바로 그럴 때 내가 희열을 느끼는 거예요. 허허. 또 막 깊게 들어가네.

그 순간이 새벽 같잖아요. 새벽은 갑자기 오니까. 그렇죠. 새벽을 누가 기다리나. 난 늘 새벽이 올까 봐 기다리고 있진 않았어요. 문득 왔지.

그래도 유혹에 시달릴 때가 있어요? 마약 같은 거?

이제 마약은 세상에 없는 거라 생각하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다 있는 거지. 하지만 안 하는 거죠. 유혹은 없을 수가 없죠. 몸이 너무 아프거나 괴로울 때는. 그렇지만 이제 사람이니까, 견디는 거죠. 술은 저번에 딱 한 잔 먹어봤더니 기분이 너무 좋고 세상이 내 것 같고 그랬죠. 그런데 이렇게 해가지고 내가 작업을 못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안 마셔요. 다 사랑 안에서 이뤄지는 거지. 나는 그래요. 사랑 안에서 보살핌 안에서.

누구나 한 곡의 노래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 지난 12월, 한남대교를 건너는 택시 안에서 ‘걷고, 걷고’를 들었던 어느 날 아침은 완벽하게 평화로웠다. 플뤼겔 혼이 울리는 도입부터,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모두 어쩌면 축복일지 몰라’ 하는 후렴까지. 그러다 ‘아침은 다시 밝아오겠지’ 하는 노래는 누군가의 체념일까, 희망일까? 새벽은 매일 오는 거지만, 올 때마다 막연한 것 또한 새벽이니까…. 노래가 끝나자, <여성시대>의 두 디제이도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찰나였지만 길게 느껴졌다. 공중파 라디오의 ‘방송사고’ 판단 기준은 단 3초의 침묵이다. 강석우가 먼저 깼다. “아… 좋네요. 들국화의 새 노래예요.” 양희은이 받았다. “…전인권의 발성이 달라졌네요.” 열아홉에 음악을 알고 10년, 휘청거렸던 30년 이후 다시 찾은 목소리였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본받을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해요. 나는 절대 아니니까 절대 본받지 말고…. 하지만 노래 가사에는 내가 경험해서 좋은 것들, 그러니까 얻은 것들을 얘기할 때가 종종 있어요.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같이 ‘행진’이나 ‘사랑할 수 있다면’ 같은 록에도 그런 스타일이 있어요. ‘렛 잇 비let it be’도 그렇고 ‘헤이 주드hey jude’도 그렇고. 그 짐을 네가 다 지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노래들.

다음 앨범은 언제쯤으로 생각하세요? 들국화 냈으니까 올겨울이나 내년. 늦어도 내년 초?

친구들은 요즘 당신 보고 뭐라고 해요? 어유, 좋다 그러죠. 걔들은 일단 내가 이렇게 하는 거에 대해서 좋아해줘요. 이번 노래들을 좀 좋아하는 것 같아요. 반가워하고 안도하고 안심하고. 그게 참 고맙더라고요.

이제 당신한테 제일 중요한 건 뭐예요? 그냥 사는 거지. 뭐가 무서워서…. 나는 깡다구 좋다는 얘긴 들었어요. 어렸을 때도 그렇고 세월 많이 흘러서도. 난 내 즐거움을 위해서, 나만의 어떤 세계를 위해서 가차없이 간 거지. 그러고 이제 그 얘기가 하고 싶은 거지. 내 머릿 속에 있는 멜로디들….

외롭진 않으시겠네요? 요즘 안 외롭죠. 지미 핸드릭스는 무지 외로웠을 거예요.

5년 전엔 에릭 클랩튼 얘길 했죠. 아들을 잃고 마약에 빠졌을 때 영국 정부는…. 정부에서 구해줬죠. 섬으로 보내줬어요. 의사 하나 붙여서.

한국은 평생 그렇게 못할 거예요, 그렇죠? 여기는…. 그래도 일단 우리가 그럴 만한 인물이 돼야죠. 쉽게 말해서 세계에서 돈도 벌고, 우리나라 사람들 어깨에 힘도 주게 하면 보호해주겠죠. 보호를 먼저 해줘도 좋겠지만, 하하.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이제 집에 올라가서 연습할 게 있어요. 우리 피아노 치는 친구 하고 연습해보는 거죠. 요즘 좋아하는 노래들이 있어요. 뭐 ‘위 올 폴 인 러브 섬타임즈we all fall in love sometimes’라고 엘튼 존 노래. 뭐, ‘데스페라도desperado’도 좀 해보고.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아이고, 이제 정 기자도 안심이 좀 되죠?

팬클럽과 지금의 아내가 요양원으로 보낸 게 2010년 4월이었으니까, 2009년 4월에 삼청동에서 휘청거렸던 전인권은 어쩌면 가장 깊은 수렁 속에 있었다. 마지막 질문은 전인권이 했다.
“묘하죠? 거의 끝까지 갔던 사람이 이렇게 살아나올 수 있잖아. 살아나올 수 있는 희망이 있잖아. 사람들이 만약에 나한테 듣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그럼 뭐 고생도 이겨내보고 그런 얘기를 난 할 수 있잖아. 그걸 나에 대한 엄격함으로 이겨냈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얘기지. 옛날에 어떤 모습을 봤는지 몰라도 이빨도 부실하고, 머리는 길고, 주변에 사람은 없고, 나오는 행동은 약 받으러 가는 거, 그거밖에 없던 놈이….”

이날, 그가 집에서 부른 노래는 어디까지 퍼졌을까? 삼청공원에서 연습하던 전인권의 목소리는 그 동네의 전설이었다. 그와 친구들이 같이 오르는 무대는 3월 7일과 8일에 열린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이제 담배 한 대 피우고 연습하러 갈까?”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설 때, 전인권이 매니저에게 담배를 권했다. 오후 4시의 해가 삼청동에서 기우는 중이었다. 촬영과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한 대도 피우지 않은 담배였다.

    에디터
    정우성
    포토그래퍼
    JDZ CH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