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플랫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유튜브와 모바일 중심으로 변화하는 콘텐츠 시장에서 짧고 재미있는 판이 벌어질 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샘 레이미, 기예르모 델 토로, 리즈 위더스푼, 리암 헴스워스…. 감독과 출연진 면면만 보고 넷플릭스 라인업으로 오해할 뻔했다. 이들은 오는 4월 6일 론칭하는 모바일 스트리밍 서비스 퀴비 Quibi에 올라탄 스타들이다. 아직 출범하지도 않은 신생 업체가 할리우드 A급 인재들을 영입한 것도 놀랍지만, 더 의미심장한 건 이 서비스가 10분 내외의 짧은 영상을 제공하는 숏폼 Short-Form 플랫폼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유료다. 증명된 게 없는 실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이런 엄청난 네트워크를 꾸렸다면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최고경영자가 맥 휘트먼이고, 회장님은 제프리 카젠버그다.
맥 휘트먼은 직원이 30명에 불과했던 신생 인터넷 경매업체 이베이 eBay를 77억 달러 규모로 성장시킨 실리콘 밸리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최고 책임자였던 제프리 카젠버그는 디즈니와 결별한 후 설립한 드림웍스로 친정 디즈니를 위협한 이력의 소유자다. 2016년 드림웍스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 차기 행보를 고민하던 카젠버그는 모바일 기기를 손에 쥐고 사는 Z세대의 콘텐츠 소비 습관에 주목했다. 거대 스튜디오에 도전장을 내민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같은 스트리밍 기업 아이돌들의 심상치 않은 돌풍도 눈여겨봤다. 이 두 가지를 섞는다면? 퀴비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마침 2011년부터 휴렛팩커드 CEO를 맡고 있던 휘트먼이 자리를 내려놓는다는 소식이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왔다. 카젠버그는 휘트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남을 청했다. 휘트먼은 광범위한 인터넷 세계에서 고객을 어떻게 유치해야 하는지를 아는 업계 고수니까. 그렇게 실리콘 밸리의 거물과 할리우드 거물이 퀴비로 만났다.
존재가 곧 명함인 이들의 동맹 소식은 업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디즈니, 폭스, JP모건, 유니버설, 워너 같은 대기업들이 퀴비가 틀을 갖추기도 전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10억 달러의 투자금이 모였고 1억 달러가 넘는 선 광고 계약이 체결됐다. 카젠버그와 휘트먼이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해온 세월이 투자의 미끼이자 신뢰로 작용한 것이다. 창작자들과 콘텐츠 소유권을 나누겠다는 운영 방식 역시 업계의 마음을 움직였다. 2년 동안은 퀴비가 콘텐츠를 독점으로 사용하지만 이후엔 창작자들도 판매 권리를 갖는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다.
퀴비가 내세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우려는 존재한다. 퀴비의 이용요금은 월 5달러다. 광고 없는 상품의 경우 월 8달러다. 틱톡, 유튜브 같은 공짜 볼거리가 범람하는 시대에 유료 서비스가 과연 통할까. 카젠버그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가 스타 감독 영입에 신경 쓴 이유다. 사용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할 콘텐츠, 지불한 돈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겠다는 일종의 미끼이자 약속인 셈이다. 가로, 세로 방향 상관없는 모바일 최적의 장면을 선사하는 퀴비만의 비밀 병기 턴스타일 Turnstyle 기술도 유료 서비스를 위해 신경 쓴 부분이다. 그렇다면 제작비는? 1분당 10만 달러의 예산을 아끼지 않고 쏟아 붓는다는 계획이다. TV 콘텐츠보다 적은 비용으로 생산되는 모바일 단편들의 허술함과 선을 긋겠다는 포부다.
출시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은 퀴비는 지난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인 CES 2020에서 본격적인 프로모션에 들어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맥 휘트먼은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짧은 콘텐츠는 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혁명입니다. 모바일 기술 향상으로 수십억 명의 사용자가 연간 수십억 시간을 모바일로 소비하고 있죠.” 퀴비는 구글 클라우드를 통해 연내 총 1백75편, 35개 시리즈를 공개할 계획이다.
퀴비가 고품질 콘텐츠로 숏폼 플랫폼 시장을 공략하려 한다면, 중국발 숏폼 비디오 플랫폼 틱톡은 참여형 콘텐츠 형식으로 이 시장을 흔들고 있는 중이다. 틱톡은 15초짜리 영상을 촬영하고 공유하는 앱으로 영상 편집이 쉽고 간편한 게 장점이다. 유저들이 단순히 소비자가 아닌 참여자로 나서는 이유다. 덕분에 틱톡에는 틱토커라 불리는 인기 크리에이터가 많다. Z세대 사이에서 ‘인터넷 밈 제조 공장’으로 통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틱톡을 활용한 해시태크 챌린지가 음악 마케팅 시장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지난해 미국 팝 시장을 뜨겁게 달군 릴 나스 엑스의 올드타운 로드 Old Town Road가 대표적이다. 뮤직비디오의 카우보이 콘셉트를 활용한 ‘이햐 챌린지 Yeehawchallenge’가 틱톡을 타고 붐을 일으키며 릴 나스 엑스를 글로벌 스타덤에 올려놨다. 틱톡 챌린지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며 빌보드 역주행 신화를 일군 리조와 ‘아무노래 챌린지’의 주역 지코도 틱톡의 대표적인 수혜자들이다. 틱톡은 기세를 몰아, 동남아판 넷플릭스라 불리는 아이플릭스와 손잡고 숏폼 콘텐츠 확장에 나선 상태다.
국내에서는 숏폼 콘텐츠를 안방으로 안착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는 건 나영석 PD다. 지난해 나영석 PD는 tvN 예능 <신서유기 외전 : 삼시세끼-아이슬란드 간 세끼>(이하 <아간세>)를 5분 분량으로 편성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방송 직후엔 유튜브 <채널 십오야>를 통해 해당 내용의 풀영상을 공개했다. 결과는? “<채널 십오야> 구독자 수가 1백만 명을 돌파하면 은지원과 이수근을 달나라에 보내겠다”는 허무맹랑한 공약을 내건 나영석 PD는 구독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구독 취소’를 요구하는 전대미문의 캠페인을 펼쳐야 했다. <아간세>가 지나가자 <라면 끼리는 남자>(이하 <라끼남>)가 왔다. 강호동이 극한의 환경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이 프로그램의 정규 편성 시간은 6분.
<아간세>와 <라끼남>으로 숏폼 콘텐츠의 가능성을 확인한 나영석 PD는 최근 tvN <금요일 금요일 밤에>(이하 <금금밤>)를 선보였다. 15분짜리 6개의 숏폼 프로그램을 한 바구니에 담는 파격 구성의 예능이다. 나영석 PD는 “시청자가 10분 정도 시청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10분을 시청하는 패턴이라면 제작자가 거기에 맞춰야 하지 않겠나”라는 말로 유튜브와 모바일 중심으로 변화하는 시장에서 기존의 방식에 머물러 있으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예상보다 반응은 아직 저조하다. 시청률은 2퍼센트대에 머물고 있다. 유튜브 조회수도 <아간세>와 <라끼남>에 훨씬 못 미친다. ‘형식은 새롭지만, 내용이 나영석 PD가 기존에 선보인 TV 예능과 다를 게 없어서 별로’라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초반 부진을 실패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지금의 반응은 향후, 숏폼 서비스의 리스크를 살펴볼 데이터로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관건은 그 착오를 얼마나 빨리 수정해 나가느냐다.
국내 검색 포털의 양대산맥으로 호령했지만, 유튜브의 등장으로 존재감이 이전 같지 않은 네이버와 카카오 역시 동영상 시장 잡기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네이버는 네이버 웹툰 지적재산권을 활용한 단편 영화 만들기에 나섰다. 지난해 ‘네이버웹툰 숏폼 무비페스티벌’이란 이름의 시나리오 공모전을 실시했다. 숏폼 콘텐츠 전문 제작사 72초TV에 20억원을 투자하기도 했다. 숏폼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2015년 이 시장에 뛰어든 오리지널 콘텐츠 업체다. 카카오는 자회사 카카오M을 통해 모바일 환경 맞춤 숏폼 예능과 드라마 제작을 준비 중이다. <진짜 사나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 <비긴어게인> 등을 연출한 스타 PD들의 카카오행은 이러한 흐름과 맞물린다.
숏폼 콘텐츠 시장은 아직 절대 강자가 없다는 점에서 관점에 따라 기회의 땅으로 읽히는 분야다.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등의 OTT가 모바일을 통해 서비스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 콘텐츠의 러닝타임과 시청 포맷은 TV에 최적화돼 있다. 반면 페이스북 워치나 유튜브 플랫폼 등으로 볼 수 있는 단편 동영상들은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 매력이 떨어진다. 고급 콘텐츠를 지향하는 퀴비의 행보와 잔뼈 굵은 스타 PD들의 숏폼 콘텐츠를 향한 도전에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 모바일 환경 중심으로 변화하는 콘텐츠 소비 시장에서 누가 승기를 잡을까.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 에디터
-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