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그루는 세 편의 드라마에서 거의 비슷한 역할을 했다. 연애와 결혼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십 대 후반의 여자. 많은 여자가 한그루의 연기를 보며 “내 고민과 똑같다”며 공감했다. 하지만 한그루의 고민은 아무도 몰랐다.
어제 눈이 많이 왔어요. 집에 있었어요.
남양주에 있는 큰 집이 방송에 소개되었어요. 흙 밟고 사는 것 같아서 부러웠어요. 저 거기 안 살아요. 강남에서 엄마랑 살아요. 한데 지금 사는 집도 베란다와 담 사이에 흙이 있어요. 아침마다 고양이가 흙에 남긴 발자국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동물을 진짜 좋아해요.
사람보다 동물이 더 좋아요? 전 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끝까지 같이 가야 돼요. 뭐든지 해주고, 구박도 많이 하고, 칭찬도 많이 해요. 엄마 같은 면이 있어요.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정이 많은 사람들이 잔소리도 많고, 상처도 먼저 받는 것 같아요. 차라리 차가워지려고 노력해본 적은 없어요? 다른 사람의 성격을 닮아야겠다는 식의 생각은 안 해봤어요.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잖아요. 전 현실적이어서 안 되는 건 확실히 안 하고, 될 것 같은 것만 해요. 이를테면 어떤 꿈을 이뤄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안 해요.
하지만 연기할 때 꼭 ‘이뤄내고 싶다’는 에너지가 보여요. 캐릭터의 욕구를 확실하게 표현하면서도, 일부러 과장하는 것 같진 않아 반가웠어요. 연기할 때는 확실하게 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극에서 연인으로 나온 상대역에게 원하는 게 있잖아요. 상대방의 사랑이라든지, 진실한 답이라든지, 그 욕망을 뚜렷하게 나타내려고 해요.
절대 할 수 없는 연기도 있어요? 예쁜 척이요. 하하. 그리고 정말 행복하거나 멋진 인생을 사는 역할은 힘들 것 같아요. 현실적인 것과 벗어나면 어려워요. 결국 만들어내야 하잖아요.
<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 < 따뜻한 말 한마디 >, < 연애 말고 결혼 >에서 결혼이 하고 싶은 이십 대 후반 직장인 여자를 연기했어요. 그 연기를 할 때 이십 대 초반이었으니 실제 상황과 딱 떨어지는 건 아닐 텐데요. 그래도 이해는 돼요.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제 인생도 꽤나 다이내믹했어요. 일찍 유학을 가서 혼자서 보낸 시간도 많았고, 집에 일도 많았어요. 사실 그 남양주 집이나, 엄친딸이라는 이야기도 과장돼서 보도된 부분이 많아요. 엄마와 저는 ‘어쨌든 우리가 행복하면 된 거 아니냐…’며 넘겼어요. 사실 예민한 부분이에요. 가정사가 있어도 그걸 제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도, 제 인생만큼, 엄마 아빠의 인생도 중요하니까 제가 공개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직접 나서서 정정해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 남양주 집도 팔려고 내놨어요. 방송에서도 내놨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전부 편집되고 이슈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행복할 것 같은 사람도 결국 힘들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극복했어요? 전 삶에 대한 애착이 정말 강한 것 같아요.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항상 살고 싶어요. 그래서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빨리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더러운 것 어두운 것 전부 닦아내고 방법만 찾았어요.
최근에도 힘든 일 있었어요? 좀 말라 보여요. 쉬면서 살이 많이 빠졌어요. 운동을 좀 쉬었더니 근육이 사라졌어요. 촬영할 때는 굉장히 예민한 편이에요. 모든 촬영이 끝나면 긴장이 풀리면서 참아왔던 병이 전부 걸려요. 살도 빠져요. 오히려 운동할 때 살이 쪄 보여요. 요즘 운동을 안 해서 불안해요.
뒤처진다는 느낌일까요? 아니요, 습관에 가까워요. 예를 들어 고기를 늘 먹었는데 안 먹고 거르면 뭔가 빠진 것 같고 속이 ‘허’ 한 느낌 같은 거예요.
고기를 안 먹은 느낌이 뭔지는 정확히 알겠는데, 운동을 안 한 느낌은 잘…. 저 엄청 게을러요.
게으른 사람은 운동을 안 해요. 하하. 저도 제가 부지런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쉬면서 얼마나 게으른지 알게 됐어요. 데뷔하고 나서는 계속 일하느라 바빴고 그전에는 유학가서 살아남고 적응하느라 앉아서 쉴 틈이 없었어요. 남들이 두 시간 만에 끝내는 숙제도 저는 밤새워서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나는 엄청 부지런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이 사니까 아니었어요.
쉴 때는 뭘 해요? 가로수길에 있는 단골 카페 가서 친구랑 앉아 있는 게 전부예요. 진짜 생활이 단조로워요. 운동 갔다가 집에 와서 강아지랑 고양이랑 놀아줘요. 그것도 누워 있으면 애들이 오면 만져주는 정도예요. 항상 느긋해요.
일할 때도요? 저는 오디션 떨어져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아요. 친구들은 엄청 아쉬워하는데. 저는 그냥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죠.
최근에 오디션에 떨어진 적 있어요? 있죠. 좀 욕심이 나는 역할이었는데, 다른 배우가 한다는 얘기 들었어요. 바로 뭐 하고 놀지 생각했어요. 저는 타이밍이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살아가는 모든 것이 타이밍 같아요. 저는 모든 기획사에서 안 좋아하는 배우일 거예요. 주말 드라마나 일일 드라마가 많이 들어왔어요. 하지만 거절했어요. 미니시리즈만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주말, 일일 드라마 모두 제게 잘 맞지 않는 옷 같아요. 연령대가 좀 있으신 분들을 위한 드라마를 하다 보면 ‘들리는 연기’를 해야 하잖아요. 시청자가 화면을 안 봐도 이해가 되게끔 연기를 해야 돼요. 과장해야 하고, 평상시 말투보다 또박또박 정확하게 소리를 내야 하는 연기는 부담스러워요. 그런 연기를 하면 너무 힘들어요. 자유로운 게 좋아요. 솔직한 것.
배우 한그루를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1년 전에 본 < 따뜻한 말 한마디 >에서 엄마(고두심)와 싸우는 장면 때문이었어요.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쓰면서도 전형적인 ‘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고두심 선생님이 진짜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하니까요. 오히려 가르쳐주신다기보다 “네 경험을 통해 편하게 하면 된다”고 말씀하세요. 정말 어떤 한마디, 작은 표정 연기까지 전부 받아주세요.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어떻게 진심으로 연기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상대방의 연기를 받아주지 않는 배우 때문에 힘들어하는 스태프나 배우의 이야기를 종종 들어요. 예민한 부분인 것 같아요. “왜 리액션을 안 해?”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잔꾀를 부리는 배우들이 있어요. 제 연기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다가 본인 바스트 쇼트 찍을 때 갑자기 준비해온 연기를 해버려요. 당황스럽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냥 놔둬요. 본인이 모니터를 하게끔. 결국 절대 재미있지도 않고 예쁘지 않고 절대 와 닿지 않는 그런 신이 돼요. 딴짓을 한 게 고스란히 느껴져요. 편집된 걸 보면 상대방도 깨닫고, 결국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신이 리액션에 인색했던 적은 없어요? 쉽게….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왜 제가 “쉽게”라고 이야기 하려다가 멈칫했냐면, 제가 했던 연기 중 어떤 연기는 쉬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진짜 저였어요. 정말 느끼는 대로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은근히 굴욕적인 캡처가 많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저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나와요. 그런 모습을 공감해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지금 이십 대로서 가장 공감하는 게 뭐예요? 연애와 돈? 저 생계형 배우예요. 쉴 때 너무 좋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최대한 절약해야 돼요. ‘내가 이 시점에서 돈을 어느 정도 벌어야지, 생활비도 이 정도지? 그럼 아껴야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아요? 최근에 차 샀는데 빨리 할부 갚고 싶어요. 할부가 엄청 길어요.
어떤 차인데요? 레이요. 그 차가 최상의 선택이었어요. 물론 저도 큰 차타고 싶죠. 지프 같은 거요. 하지만 벌이에 맞게 쓰는 거죠. 지금은 나가는 돈도 많고, 엄마도 일을 안 해서 제가 벌어야 하는 시기예요. 그리고 제가 원래 쇼핑을 별로 안 좋아해요. 창피하지만 발망 같은 브랜드도 이쪽 일을 하면서 알게 됐어요. 한 번도 제 돈으로 비싼 옷이나 백을 사본 적이 없어요. 최근에 MAMA 행사 때문에 홍콩에 잠깐 머물렀는데, 쇼핑몰이 하도 많아서 힘들었어요.
최근에 한 가장 큰 사치는 뭐예요? 일식집에서 언니들이랑 밥 먹은 거예요. 일인당 13만원짜리 였는데, 진짜 진짜 진짜 큰 결심을 해서 먹은 거예요. 맛집 검색해서 갔는데, 맛은 있었어요.
여기 근처 중국집 짬뽕이 정말 맛있어요. 같이 온 회사 식구들이랑 드세요. 아뇨. 집에 가서 엄마랑 먹을래요. 엄마가 집에 혼자 계세요.
토요일이 밸런타인데이예요. 아무 약속 없어요
- 에디터
- 양승철
- 포토그래퍼
- HASISI PARK
- 모델
- 한그루
- 장소 협조
- 플레이스막, 막사
- 스타일리스트
- 최영주
- 헤어
- 서언미 by 보보리스
- 메이크업
- 김수희 by 보보리스
- 어시스턴트
- 류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