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최고의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

2020.04.27GQ

다니엘 크레이그는 열정으로 펄펄 끓기도 하지만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산다.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뜨거운 한낮의 그림자처럼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선명하게 각인됐다.

티셔츠, 레기디 스레드. 팬츠, 리처드 앤더슨.

티셔츠, 까날리.

수트, 폴스미스. 셔츠, 샤르베 at 삭스 피프스 애비뉴.

팬츠, 스톡 빈티지.

선글라스, 자크 마리 마지.

작년 10월의 어느 금요일, 자정 직전이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로서 마지막 장면의 촬영에 임했다. 런던 인근의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추격 신이었다. 배경은 여행 엽서 속 사진처럼 오래된 캐딜락과 네온 불빛으로 물든 아바나의 거리. 크레이그가 발목을 다쳐 수술대에 오르는 사고가 없었다면 카리브해 지역에서 촬영했을 장면이었다.

2005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밀요원 캐릭터에 캐스팅됐을 당시 그는 서른일곱살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머리는 회색으로 바랬다. 크레이그는 관절마다 통증이 느껴진다고 했다. “점점 뻑뻑하다가 어느 순간 뛸 수 없게 될 거예요.” 그는 아바나의 골목을 재현한 세트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본드 시리즈를 찍는 과정은 카오스에 가깝다. 우여곡절이 많다는 얘기다. 크레이그의 다섯 번째 본드 영화이자 마지막 작품인 <007 노 타임 투 다이>도 다르지 않다. 감독으로 내정된 대니 보일은 하차했다. 제작자와의 창작적 견해 차이가 이유였다. 크레이그는 촬영 중 부상을 입었다. 촬영장에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빌어먹을 영화를 대체 어떻게 찍겠다는 건가 싶었어요. 그런데 되긴 되더라고요.”

제임스 본드 역을 거쳐간 배우보다 달에 다녀온 우주인이 더 많다. 크레이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본드를 연기했다. 그의 세 번째 작품 <007 스카이폴>은 11억 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이듬해 개봉한 <아이언맨 3>와 비슷한 흥행 성적이다. 007 시리즈는 마블 프랜차이즈 영화에 필적하는 힘을 지녔다. 동시에 전통과 관습을 고스란히 계승한다. 제작사인 EON 프로덕션의 사무실은 버킹엄 궁전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1962년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의 제작자는 앨버트 커비 브로콜리다. 지금은 그의 딸 바바라 브로콜리와 의붓아들 마이클 G. 윌슨이 시리즈를 지휘하고 있다. 주제곡의 멜로디는 반 세기 동안 변함없다. 스턴트도 대부분 진짜에 가깝다. 007 시리즈의 대본은 본드에게 어떤 최악의 상황이 닥치든 잘 풀릴 거란 관습적인 결론을 담고 있다. <007 스카이폴>, <007 스펙터>를 연출한 샘 멘데스는 “본드는 한 줄기 실낱같은 희망에 자신을 내던지곤 해요. 그다지 건강한 방식은 아니죠”라고 말했다.

마지막 촬영에는 약 3백 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다들 녹초가 됐다. 영화의 엔딩이자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에게 전하는 작별 인사는 몇 주 전에 이미 촬영을 완료했다. 이후에는 앞서 7개월간의 촬영 분량 중 분실했거나 엉망인 장면을 다시 찍고 있다. 크레이그가 카메라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묵직하고도 절박한 뜀박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어요. ‘안녕, 잘 지내. 난 이제 그만둔다’ 이런 심정이었죠.” 턱시도 차림의 크레이그가 자욱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으로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모든 여정이 마무리됐다.

그날 촬영은 예정보다 일찍 마무리됐다. 제작진과 스태프들이 한데 모였다. 크레이그는 캐리 후쿠나가 감독과 포옹을 한 뒤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삐뚤어진 보타이가 그의 피로감을 드러냈다. “머릿속에 하고 싶은 말이 맴돌았지만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어요”라고 크레이그는 그날 밤을 회상한다. 그는 이런 종류의 감성적인 순간에 미련을 갖는 편이 아니다. “007 시리즈는 전설과 같아요. 본드를 둘러싼 이야기는 차고 넘쳐요. 앞으로도 무럭무럭 자랄 거예요.” 그날은 좀 달랐다. 후쿠나가 감독이 짧게 한마디를 하는 동안 그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2018년 자신과 레이첼 와이즈 사이에 딸이 태어난 뒤 가끔 울컥한다고 했다. 그의 스턴드 대역도 눈물을 보였다. 이를 지켜본 제작자 브로콜리와 윌슨은 “원래 야간 촬영이 끝나면 배우와 스태프들은 금방 흩어져요. 그날은 다들 오래 자리를 지켰어요.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이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몇 주가 지나고 뉴욕 맨해튼의 한 호텔에 제작진이 모였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예고편이 공개된 날이었다. 크레이그, 레아 세이두, 라미 말렉, 라샤나 린치 등의 주연 배우들은 아침 일찍 ABC 방송국의 간판 프로그램인 <굿모닝 아메리카>의 생방송에 출연했다. 호텔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으로 예고편을 봤다. 솔직히 말해 25번째 본드 영화의 첫 인상은 23번째, 24번째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본드는 바이크를 타고 계단을 질주해 올라갔으며, 악역을 맡은 말렉의 얼굴에 근심과 불안이 가득했다. 그렇다 해도 14년간 몸 바쳐온 시리즈를 떠날 준비를 마친 크레이그는 새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뜨겁게 연소하는 불꽃의 파란색을 담은 눈과 복서의 투박하고 단단한 아름다움이 새겨진 크레이그의 얼굴은 화면 속에서 홀로 정적을 지킬 때가 있다. 반면 현실에선 몸 어딘가에 용수철이 달린 듯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시리즈에 남긴 자신의 업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난 정말로 괜찮아요. 전작으로 끝냈다면 지금과 같이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 크레이그는 손을 터는 시늉과 함께 재차 강조했다. “진짜 괜찮아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어요.”

크레이그의 본드 영화는 전작들과의 차별점이 명백하다. 지금까지 3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007 시리즈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바꿔놓았다. 크레이그는 시리즈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가져왔다. 이전까지의 본드 영화들은 캐릭터와 세계관을 재탕하는 수준이었다. 크레이그의 본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고 사랑에 빠졌다. 눈물을 처음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안 플레밍의 원작 소설로 되돌아갔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결같이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을 유지한 본드와는 사뭇 다른 캐릭터를 발견했다. 크레이그는 판타지와 다름없는 인물에 깊은 내면과 유한성, 황량한 상실감을 부여했다. “본드는 어두운 인물이에요. 소설 <문레이커>에서 그는 샴페인에 암페타민을 섞어 마시기도 해요. 이런 장면을 영화에서 묘사할 수는 없지만 본드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본드는 만신창이에 가까워요. 스파이라는 직업은 사람을 완전히 망쳐놓거든요.” 비로소 본드는 능글맞은 웃음을 버리는 대신 많은 것을 얻었다.

그가 007 시리즈를 이끄는 사이 제임스 본드의 고향인 영국은 큰 변화에 직면했다. 혼돈의 시기와 자기 회의를 겪었다. 미투 운동이 일기도 했다. 크레이그가 기존의 본드 캐릭터를 깨부순 데는 어쩌면 다른 의미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얘기를 꺼내자 그는 자랑 같은 건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건, 그러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는 마지못한 척 동의를 표했다. “관객들의 기대치를 높이긴 했어요. 그것도 아주 제대로.” 그가 바꾼 007 시리즈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브로콜리에게 크레이그 없이 앞으로 어떻게 시리즈를 이어갈지 계획을 물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적절한 답을 찾아 헤맸다. “솔직히 나도 몰라요. 지금 당장 떠오르지 않아요. 고민하고 싶지도 않고요.”

크레이그와 브로콜리의 첫 만남은 장례식장에서 이뤄졌다. 2004년 캐스팅 디렉터 메리 셀웨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크레이그가 커리어 초반 주요한 배역을 따낼 수 있도록 도왔다. 원래 크레이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런 얘기를 하면 질색하지만 난 스스로의 힘으로 다 이뤘어요.” 10대 시절 집을 떠난 뒤 그는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 크레이그의 부모는 그가 네 살 되던 해에 갈라서기 전까지 영국 북서부의 작은 마을인 프로드셤에서 선술집을 운영했다.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그는 TV에서 본 코미디언의 흉내를 내며 단골들 앞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돈도 받았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생업으로 삼아온 셈이죠.”

아무튼 메리 셀웨이의 장례식장에는 브로콜리도 참석했다. 그곳에서 크레이그를 만나 자신의 사무실에 들르라는 말을 건넸다. 당시 그녀는 5대 제임스 본드였던 피어스 브로스넌의 후임자로 그를 염두에 뒀다. 6년이나 그를 지켜봤다. 출발점은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1998년 작 <엘리자베스>였다. 이 영화에서 크레이그는 여왕 암살 지령을 받은 사이코패스 성향의 신부 역을 맡았다. 크레이그는 영화에서 폭력을 묘사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든 폭력성이 갑자기 폭발하는 장면들이 있어요. <대부>에서 알 파치노가 총으로 경찰을 쏘는 장면이 그렇죠. 그의 표정을 보면 사람을 쏜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관객들은 더 놀랄수 밖에 없어요.” <엘리자베스>에서 크레이그는 해변가에서 정보원을 살해하는 연기를 했다. 대본에 따르면 상대를 물속으로 밀어 넣은 뒤 목을 조르는 장면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상대 배우를 끌어낸 뒤 머리를 돌로 깨부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계속 내려쳤다. 미치광이가 된 것처럼. “땀범벅이 되자 컷 소리가 들렸어요. 이어서 ‘어, 좋네!’라고 하더군요.” 브로콜리는 이 장면에 사로잡혔다. 크레이그가 연기한 신부가 교회 안을 몰래 돌아다니는 장면에서도 전율에 휩싸였다. 본드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그는 본드 그 자체였어요.”

크레이그의 생각은 달랐다. EON 사무실에 처음 찾아간 날, 벽을 장식한 007 시리즈의 포스터들을 보면서 자신이 적임자일 리 없다고 되뇌었다. “배우들을 불러 느낌 정도만 살펴보는 거라 생각했어요. 게다가 그때만 해도 피어스 브로스넌이 007 시리즈를 그만둘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제작사의 진심을 확인한 크레이그는 브로콜리를 말렸다. “나는 숀 코너리를 흉내 낼 수 없고 피어스 브로스넌이 될 수도 없다고 말했죠.” 당시 그는 순조롭게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지만 제임스 본드 역을 덥석 받기는 어려웠다.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훗날 선술집에 틀어박힌 퇴물이 되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제임스 본드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탓에 고민은 더 깊었다. “그때까진 많은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만족스러운 삶이었죠. 본드를 연기하는 순간 내 인생이 완전히 망가질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2004년 10월, 피어스 브로스넌이 007 시리즈에서 하차한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크레이그는 답변을 미루고 있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얘기죠. 하지만 나름 내 인생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어요” 결국 크레이그는 <007 카지노 로얄>의 대본을 먼저 보여달라고 제작사에 요구했다. 나무랄 데 없는 내용이었다. 오랜 고민은 그렇게 정리됐다. 얼마 후 미팅을 위해 그는 드레스 셔츠를 챙겨 입었다. 커프스 링크를 찾지 못해 셔츠 소매가 재킷 밖으로 빠져나왔다. “소매가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브로콜리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크레이그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이미 그는 새로운 제임스 본드와 다름없었다.

크레이그가 본드 역을 받아들은 뒤, 스튜디오에서는 스크린 테스트를 요청했다. 본드 역을 맡은 배우들은 똑같은 장면으로 스크린 테스트를 치러야 했다. 007 시리즈의 전통과 같았다. 그건 숀 코너리가 주연한 <007 위기일발>의 한 장면이기도 했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전라의 상태로 침대에 누운 본드는 자신을 기다리던 러시아 첩보원 타티아나를 발견한다.’ 크레이그는 그 내용을 듣자마자 “정말 끔찍했다”고 회상했다. 스크린 테스트는 실제 촬영처럼 진행했다. 파인우드 스튜디오에 세트를 만들었다. 크레이그의 첫 번째 본드 영화인 <007 카지노 로얄>을 연출한 마틴 캠벨도 있었다. 그는 과일 그릇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포도를 집어먹으라고 지시했다. 크레이그는 싫다고 했다. 둘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내가 과연 제임스 본드를 연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어요.” 본드 역할에 대한 불확신은 개인적 문제만이 아니었다. 대중에게 다니엘 크레이그는 낯선 이름이었다. 그의 캐스팅 소식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그가 적임자가 아니라는 볼멘소리가 쏟아졌다. 분노와 항의에 더 가까웠다. 007 시리즈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도 감지됐다. 제임스 본드를 왕실이나 국가대표 축구팀 같은 국가적 공유재산처럼 여기는 영국의 반응은 특히 심각했다. 타블로이드 언론은 20대 시절 2년간 결혼 생활을 했고 파티를 즐긴다는 것 외에는 크레이그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데일리 미러>에는 ‘내 이름은 블랜드 Bland, 제임스 블랜드’라는 헤드라인이 등장했다. 심지어 그의 머리 색도 원성을 샀다. 당시 그는 금발이었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 소설에 묘사된 본드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고 해도 짙은 색 머리는 불변의 진리였다. 마음이 불안해진 크레이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과연 본드를 연기할 수 있을지 물었어요. ‘당연히 할 수 있어’라는 답변을 들었죠. 그리고 어머니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007 카지노 로얄> 시사회는 2006년 11월 런던의 오레온 레스터 스퀘어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참석했다. 흑백의 오프닝 시퀀스가 지나가고 본드가 타깃을 세면대에서 익사시키는 장면이 나왔다. 007 시리즈에서 폭력이 그렇게 자세히 묘사된 적은 거의 없었다. 객석에서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직을 배신한 요원을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이 이어졌다. 또다시 몇몇 관객이 웃었다. 객석에 앉아 있던 크레이그는 공포에 빠지기 시작했다. “속으로 아, 망했다고 외쳤어요.” 이윽고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오고 익숙한 주제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14년 전 이야기를 하던 크레이그가 눈물을 보였다. “그때 내가 느꼈던 부담과 압박이 떠올랐어요. 알다시피 거의 모든 사람이 ‘쟤는 본드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손가락질을 했어요. 한편으로는 나도 그들이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지 이해됐어요. 나조차도 내가 별로라고 느끼는 부분들이 있었으니까요.” <007 카지노 로얄> 촬영을 마친 후 크레이그는 시리즈의 방향성을 찾는 데 성공했다. “크고 거창한 주제가 떠올랐어요. 사랑과 비극, 상실에 관한 거였죠. 인생에서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런 주제들이에요.” 그는 사랑했던 베스퍼 린드의 죽음 후 본드가 세상과 단절되길 원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모든 걸 잃어버린 남자가 서서히 자신을 되찾아가는 심리극이 펼쳐지게 된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긴 여정이 마무리돼요. 본드는 사랑에 빠질 수 있음을 깨닫죠. 또 그게 자신의 삶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돼요.” 추격전과 살해 위협, 폭발 그리고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미치광이들의 틈바구니에 이처럼 장기적이며 복잡한 주제를 끼워 넣기는 사실 쉽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정해둔 개봉일의 압박감도 컸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의 이야기는 <007 카지노 로얄> 직후의 상황에서 긴박하게 시작됐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볼리비아의 수자원에 관한 다소 엉뚱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촬영을 시작할 때 완성된 대본이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액션에 비중을 두게 됐죠.”

크레이그는 두 편의 007 시리즈를 찍는 동안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려 숨이 막히는 경험을 종종 하기도 했다. 본드 역을 수락하면서 그는 영화에 창작적 견해를 제시하고 반영할 수 있는 권리를 제작사로부터 받아냈다. 이후 자신이 모든 과정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크레이그는 <007 스카이폴>을 찍으면서 샘 멘데스 감독과 다시 만났다. 비로소 힘을 빼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샘은 내 역할이 연기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그의 말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죠. 그전까지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뻣뻣하게 굴었어요.” 멘데스는 갱스터 영화 <로드 투 퍼디션>에서 크레이그를 캐스팅한 바 있다. 그는 폴 뉴먼과 톰 행크스 사이에서 연기를 했다. 촬영 내내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다는 소식을 들은 멘데스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본드는 어떤 상황에서든 세련된 태도로 흐트러짐 없이 펀치라인을 내뱉는 캐릭터잖아요. 내가 아는 다니엘은 캐릭터의 감정에 완벽히 몰입하는 배우였어요. 그런 그가 본드를 연기한다고?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어 맨데스는 크레이그가 <007 스카이폴>에서 깊은 상실감에 빠진 본드를 활활 타오르는 인물처럼 연기하려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게 바로 다니엘이기도 해요. 그는 무수한 상처와 사연을 지닌 것처럼 보여요.” 크레이그는 숱하게 반복되며 낡고 고루해진 캐릭터의 스웨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007 스카이폴>의 오프닝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악당을 추격하던 본드는 채굴기로 기차의 지붕을 뜯어낸 후 객실칸으로 뛰어든다. 아슬아슬하게 착지한 본드는 셔츠의 소매를 바로잡은 후 다시 나아간다. 이 장면은 애드리브였다. 상황에 몰입한 크레이그는 뼛속까지 본드가 됐다. “그 장면은 괜한 멋이 아니에요. 기차 지붕에서 뛰어내린 본드도 두려웠을 거예요. 하지만 괜찮다는 식의 제스처를 내보여요. 그게 바로 본드예요.” 재해석을 통해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 그게 바로 크레이그의 기술이다.

자신의 네 번째 본드 영화인 <007 스펙터>에 이르러 크레이그는 완전히 탈진해버렸다. 육체적으로 견딜 수 있는 한계치에 다다랐다. 제임스 본드의 육체는 크레이그를 통해 경탄의 대상이 됐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 트렁크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서 걸어 나오며 드러낸 근육질 몸매는 <007 살인번호>에서 흰 비키니 차림으로 등장한 우르줄라 안드레스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눈요기용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꽤 많은 스턴트를 직접 수행했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부상이 늘었다. 어깨와 무릎이 망가졌다. <007 퀸텀 오브 솔러스>의 촬영 중에 급강하하는 비행기 내부에서 스턴트 신을 소화하다 오른쪽 어깨의 관절와순이 파열됐다. 이탈리아에서는 창문을 뚫고 뛰어내린 뒤 벽에 부딪치는 장면을 찍다가 같은 부위를 또 다쳤다.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에서 연기를 과하게 해버렸어요. 당시 내 팔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어요. <007 스카이폴> 촬영 초반에는 양쪽 종아리 근육이 파열됐어요. 어쩔 수 없이 재활 훈련을 받으며 촬영을 이어갔어요. 육체적 부상은 회복됐지만 심리적으로 힘들었어요. 또다시 다치게 될 거란 불안감이 컸어요.” 크레이그는 18미터 높이에 매달려 대체 뭐하는 짓인지 본인도 알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007 스펙터>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프로 레슬링 챔피언 출신의 데이브 바티스타와 격투 신을 찍던 중 전방 십자인대가 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데이브가 나를 살살 다루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에게 ‘그냥 날 좀 집어 던져줘’라는 식으로 말했죠. 그리고 데이브가 나를 들어서 내던졌는데 무릎이 아주 망가져버렸어요.” 크레이그는 두툼한 무릎 보조기를 착용한 채 나머지 촬영을 진행했다. 카메라에 찍힌 보조기는 편집 단계에서 삭제됐다. 크레이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긋지긋했어요”라고 말했다.

<007 스펙터>의 촬영을 마치고 얼마 뒤 가진 인터뷰에서 크레이그는 다섯 번째 본드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제임스 본드를 다시 연기하는 것보다 손에 쥔 잔을 부순 뒤 유리 조각으로 손목을 긋는 게 나아요.” 크레이그는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는 일에 끝까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촬영 때도 맨 앞의 가운데 자리에 세우는 것도 모자라 영화 홍보까지 시키다니! 모두가 내 등을 떠밀며 ‘얼른 나가봐’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어요. 영화에 관한 모든 책임을 내가 져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 책임이 내게 있긴 했지만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요.” 논란이 된 인터뷰 내용은 그의 진심이었다. “007 시리즈를 다신 안 하려고 했어요. ‘과연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만들 가치가 있는 영화일까?’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라는 답이 나오지 않았죠. 육체적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후속작이 나오기까지 5년이나 걸렸어요.” <007 스펙터>와 <007 노 타임 투 다이> 사이의 공백은 007 시리즈 역사상 두 번째로 길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대니 보일 감독은 하차했고 4개의 대본이 완성됐지만 쓸모없게 됐다. 드라마 <트루 디텍티브>를 연출한 캐리 후쿠나가는 촬영 3개월 전에 합류했다. 설상가상으로 크레이그가 발목을 다쳤다. 한 번 연기된 개봉 일정이 다시 밀렸다.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스태프가 다치는 일까지 있었다. 영국 타블로이드 매체들의 표현에 따르면 <007 노 타이 투 다이>는 저주받은 영화였다. “그 얘기를 듣고 기분이 상했어요. 우린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거든요.”

불운은 그치지 않았다. 영화는 오는 4월에서 11월로 개봉이 연기됐다. 개봉일을 한 달 밖에 남겨둔 시점에 결정됐다. 크레이드가 본격적인 홍보 투어를 막 시작한 때였다. 그는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 영화”라고 소개하곤 했다. 때로는 괴물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애정 표현이었다. 그는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작품의 대본 작업에 크게 관여했다. “나의 마지막 본드 영화이기도 하니까요. 과거에는 한 걸음 물러나 대본을 존중했어요. 그러고는 나중에 후회했어요.” 크레이그는 촬영이 진행된 상태에서 피비 월러 브리지를 작가로 영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드라마 <킬링 이브>의 각본을 썼으며 각본, 제작, 주연을 겸한 <플리백>으로 각종 시상식의 코미디 부문을 휩쓴 인물이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크레이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작진 회의에 단호한 자세로 나갔어요. 지나치게 직설적이거나 무례한 태도를 보일 때도 있었죠. 다 인정해요. 내 뜻은 이제 거의 다 왔으니 끝까지 따라와 달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매번 미안하다는 사과를 잊지 않았어요.” 크레이그를 옆에서 본 월러 브리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본드에 굉장한 애착을 보였어요. 자신의 캐릭터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싸웠어요.” 후쿠나가 감독에 따르면 크레이그는 한 신의 대사를 통째로 제안하는 일도 있었다. “다니엘은 본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이끌어가는 존재라고 여겼어요. 그 생각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죠. 그리고 본인도 최선을 다했어요.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될 때까지 스스로를 혹사 시키며 연기했어요.” 정작 크레이그는 촬영을 마친 지금 <007 노 타임 투 다이>에 큰 감흥이 없다고 운을 뗐다. “열정을 쏟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에요.

원래 촬영에 들어가면 영화의 세계관에 빠져 현실에 대한 인식이 살짝 흐려지거든요. 그게 저의 큰 문제이기도 했어요. 이번에는 영화에 함몰되지 않았어요.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죠. 나이가 들었거나 아이가 생겨서 그랬을 수 있어요. 뭐가 됐든 더 이상 일이 우선순위가 아닌 거죠.”

몇 주가 흐른 뒤 런던에서 크레이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커다란 가죽 모자를 쓰고 여행 가방을 든 채 호텔 로비에 서 있었다.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크레이그는 전보다 더 쾌활하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그가 주연한 <나이브스 아웃>이 흥행을 거두고 있었다. 이 영화로 그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의 뮤지컬 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크레이그는 사립탐정 브누아 블랑을 연기했다. 말이 많고 미국의 유명 뮤지컬 작곡가인 스티븐 손드하임의 곡을 흥얼거리는 인물이다. 겉은 무뚝뚝하고 속은 상처로 가득한 암살자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일은 그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본드 역을 그만두고 이런 역할을 해야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죠. 게다가 새로운 본드 영화를 앞두고 흥행에 성공했어요. 더없이 좋은 일이에요.” 크레이그의 차기작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개봉을 기다리며 시리즈에서 천천히 빠져나오는 데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제임스 본드를 거쳐간 다른 연기자들과 달리 크레이그의 다음 행보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특히 지금처럼 자신감에 차 있다면 더욱 그렇다. “웬만한 배역은 다 소화할 수 있어요. 훌륭하게 해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잘해낼 자신은 있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이른 저녁이었고 룸서비스로 맥주를 주문했다. 크레이그는 런던의 스튜디오에서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대사를 녹음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날 아침 영화를 처음 본 것이다. 보안을 위해 최종본은 한두 개의 하드 드라이브에만 존재한다고 했다. “뉴욕에서 볼 수 없어서 비행기를 타고 런던에 와야 했어요.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번 작품은 통제가 더 심해요.” 그가 본 영화는 배경음악도 없고 특수효과도 미완성이었다. 그래도 크레이그의 마지막 본드 영화는 완성됐다. 일행과 동행해도 됐지만 그는 혼자 보는 걸 선택했다. “내가 나온 영화를 볼 때마다 처음 몇 분은 정말 보기 힘들어요. ‘왜 저렇게 서 있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하지만 부끄러운 순간은 금세 지나가고 크레이그는 텅 빈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보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상체를 앞으로 빼고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넋을 잃고 영화에 빠져들었던 그 소년으로 말이다. “바로 저거야. 내가 하고 싶은 게 저거야”라고 외치게 만들었던 커다란 화면 속에는 지금 크레이그 자신이 서 있다. 그가 한 마디씩 끊어가며 천천히 말했다. “영화는 잘 만들어졌어요. 천만다행이에요”

    Sam Knight
    포토그래퍼
    Lachlan Bailey
    스타일리스트
    George Cortina
    그루밍
    Johnnie Sapong
    테일러링
    Martin Keehn
    세트 디자인
    Nick Des Jardins at Streeters
    프로덕션
    That One Produ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