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을 만났다. MVP, 배구장의 메시, 우승청부업자 대신, 좀 다혈질에, 예쁘단 말에 활짝 웃는, 세터 출신 레프트 공격수 김연경을 만났다.
이틀 뒤면 팀(페네르바체)에 합류하기 위해 터키로 간다. 수술은 안 하기로 했나? 터키에서 구단 트레이너들에게 다시 검사를 받을 것 같다. 10월에 중요한 컵 대회가 있어서 뛰고 나서 수술할 수도 있고, 아니면 시즌 끝나고 할 것 같다.
올림픽에서 무리했나? 올림픽뿐만 아니라, 어떤 시합이든 힘든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올림픽 때는 특히 좀 더 힘들었다. 경기 수도 많았고.
페루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을 때, 한국의 박만복 선생이 감독이었다. 박 감독이 말하길, 한국에 박미희 같은 선수가 세 명만 있으면 한국도 당장 우승할 거라고 했다. 이제 그 말을 “김연경 한 명만 더 있으면”으로 바꿔보려 한다. 김연경이 더 있으면 팀이 망하지 않을까? 나같이 막 신경질 내고, 지 맘대로 하는 선수가 있으면 안 좋을 것 같다. 하하, 동료들도 나 한 명으로 족하다고 할 거다. 포지션마다 하는 역할도 다르고.
한국, 일본, 터키를 거치며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래도 올림픽은 좀 달랐나? 언니들이 올림픽 얘기할 때마다 정말 큰 대회라고, 가보면 정말 다를 거라고 했다. 난 속으로 ‘뭐 달라’ 하면서, 별 생각 없이 갔다. 그런데 오륜기를 보자마자 기분이 설레더니 이상하게 가슴이 세게 뛰었다. 올림픽 빌리지 안에 들어가니까, 전 세계 선수들이 보였다. 코비 브라이언트도 보고…. 그제야, ‘아 다르구나, 정말 크구나’ 실감했다.
마의 2세트라고 부르고 싶다. 미국전, 일본전 모두 2세트 막판에 내줬다. 그 2세트를 잡았으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2세트가 유독 그렇게 됐다. 경기 자체가 너무 아쉽다. 첫 세트도 좀 더 힘을 냈으면 이길 수 있었다. 시합 자체가 아직도 아쉽다.
메달을 놓친 일본전은 특히 더 그랬다. 21:21이었나, 사코다 선수가 터치아웃을 시켰는데, 그때 우리 선수 안 맞고 나갔다. 오심이었다. 그 점수가 컸다. 1세트에서 기선제압이 중요한데, 그때 일본에 분위기가 많이 넘어갔다.
미국전 3세트에서도 오심에 가까운 판정이 나와, 관중들이 심판에게 야유를 보냈다. 국내 리그에서는 비디오 판독을 한다. 세계 대회에서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했으면 좋겠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 경기에 두 번 정도라든지.
세계 예선에선 일본을 이겼다. 올림픽에서 만난 일본은 좀 달랐나? 솔직히 일본을 너무 쉽게 봤다. 이길 수 있겠다고 미리 생각한 것 같다. 반면 일본은 철저하게 준비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목숨 걸고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1세트에서 선수들이 좀 당황한다는 인상이었다. 맞다. 그런 게 좀 있었다. 일본 선수들은 1세트부터 콱 조여서 기선제압하겠다는 작전으로 들어온 것 같다. 거기에 당황했다.
한국은 대진운이 가장 안 좋은 팀이었다. 세계 1위부터 5위까지 다 만났다. 그러게 말이다. 당황했고,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어쨌든 잘했다.
미국은 중요한 순간이면 여지없이 데스티니 후커에게 공을 띄웠다. 세터가 당신을 좀 더 활용했으면 어땠을까? 감독의 작전이었나? 어떻게 보면 상대가 거의 나를 마크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블로킹도 두세 명이 같이 뜨니까 내가 부담을 느낀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 그런 걸 역이용해서 다른 사람한테 주면 블로킹이 한 명밖에 없기 때문에 공격을 수월하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세터가 경기운용을 한 것 같다. 보는 사람들은 좀 답답했을 수도 있다. 점수가 나면 상관없는데, 점수가 안 났을 때는…. 전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한테 좀 더 올렸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보는 사람 모두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김연경에게 공을 더 올렸으면. 항상 그렇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몸 상태가 좋으면 언니들한테 주문을 한다. 나한테 올려달라고. 일본이랑 할 때도 3세트부터 그렇게 얘기했다.
김사니, 이숙자 두 선수가 번갈아 세터로 나왔는데, 이숙자가 당신을 좀 더 잘 이용한다는 평이었다. 돌아와서 보니 세터 얘기가 많았다. 왜 안 바꿨냐, 무조건 이숙자에게 맡겼어야 하는데, 같은 얘기들. 그런데 나는 모르겠다. 누가 더 낫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주장은 김사니였지만, 코트 안에서 당신은 주장처럼 보였다. 그런 자리에서 얘기를 많이 해서 그렇게 보인 것 같다. 목소리도 크고, 액션도 크니까. “아아 이렇게 해서 해야지!” 뭐 이러니까. 하하. 승부욕이 좀 세다. 경기할 땐 선후배 없이 언니들한테 막말 할 정도로 몰입한다. 하고 싶은 말 다 하니까 말도 많아지고.
김형실 감독은 오히려 말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카메라 들어와서 그러셨나? 하하, 원래 말 많이 하신다. 혼잣말이 많긴 하지만. “아니 저것 좀 잡지, 저것도 못 잡냐….” 오히려 시합 때는 얘기해서 될 게 아니라는 생각이신 것 같다. 시합 전에 다 얘기하고, 시합할 때는 특별히 바꿔야 할 게 아니면, 편하게 경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다.
2006 독일 월드컵을 보면서, 박지성이 몇 번이나 주장으로 월드컵을 뛸 수 있을지 계산해 봤다. 김연경은 언제쯤 주장으로 올림픽에 나올 수 있을지 한번 손꼽아본다. 주장은 모르겠다. 부담이 더 생길 수도 있다. 한송이 선수도 스물여덟밖에 안 됐고, 언니들이 많다. 앞으로 3년, 5년 뒤까지 배구를 한다면 주장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설마 3년도 안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하려고는 하는데 몸이 돼야지. 부상만 없으면 당연히 한다.
올림픽에서 한국은 수비가 아쉬웠다. 당신은 수비가 좋은 편이지만, 동료들의 실수에 화나진 않았나? 화난다. 욕도 하고 별 얘기를 다 한다. 그런데 실수한 사람한테 너무 몰아붙이면 위축돼서 잘 못하는 것 같다. 좀 자제하려고 했다. 바꾸려고 노력 중이다. 속으론 똑바로 좀 하지, 했을 수도 있지만 겉으론 괜찮다고 응원해줬다.
다혈질인가? 경기할 때 특히 다혈질인 거 같다. 상대가 좀 건드리기만 해도 까칠해지고. 원래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용병 생활 하다 보니까 스타일 자체가 바뀌는 것 같다. 유럽 선수들은 자기 표현이 강하다. 아시아 선수들은 그런 거 보면서 깜짝깜짝 놀란다.
스포츠에서 표정을 드러낸다는 건 굉장히 불리할 수도 있는 일이다. 투수는 항상 마운드 위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하고, 복싱 선수들은 계체량 때부터 눈싸움을 한다. 그런데 당신은 오히려 표정을 드러냄으로써 경기장에서 존재감을 발휘한다.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는 것은 물론, 우리 팀 선수들을 독려하는 효과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략적인가? 그런가? 내 표정이 어떻지?
공을 보고 이글이글 타다가, 못했을 땐 두 팔 벌려 미안해하고, 화났을 땐 한 번 더 건드리기만 해보란 듯이 씰룩거리기도 한다. 몰랐나? 뭐, 알긴 알았는데,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여러모로 동료들을 독려하는 것 같긴 하다. 아무래도 내가 분위기를 많이 이끌다 보니, 기분이 안 좋으면 언니들이 왜 그러느냐, 웃으면서 해라, 이런 말도 많이 해준다.
큰 경기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실수는 뭘까? 실수는 모든 시합에서 다 한다. 그래도 최대한 안 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래도 서브 리시브 같은 경우엔 큰 경기에서 특히 조심한다. 리시브가 흔들리면 바로 점수가 나게 되고, 흐름을 깰 수 있다.
당신은 스파이크 서버로도 유명하다. 그래도 큰 경기, 중요한 순간엔 망설여지나?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아예 안 때리는 건 아니다. 수비 진영을 비롯한 상황을 살펴보면서, 어느 정도는 미스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리시브는 확실히 견고하게 해야 하지만, 큰 경기에서도 서브는 좀 강하게 때리는 게 중요하다.
가드 출신 농구 선수들이 갑자기 키가 자라면서 센터를 보게 되면, 드리블이나 볼 핸들링이 좋아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잔기술에 능한 경우가 있다. 배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리베로나 세터 출신 선수들이 키가 자라 공격수로 전환하면, 수비가 강해 약점이 거의 없다. 혹시…. 맞다. 어렸을 때 키가 작아서 세터를 봤다. 공격보다 리시브 연습을 많이 했고. 그래도 어려서부터 손발이 컸기 때문에, 키가 클 거라고 생각했다.
올림픽 기간 내내 김연경을 수식하는 말은 남녀노소 하나로 모였다. “멋있다.” 하하, 미치겠다. 그게 좀 이상하다. 예쁘다고 했으면 좋겠는데. 좀 웃기지 않나? 남자가 여자한테 멋있다고 하면.
다 큰 남자들이, 김연경 멋있다고 말하는 건 좀 재밌긴 하다. 재미있다. 그 정도까진 몰랐는데…. 싫진 않다. 웃기고 재미있는 거 같은데?
올림픽 끝나고 메달 대신 MVP를 받았다. 슬픈 마음이 앞섰다. 메달을 꼭 따고 싶었던 맘이 강했기 때문에…. MVP의 기쁨보다 메달을 놓친 아쉬움이 더 컸다.
올림픽 기간 동안 협회의 지원이 거의 없었다고 들었다. 준결승 당일까지 현지 지원금이 총 5백60만원. 그런데 출정식 비용으론 8천만원을 썼고, 코칭 스태프 역시 일본이나 타 팀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진짜 화 많이 났다.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지원만 있었으면 무조건 메달 땄다. 지금 한국 배구 대표팀엔 좋은 선수가 많다. 그런데 이용을 잘 못한다.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얘길 들어봐도 이렇게 지원이 안 좋은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다. 태국처럼 우리보다 실력이 뒤지는 국가도 지원이 충분하다.
여자 배구 대표팀을 위한 의료진조차 없었다는 게 사실인가? 태릉선수촌에서 나온 의료진만 있었다. 배구팀 의료진도 따라왔는데, 티오가 안 나왔다. 그래도 다른 나라는 빌리지 안에 다 들어왔는데 우리나라는 그게 안 됐다. 트레이너, 닥터 넷, 코치 둘 이렇게 왔는데 다 못 들어왔다. 밖에서 응원하고, 호텔에서 자고 그랬다. 말도 안 된다. 일본한테 지고 나서 완전히 열받아서 체육관 밖으로 나가는데, 거짓말 안 하고 일본 관계자가 1백 명쯤 와 있었다. 박수치고 난리가 났는데, 우리 관계자는 딱 두 명 왔다. 질 수밖에 없는 경기였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뭔가 너무 억울했다.
김연경만이 할 수 있는 얘기다. 어떤 책임감이 있나? 있는 것 같다. 한국 배구가 앞으로 더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화가 되어야 하는데, 너무 침체되어 있다. 그런데 안에만 있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선수들에게 얘기한다. 기회가 되면 어디든 나가라, 시합 뛰지 않아도 배울 게 있다고 말한다. 개선해야 할 부분을 개선해서 배구 인기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돌연변이의 시대라 말하고 싶다. 김연아, 박태환, 그리고 김연경. 뜻밖의 종목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나온다. 88년생이면, 배구의 전성기가 한참 지난 뒤에야 배구를 접했을 텐데, 어떻게 동기를 찾았나? 그냥 배구를 하면 재미있었다. 항상 꿈을 꿨다. 처음엔 청소년 대표를 해보고 싶었고, 다음엔 프로가 되고 싶었고, 대표팀, 해외 진출, 이런 순서로 목표를 잡았는데, 하나하나 이뤄나가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우상이 있었나? 누굴 동경하는 타입이 아니어서…. 특정 선수를 동경한다기보다, 선수들 각각의 장점을 봤던 것 같다. 이를테면 장윤희 선배님의 리시브가 좋으면 리시브를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도희 선배님에게서는 토스를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올림픽 끝나곤 좀 즐겼나? 운동선수의 봄은 짧다. 공항 들어왔을 때 취재진이 엄청 많았다. 팬 분들도 많이 오고. 좀 놀랐다. 지금도 길거리 다니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줘서 기분이 좋다. 그냥 좀 바쁘게 지냈다.
광고도 찍었나? 앞으로 좀 찍을 것 같다. 금전적인 부분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물론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부분이…. 좋은 게 많이 들어올 것 같긴 하다.
양학선 같은 선수를 보면 샘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신도 혼자라면 세계 1등인데. 금메달 딴 선수들은 다 세계 1등이니까. 음, 광고 찍을 거다, 그런 게 있다. 하하.
팀 스포츠라서, 혼자 잘해도 벽에 부딪히는 순간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나는 구기 종목이 정말 멋진 것 같다. 단체 생활도 좋고. 개인 종목은 외로울 것 같다. 다른 시합은 몰라도 올림픽에선 꼭 메달 따고 싶다. 이제 정말 꿈, 내 꿈 자체가 올림픽 메달이다.
지난해 소속팀 페네르바체가 정규 리그 무패 우승을 거뒀다. 유럽 최강팀들이 겨루는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우승했다. MVP는 수도 없이 받았다. 프로에선 이제 다 이뤘나? 작년에 1년 뛰었고, 반짝해서 MVP도 타고 우승도 했지만 아직까지 세계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꾸준히 해서 선수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선수가 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 배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많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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