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와의 올림픽 최종 예선 3차전을 치른 다음 날 이근호를 만났다. 전날 한국은 이겼지만 그는 만족스럽지 않아했다.
어젠 푹 잤겠어요. 한숨도 못 잤어요. 헤딩슛 못 넣은 게 눈만 감으면 생각 나서.
골을 넣어야 잠을 잘 자겠어요. 그런 날은 골 넣은 장면들이 떠올라요.
당신은 지금 대한민국 언론이 가장 주목하는 선수예요. 흔히 ‘띄운다’는 표현을 쓰죠. 그만큼의 주목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나요? 운동 선수는 팬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 때문에 언론이랑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어요. 띄워주는 거 물론 좋죠. 그런데 한순간에 띄우고, 한두 경기 못하면 바로 비난을 하는 게 아쉽죠.
띄우면 한쪽에선 과대평가라는 말이 나오죠. 언론은 다들 그럴싸하게 꾸미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누군가 주목받기 시작하면 무조건 과대 평가 받는 거예요. 다들 실제보다 더 잘하는 걸로 그려지니까. 부담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죠.
당신 역시 과대평가된 선수겠네요? …, 그렇다고 생각해요. 작년하고 비교해서 너무 다르게 평가들을 해주시잖아요.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하는 언론도 있고.
말도 안 되는 비교는 어떤 거죠? 세계적인 선수들, 지성이 형 같은 경우도 그 중 하나죠. 아직 배우는 단계인 저를 형하고 비교해준 건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전 아직 그렇게 대단한 선수가 아니잖아요. 제가 민망할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어떻겠어요?
박주영과는 포지션도 비슷하고 둘 다 언론과 팬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죠. 박주영의 부진이 언론의 지나친 관심 때문일까요? 전 그게 컸다고 봐요. 주영이는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몇 경기 잘한다고 띄우고 몇 경기 못한다고 죽인 거잖아요. 주영이가 경기에 안 나가도 기사가 나왔는데, 그때 정작 뛴 선수들 혹은 주목받아야 하는 다른 선수들에 관한 것보다 주영이 얘기가 더 많이 나왔어요.
네티즌 눈치를 봐야 하는 세상이 됐어요. 그들 중 일부는 잘해도 비난을 해요. 선수라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옳을까요? 가끔은 화가 나지만, 장단점이 있는 거 같아요. 선수는 언론의 관심과 팬들의 사랑을 받아야 행복을 느끼는 존재잖아요. 감수해야 하는 거죠. 관심에 대한 무게랄까, 그런 팬들마저 없다면 더 외롭지 않을까….
앞으로 한 두 경기만 부진하면 네티즌 중 일부는 당신에게도 ‘거품’이라고 할 거예요. 지금도 이미 그래요.
어제 경기에선 수비수 앞에서 자꾸만 멈칫거리는 것처럼 보였어요. 당신의 장점은 역동적이고 당돌한 플레이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까요? 게임 전날부터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주고 ‘이근호가 돌아왔다’뭐 이런 기사를 써주시니까,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해야 할 것만 같았죠.
경고 누적 때문에 휴식 기간이 있었잖아요. 경기 전날 인터뷰 때, 많이 뛰었던 선수들 몫까지 해내겠단 말을 했는데, 그런 말들도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표현 아니었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인터뷰하고 후회했어요. 할 때는 몰랐는데 하고 나서 인터뷰 기사를 봤더니 그렇게 나왔더라고요. 내가 정말 그만큼 뛸 수 있는 건지 확신이 잘 안 갔어요. 애들(다른 선수)도 농담으로 “네 몫 제대로 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남들 몫까지 뛰려고”이런 말을 하는데 좀 멍했어요. 이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들고.
주목받는 것도 괴로운 일이네요. 모두가 당신을 보고 있으니 작은 실수도 잘 털어내지 못할 것 같아요. 어제의 경우, 예전 같았으면 그럭저럭 뛰었다는 평가를 받았을 거예요. 경기 끝나고 나서 믹스 존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 분들이 다들, 기대에 못 미쳤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기대치가 얼마나 높아진 걸까, 조금 서늘했어요.
김승용이 넣은 헤딩골, 백지훈의 어시스트였지만, 백지훈에게 패스한 건 당신이었어요. 수비수 두 명을 유인했을 때 뒤에 백지훈이 노마크였다는 걸 알았어요? 지훈이 형이 뒤에서 소리를 질렀어요. 그때 저한테 두 명이 따라붙었으니까 어딘가 한 명이 빌 거라는 걸 알았죠. 무리해서 (크로스) 올리기보다는 형한테 넘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당신이 공을 향해 돌진할 땐 활 시위를 막 떠나온 활 같아요. 한국 축구에 없는 적극성과 대담함 그리고 싱싱함이 느껴져요. 욕심이 많다는 면에서 이천수와 비슷하지만 더 간결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전해져요. 천수 형은 테크닉이 정말 뛰어나요. 머리도 좋고요. 이건 정말 같이 뛰어봐야 알아요. 제가 상대해본 K 리그 선수 중에 단연 최고는 천수 형이에요. 저는 저돌적인 거지 섬세하진 않거든요.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천수 형한텐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는 뭔가가 있어요.
현재 올림픽 대표팀에서 공격수 자리는 무한 경쟁 체제예요. 박주영 선수도 곧 돌아올 거고. 그런데 이런 상황이 한창 잘 나가는 당신에겐 남 얘기로 들릴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누가 들어오든 내 한 자리 정도는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원래부터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에요, 아니면 최근에 부쩍 그런 거예요?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은 뭔가 더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컨디션도 좋고 K 리그에서도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어제는 별로였지만.
천당과 지옥을 다 갔다 왔잖아요. 2군에도 가봤고 지금은 스타가 되었죠. 무엇을 느꼈나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기대주였거든요. 근데 프로에 와서 2군에서조차 경기에 못 나갔어요. 너무 힘들어서 대구로 이적할 때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기회마저 놓치면 끝이라고. 지금 저한테 흔히들 잘 나간다고 하지만 방심을 못 해요. 그때 기억이 있으니까, 죽어도 그때처럼 되긴 싫으니까. 저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많이 힘들어해서, 특히 부모님이…. 지금은 너무 좋아하시는데, 다시 그때처럼 되기 싫어요.
운동량이 많지만 가끔씩은 지나치게 개인 플레이로 보일 때가 있어요. 지난번에 아시안 컵 가기 전에 우즈벡이랑 경기 했잖아요. 처음 성인 대표팀에 들어간 거라서 형들하고 발을 맞춰 본 적이 없었어요. 혼자만 겉도는 느낌을 받았어요. 의욕만 너무 앞섰고.
한국의 공격수들은 하나같이 결정적인 골 찬스에서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 왔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선 당신의 그런 단점은 장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 특성이 잘 살아나려면 오히려 동료를 이용하는 플레이에 눈을 떠야 할 것 같아요.
당신 포지션에서 당신보다 잘하는 선수가 누가 있죠? 많죠. 제가 요즘 정말 본받고 싶은 선수는 (염)기훈이 형이요. 볼을 가지고 이동할 때의 컨트롤 능력, 수비수를 등지고 있을 때의 움직임 같은 것들. 저는 치고 나가는 것만 잘해요.
측면 공격수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대부분의 움직임이 운동장 외각에서 이루어지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중앙으로 들어가려면 시야가 넓어야 하잖아요. 지성이 형처럼 유연하기도 해야 하고. 아, 첫 번째 볼 터치도 중요해요. 전 아직 그런 게 잘 안 돼요.
다른 나라 선수 중에서 닮고 싶은 선수는 누구죠? 리오넬 메시요. 볼을 정말 예쁘게 차요. 만약 다시 태어나서 축구 하면 메시처럼 차고 싶은데. 한 명 더 있어요.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 공격적이고 빨라서 저랑 좀 비슷한 유형인 것도 같고. 그런데 가장 큰 차이는 이동할 때의 볼 컨트롤 능력이에요. 뺏어올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리복하고 계약을 맺었죠? 원래는 푸마가 용품 후원을 했잖아요. 리복이란 브랜드가 축구로선 아직까진 잘 알려지지 않았잖아요. 처음 제의가 들어왔을 때 리복 측에서 같이 성장해 보자는 얘기를 했어요. 그 말이 좋았어요.
아테네 올림픽 때 선수들도 화려했지만 이번 선수들도 못지않다고 생각해요. 김승용, 백지훈, 신영록, 물론 당신까지. 이 대단한 선수들 중에 당신을 놀라 자빠지게 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선수가 있나요? 없으면 없다고 해도 돼요. 배우고 싶은 선수는 있어요. 주영이에요. 지금까지 우리나라 공격수들하곤 다른 스타일의 공격수라고 생각해요. 볼 터치가 간결하고 슈팅 타이밍이 한국 선수 같지 않게 엄청 빨라요. 이동하면서 볼을 다루는 움직임도 유연하고요. 사실 한국 선수들은 좀 투박하잖아요. 근래 들어 유심히 본 선수는 이청용이에요. 어린데 여유가 넘치고 기술이 정말 좋아요.
지난번 아테네 올림픽 대표와 이번 베이징 올림픽 대표가 지금 한국 축구의 현재예요. 어느 쪽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나요? 부상 선수들이 돌아오면 지난번하고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천수 형, 재진이 형 같은 형들은 지금 성인 국가대표의 핵심 선수가 됐잖아요. 냉정하게 비교를 못 하겠어요. 4강에 가면 결과로 인정받겠죠.
목표가 4강인가 봐요? 3위요. 지난번에 형들이 8강에 갔으니까 우리는 더 잘해야죠.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다고 가정하고, 8강에 갔다고 하죠. 경기 종료 5분 전이에요. 3대0으로 지고 있어요. 포기하겠죠? 좀 많이 힘들죠. 끝나기 5분 전이라면 솔직히 뒤집기보다는 한 골이라도 만회하겠다는 심정일 것 같아요.
사람들은 늘 기적을 원해요. 선수들도 마찬가지예요. 어쩌면 그분들보다 선수들이 더 절실할지도 몰라요. 그런 것도 조금은 알아주면 좋겠어요.
- 에디터
- 이우성
- 포토그래퍼
- 심재주
- 스탭
- 메이크업 / 오미영, 스타일리스트/서수경
- 브랜드
- 홀릭스, 리복, 오뜨 바이 쿤, 엠비오, 지방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