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나, 여기 있어요

2008.10.01GQ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시안컵 첫 경기를 하던 날, 백지훈은 구단에서 팀 훈련을 한후, <GQ>와 인터뷰를 가졌다.

한 축구 잡지가 주최한 시상식에 참가했을 때였다. 상을 받을 몇 명의 축구 스타들이 초대됐다. 그들 중 일부는 상만 받고 가버렸다. 바쁘신 선수들을 보기 위해 모인 약 2백 명의 팬들은 식장 문으로 날렵하게 사라지는 그들을 발견하곤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그날 백지훈은 가장 늦게까지 남아 팬들과 다트놀이까지 하고 갔다. 백지훈과 한 조를 이룬 파트너가 하필 남자 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안컵에 승선하지 못했네요. 오늘 백지훈이 온다니까 스태프 중 한 명이“어, 여기 어떻게 오지?”하던데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많은 걸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선택을 안 해주셔서 실망을 했어요. 앞으로 좋은 기회들이 많겠죠.

벤치에 앉아있는 선수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백지훈이라는 선수는 늘‘주전’으로 살아왔잖아요. 선수라면 누구나 게임을 뛰고 싶어하는데 지금은 가만히 보는 입장이니까 뭔가 말로 할 수 없는 아쉬움 같은 게 있죠.

안정환 선수는 어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뽑지 않은 베어백이 옳다고 말했어요. 당신도 그렇게 말할 건가요? 전 그렇게 정환이 형처럼 딱 잘라서 저를 안 뽑은 게 잘했다고는 못하겠어요. 못하겠다는 것보단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5월 초에 컨디션이 좀 안 좋았지만 계속 좋아졌고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했었어요. 나름대로 기대도 많이 했었고. 그런데 아시안컵에 못 갔다는 거는 아쉬운 게 없다고는 못하죠.

최종적으로 오장은 선수가 뽑힌 건 당신보다 수비력이 좋기 때문일까요? 그냥 제가 아직까지 감독님한테 신뢰를 많이 못 준 거라고 생각해요. 장은이와 저는 올림픽 팀에서 같이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감독님이 동시에 봐왔어요. 장은이가 더 신뢰를 얻은 거겠죠.

선수 선발에 있어서 의아한 부분이 있긴 있잖아요. 일테면 이호가 선발된 것도, 소속팀에서 활약하지 못한 선수는 뽑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말을 번복한 셈이고요. 선발 직전 소속팀에서의 활약도를 따지자면 오장은 선수보다 당신이 뛰어났고요. 그렇지만 선택은 감독님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제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죠. 제가 장은이보다 못할 건 없어요. 그러나 감독님은 이미 장은이를 뽑으셨잖아요.

우즈베키스탄, 바레인, 시리아와 올림픽 최종 예선을 치르게 되는데 껄끄러운 팀이 있긴 있나요? 다 한 수 아래 아니었나요? 바레인하곤 방콕 아시안게임 때 만났었는데 그때 저희는 솔직히 바레인 같은 팀 별로 안중에 없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잘했어요. 올림픽 때 이런 팀 만나면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만난 거예요.

언론에선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일본을 안 만난 것만으로도 운 좋은 거라고 하던데, 전 우리나라가 훨씬 잘한다고 믿었어요. 아닌가요? 요즘 아시아 축구는 수준 차이가 별로 안 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차라리 강팀하고 맞붙어서 올라가는 게 속 편할 것 같았어요. 우리 조 나라들이 이들에 비해서 약팀인 건 맞아요.

개인적으로 이번 올림픽팀에 대한 기대가 커요. 어느 때보다 수비가 안정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난, 최종 예선 통과하는 건 당연하고 본선에서 우승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군대랑도 관련이 있는 대회니까 다들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요?

꼭 그런 게 있어야만 열심히 하나요? 동기 부여가 확실하다는 거예요. 잘하면 메달을 딸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금메달을 따면 좋겠지만 동메달까진 어떻게라도 해봐야죠.

우리나라 축구가 그 정도 수준이 된다고 생각해요? 네.

한국 축구는 왜 큰 대회에서 번번이 본선 탈락하거나 16강 진출에 실패하는 거죠? 위기에서 극복을 못하는 거 같아요. 이번에 20세 이하 월드컵도 게임은 잘하고 좋았는데 막상 이길 수 있는 시합을 놓쳤어요.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던 거잖아요. 경기는 잘 했는데 그 한 방이 왜 안 나온 걸까요? 아직까진 저희가 국제 경기에서 자신감이 떨어져요. 실수하면 곧 주눅이 들어요.

한국 축구는 자꾸 외곽으로 공을 돌려요. 중앙으로 파고드는 유형의 선수가 없어요. 수비수를 제치고 직접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패스를 하죠. 양보의 미덕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 같지 않아요? 팀마다 감독님의 스타일이 있으니까.

물론 감독의 스타일이 있지만, 선수들의 스타일도 있잖아요? 선수도 스타일이 있긴 있죠. 그렇지만 저희는 감독님들이 구사하는 방식을 따라야 하는 거고.

권위주의적인 사고가 창의적인 플레이를 방해하는 건 아닌가요? 선수들의 창의력을 살려주는 것도 감독의 일이잖아요. 음, 아무래도 외국과는 다르게 저희는 아직 틀에 박힌 축구를 하긴 하죠. 저만해도 어릴 때 수비수를 제치고 싶었는데, 뺏기면 감독님한테 불려서 한 대 맞을까 걱정되서 시키는대로만 하고 그랬죠.

한국 축구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해요? 비교할 만한 나라가 있을까요? 나라랑 비교한다기보다는, 지금 많이 올라온 것 같아요. 세계 정상 수준까지는 멀었지만.

시급하게 보완해야 하는 건 뭔가요? 세밀해야 할 것 같아요. 경기를 잘해놓고도 마무리가 안 돼서 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상대는 우리한테 밀리고도 찬스에 골을 넣어서 이기고.

가장 닮고 싶은 선수는 누군가요? 지단을 가장 존경하고 좋아해요.

구체적으로 뭐가요? 미드필더가 가져야 할 모든 능력을 갖춘 것 같아요. 패싱력, 드리블, 슛팅력, 다 완벽하게.

다음 주에 미국에서 열리는 월드시리즈 오브 풋볼(World Series of Football 2007)에 수원 삼성이 나가죠. 첼시와 맞붙을 텐데 누가 가장 보고 싶나요? 지난 번 가나랑 시합했을 때 에시앙하는 거 보고 이렇게 볼을 차는 선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었어요.

에시앙은 당신과 뭐가 어떻게 다른 거예요? 음, 볼 트래핑 하나도 저희는 그러니까 제가 이 볼은 분명히 뺏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를 제치고 나오더라고요. 한국선수들 같았으면 커트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저로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죠.

팬 클럽 회원 같아요. 그 정도까진 아니고, 세계적인 선수들이니까 맞붙어보면서 얼마나 차이가 나나 확인해보고 싶은 거죠. 사인이 받고 싶은 건 아니에요.

지금 한국 최고의 미드필더는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같은 편에 있는 (김)남일이 형이에요. 함께 볼 차는 게 많은 도움이 돼요.

일테면 김남일의 어떤 플레이요? 미드필드에서 상대 흐름을 끊고 역습으로 전개하는 과정이 날카로워요. 남일이 형은 공을 뺏으면 저쪽을 봐요.

구단이 나이 든 선수에게 인색한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거니까 실력이 안되면 과거의 업적과 상관없이 내쳐도 되나요? 쉽지 않은 문제예요. 그러나 은퇴하는 순간까지 구단은 팀을 위해 헌신한 형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해요. 예전만큼 잘하지 못해도. 팬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요.

그걸 기다려주지 못하는 팬들도 많아요. 성적이 안 좋으면 비난을 하죠. 어려운 문제 같아요. 조금씩 달라지긴 달라져야 하는데.

구단이 선수들의 에이전트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리그의 무대가 활성화되고 글로벌해지려면 에이전트들의 활약은 중요한 거잖아요. 그리고 에이전트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건 곧 선수들을 존중하지 않는 거랑 같은 거 아닌가요? 구단들도 요즘은 달라졌어요. 파트너 의식을 갖고 의논을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그라운드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어본 적 있죠? 그때 무슨 생각이 드나요? 분하고 억울하죠. 이것만 이겼으면 더 올라갈 수 있는데, 5대0 지면 눈물도 안 나겠지만, 아쉽게 졌을 땐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하고, 경기를 다시 할 순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죠.

가장 분하고 가장 안타까웠던 때는 언제예요? 2006 월드컵에서 스위스랑 했을 때요. 이기면 16강에 올라갈 수 있는데 심판이 우리 쪽만 파울 분 게 억울했어요.

그렇게 졌을 땐 로커룸에 들어가서 선수들끼리 무슨 말을 하나요? 아무 말 안 해요. 졌을 땐 서로 말이 없죠.

감독님이 들어오나요? 네. 들어와서 잘했다고 위로해주는데 선수들은, 아니 저는 그냥 눈물이 나요.

왜 또 울려고 해요?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오르나요? 아니에요. 이번 올림픽 땐, 아니 앞으론 무슨 경기든 끝나고 주저앉는 거 안 하고 싶어요.

    에디터
    이우성
    포토그래퍼
    윤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