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성시백은 차가운 얼굴의 소년이었다. 그런 그도 올림픽 금메달만큼은 꼭 목에 걸고 싶어 했다.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았다.
오늘 일간지에서도 꽤 많이 온 것 같다. 이런 날은 기분이 어떤가?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확실히 올림픽이 큰 시합이구나, 많은 사람이 집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담스러운가? 아니면 즐거운가? 부담스럽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 아무 생각 없다.
쇼트트랙도 그렇게 무덤덤하게 시작했나? 초등학교 때 몸이 좀 약해서 처음엔 야구를 했다.그런데 안 맞았다. 그러다 목동에서 스케이트를 탔는데 처음치고 잘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선수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다 보니 적성에 맞는 것 같아서 계속하게 됐다.
그래도 예를 들어 동계 스포츠 중에서 봅슬레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기분이 좀 다를 것 같다. 쇼트트랙은 그런 종목들보다는 가질 수 있는 희망의 단계가 높지 않나? 그건 그렇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시켜서라는 이유가 컸는데, 거기에도 많은 사람이 국가대표만 되면 올림픽 메달은 문제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렸을 때도 그런 기대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성적이 잘 나왔다. 슬럼프도 있긴 했지만.
실제로 기록의 편차가 크다. 몇 관 왕을 하거나 아예 탈락하거나. 기분파인가? 심리적인 부분이 좀 약한 것 같다. 쇼트트랙은 육상처럼 자기 레인이 있는 종목이 아니다. 계속 부딪치고 경쟁한다. 거기서 오는 부담감 때문에 성적이 안 좋았던 적이 많았다.
겉으로 봤을 땐 굉장히 이성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또 감정에는 많이 휘둘린다. 최대한 이성적이고 냉정해 보이려고 노력을 한다. 또 그런 자세로 시합에 들어가면 잘되고.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5관왕 했을 때 인터뷰를 봤다. 오늘도 그런 인터뷰 많이 했을 텐데, “좋은 성적을 내서 국민들의 성원에 보답하고…” 뭐 이런 거. 이상하지 않나? 개인의 직업이기도 한데, 특히 국가대표가 유일한 길인 종목은 사실 국가대표가 직업 아닌가. 그런 멘트가 정석이니까. 국가대표라는 말 그대로 나라를 대표한다는 뜻 아닌가. 그래서 더 부담이 큰 것 같다. 그래서 경기를 하고 나서 인터뷰를 하면 계속 그런 말이 나온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그런 말을 하게 된다? 서로 좋지 않나. 나라를 대표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직업이기도 하니까. 말하고 나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하기도 하지만….
올림픽 대표가 되긴 했지만 이제 스물네 살이다. 쇼트트랙은 20대 중반이 넘으면 내리막이라고 하는데 다른 종목에 비해서 너무 짧은 것 아닌가? 체력 소모가 많아서인 것 같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만 해도 체력 위주의 훈련이기 때문에 일단 힘들다.그래서 흥미가 별로 없다, 어렸을 때는.
재미있어서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인가? 그렇다. 그리고 지금은 실업팀이 생겼지만 그전엔 없었다. 그래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않는 한 미래가 없다. 그래서 일찍 그만두기도 하고.
세계선수권 대회나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몇 관 왕하는 것보다 올림픽 한 번이 더 큰가? 세계선수권은 매년 있다. 그래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는다. 유니버시아드 대회는 2년마다 있지만… 나가면 항상 한국이 메달을 다 갖고 오니까 그렇게 감흥은 없는 것 같다.
대중적으로? 대중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하면서 즐거움을 느낀 적은 없나? ‘쇼트트랙은 이래서 재밌지’ 라는 순간. 메달 딸 때 말고. 기록 경기는 아니지만 속도가 꽤 있는 편이다. 빠른 걸 싫어하는 남자는 없지 않나.
싫어한다. 나는 좋다. 운전을 해도 빠른 게 좋고. 그런 데서 흥미를 느낀다. 달리는 순간.
대중적으로 관심이 많은 스포츠는 거기에 대한 철학도 많이 나온다. 쇼트트랙은 아무래도 그런 걸 찾아보기 힘든데, 그래서 당신이 갖고 있는 생각이 궁금하다. 쇼트트랙은 어떤 스포츠인가? 굉장히 치열한 스포츠다. 격투 종목도 치열하긴 하지만 여러 명의 선수가 그정도의 속도에서 경쟁한다는 건 위험한 일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도 다들 과감하게 끼어들고 추월하는 걸 보면 확실히 치열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에는 악명 높은 선수가 많다. 미국의 오노나 중국의 리자준 등. 왜 한국엔 그런 선수가 없나? 말한 것처럼 굉장히 치열하고 판정도 애매한데. 왜 항상 피해만 보나? 착한 게 전통인가? 전통은 아니다. 한국에도 그런 선수가 있긴 하다. 예를 들면 좀 실력이 나은 선수가 선두에 서고 좀 처지는 선수가 두 번째에 서는 거다. 그렇게 두 번째 선수가 추월하려는 선수를, 쉽게 말하면 쳐 박는 거다. 그런 식으로 외국 선수들에게 악명 높았던 한국 선수가 있었다, 예전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요즘엔 그런 선수는 없다.
선수들 사이에서 저 선수는 좀 그렇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선수는 없나? 역시 오노 선수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실력이다. 당하면 뭐, 굉장히 억울하지만.
당신도 당했나? 많았다. 2002년에 오노가 동성이 형과 ‘그런 일’ 이 있었을 때 선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주관적인 거다. 줘도 되고 안 줘도 되고. 그런데 미국선수 1등시키고 싶어서 억지 쓴 것 아닌가. 오노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대표팀 들어가서 오노를 보니 굉장히 열심히 하고 또 잘했다. 그런데 그때는 그보다 성적이 아래였다. 내가 점점 성장해서 경계해야 될 상대가 되니 보이지 않는 반칙을 많이 사용했다.
그럼 어떡하나? 말도 잘 안 통하니 욕하기도 힘들고. 밖에서는 굉장히 친하게 지낸다. 그 선수 성격 자체가 이중적이다. 경기할 때와 밖에서 많이 다르다. 예전엔 내게 말도 안 걸었다. 그러다 실력이 올라가니 와서 친한 척을 한다. 그리고 시합 들어가면 또 반칙하고. 끝나고 나면 악수하러 오고. 그런 선수니 그냥 똑같이 맞춰준다. 한번은 큰 시합이었는데 오노 선수도 급했는지 좀 심하게 반칙을 하려고 했다. 화가 정말 많이 나서 끝나고 오노쪽으로 헬멧을 던졌다. 맞지는 않고 바로 옆에 떨어지긴 했지만. 그런데 나 같으면 그 상황에서 같이 던진다든지 반응을 했을 것 같다. 그는 태연하게 다음 시합을 준비하러 갔다.
이득이 되는 행동만 하는 타입인 것 같다. 그래서 더 민망했다. 뭔가 반응이 있어야 되는데.
세계적인 톱이 됐는데 전보다 견제도 훨씬 심할 것 같다. 대비는 없나? 대비는 뭐 딱히….
견제를 하는 타입은 아니지 않나? 받는 타입이지. 한 선수만 신경 쓰면 의외의 선수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 선수에게 꽂히지 않고 전부 다 보면서 게임을 한다는 정도.
장거리 경기에선 초반에 항상 뒤쪽으로 간다. 그것도 같은 맥락인가. 일단 뒤에 있으면 더 편하다. 선두가 제일 힘들고 뒤로 갈수록 덜 힘들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뒤로 가는 게 더 어려운 건가? 어려운 건 아닌데 눈치를 보다가 놓치면 앞에 가 있다.
그런 생각도 든다. 처음엔 다들 천천히 시작한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이니 스피드에 자신있으면 시작부터 제일 앞으로 치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예전에 김동성 선수가 그렇게 1등한 적도 있었고. 스피드나 체력이 그 정도로 차이가 나진 않는다. 그래서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압도적으로 빠르다면 그렇게 우승하는 게 제일 멋있다. 당연히.
당신은 500m에서 강하다. 전통적으로 한국 선수들이 약한 종목인데. 한국은 국제 시합에 나갈 때 선발전 등수로 종목을 고른다. 그런데 처음에 5등인가 6등으로 들어왔다. 그래서남은 게 500m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게 된 거다. 결승도 못 올라간 적이 많았는데 하다 보니 잘 맞았다. 그래서 이제는 먼저 종목을 고를 수 있는 데도 500m를 선택하게 된다.
역대 한국 선수 중에서는 채지훈 선수와 제일 비슷한 것 같다. 외모도 그렇고 스케이트 타는 스타일도 그렇고. 채지훈 선수를 아나?
모른다. 개인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경기를 봤으니까. 올림픽도 나오지 않았나. 학교 선배다. 중/고/대학교 다 같은 곳을 나왔다. 500m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지훈 선배가 유일하게 올림픽 500m에서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너는 내 후배기 때문에 500m에서 잘하면 더 좋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생각해보니 선배와 좀 비슷하긴 하다.
채지훈 선수는 얼굴에 미소가 많았는데 당신은 굉장히 무표정하다. 이기나 지나. 요즘 많이웃으려고 노력한다. 잘 안 된다.
생일이 2월 18일이다. 그런데 올림픽 쇼트트랙 경기는 2월 13일부터 시작된다. 2월17일에도 중요한 경기들이 있고. 생일을 어떻게 보낼지는 그날 결과에 달려 있을 것 같다.
어떨 것 같나? 큰 선물 하나 받았으면 좋겠다.
- 에디터
- 문성원
- 포토그래퍼
- 김종민
- 스탭
- 헤어&메이크업/염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