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카페에서 잔 와인을 팔기 시작했다. 간판이 너저분해서 관심도 없던 후진 카페였는데, 얼마 전 유리창에 안내문이 팔랑팔랑 붙었다. “무르익은 여름을 맞아 그라스 와인 판매 개시. 6000원.” 얼핏 보고 그리스 와인이라 읽어 잠시 흥분했으나, 생산지가 어디건 동네 카페에서 글라스 와인을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기뻤다. 친구가 예고 없이 들렀을 때,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간단하게 마시고 싶을 때, 동네에선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골목 끝에 반지르르한 위스키 바가 한 군데 있지만 그곳의 주인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인공 태닝 후유증으로 육포처럼 변한 가슴팍을 새처럼 부풀리면서 주류 리스트를 읊어대는 것도 못 견딜 노릇이지만, 마침내 받은 주문이 고작 하우스 와인 두 잔일 때 그가 보인 체념과 원망은 실로 놀라웠다. 멀리서 도사견 짖는 소리를 들은 탈옥수의 얼굴인들 그처럼 절망적일까. 주문이 끝나기도 전에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메뉴판을 낚아채 빛의 속도로 돌아선 그의 엉덩이에선 분노의 불꽃이 당장 솟구칠 것 같았다. 한편, 카페 주인은 구깃한 면 티셔츠에 주머니가 작은 카고 팬츠, 모카색 버켄스탁을 신은 통통한 남자였다. 끝이 고불고불한 약간 긴 머리를 연신 귀 뒤로 넘기면서 테이블을 정리하고 원두를 갈며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이건만 손님은 별로 없었다. 밖에선 몰랐는데 안에 들어가니 가게 뒤쪽으로 테라스 자리가 있어 거기 앉았다. 화이트 와인을 ‘그라스’로 한 잔 주문하고 가게를 둘러봤다. 후하게 쳐줘도 취향이 괜찮은 가게는 아니었지만 야외 테이블이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어려서부터 햇빛 아래 끝도 없이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특히 정수리가 쪼개질 것처럼 폭력적으로 뜨거운 한여름의 뙤약볕. 그래서 매년 여름을 지내고 나면 바다에 가지 않았어도 손등이며 어깨까지 주근깨가 생겼고 얼굴은 온통 붉었다. 곧 하얀 곰이 잔디를 밟는 것 같은 귀엽고도 둔한 움직임이 느껴지고, 카페 주인이 큰 잔에 넘치게 따른 화이트 와인과 올리브와 크림 치즈를 엉성하게 올린 크래커 두 개를 조심조심 가져왔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이 바람결에 종종종 뛰어다니는 걸 구경하면서 천천히 샤도네이를 마시는 동안, 젊은 엄마와 아기가 옆 테이블에 왔다. 엄마는 딸기 스무디를 마시고 딸은 나라별 “안녕하세요”가 적힌 퍼즐형 모노그램에서 놀았다. 분홍색 올인원을 입은 아기는 ‘헬로’를 밟고 일어서서 ‘봉주르’에 걸려 넘어졌다가 ‘오겡끼데스까’를 걷어찬 후 ‘부에노스 디아스’ 위에 장렬하게 이유식을 토했다. 이런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와인 한잔 마실 수 있는 게 새삼 좋아서 웃음이 다 났다. 마시던 잔을 들고 비틀비틀 걸어와서 제 잔에 술을 부어주고(더럽게) 원샷하라고 소리를 질러대고(시끄럽게) 다 마시면 그까짓 게 무슨 엄청난 노고인 것처럼 박수를 치는(남부끄럽게) 술자리가 싫다. 술자리는 싫고 술만 좋다. 그래서 술집보다는 레스토랑에서 주로 술을 마신다. 많이 마시는 날이 훨씬 많지만 가끔은 딱 한두 잔만 마시고 싶고, 뭘 먹을 마음은 전혀 없는 날도 있다. 그럴 때 잔 와인을 파는 카페는 아주 요긴하다. 빈 안주 접시를 멸망한 행성인 듯 쳐다보는 눈풀린 자도 없고 술김에 하는 마음에 없는 말 vs 마음에 담아둔 말 토너먼트도 없이, 나긋나긋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섞여 마시고 산뜻하게 귀가하는 홀가분한 기분. 며칠 전 밤, 갑자기 찾아온 친구와 늦게 들렀을 때 카페 주인은 미뤄두었던 컵 정리나 하겠다면서 닫으려던 문을 다시 열어줬다. 그날은 레드 와인을 두 잔 마셨다. 와인은 싱거운 맛이었지만 대화는 가볍지 않았다. 감정이 달라지는 건 당혹스럽지만, 그 마음은 정직하다. 심플하고 명확하게 이제 그만 ‘다른 사람’을 원하는 것뿐이다. 어떤 것에 대한 애정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9월 어느 날, 이제 여름은 완전히 끝났다고 느끼는 것처럼.
- 편집장
- 강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