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는 늘 이정재다.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 곧게 서 있다.
수염을 길렀습니다. 황동혁 감독님과 <오징어 게임>이란 넷플릭스 드라마를 찍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수염 분장을 한 캐릭터들이 제법 떠오르네요. 사극을 많이 했죠. 염라대왕을 연기하기도 했고요.
좋은 징조랄까, 그렇게 나온 작품들은 대부분 크게 흥행했어요. <도둑들>, <관상>, <암살>, <신과함께>. 그렇네요. 흥행에 관해선 전혀 감을 잡지 못해요. 예상이 맞은 적이 거의 없어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대개 이런 상황에선 어떤 생각이 많아지나요? 아무래도 관객들이 캐릭터를 좋아해줄까, 그게 주 관심사예요. 이정재가 저런 역할도 소화하는구나, 잘 어울린다, 이런 반응이 제일 좋죠.
영화는 추격자 레이(이정재)와 그가 쫓는 인남(황정민)의 사투를 그렸어요. 며칠 전 공개된 예고편은 어떻게 봤어요? 임팩트 있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장면들로 잘 편집된 것 같아요.
레이의 비주얼이 특히 강렬했어요. 목을 덮은 문신이나 흰색 로브 등. 직접 고민하고 제안했다고 들었어요. 여러 가지 콘셉트를 두고 상의를 꽤 했어요. 비주얼의 센 정도가 10단계까지 있다고 하면 9단계쯤 간 것 같아요. 과한 설정처럼 보이거나, 전체 호흡에 방해될까 봐 보통 6~7단계를 택하는데 이번에는 좀 더 세게 해보기로 했어요.
모험적인 선택을 자주 하는 편인가요? 개인적인 성향이기도 한데 도전을 해야 새로운 게 나와요. 안전한 쪽을 염두에 두면 결국 비슷비슷해져요.
새로운 시도의 타율은 어떤가요? 대체로 만족스럽나요? 즉흥적이었다면 나중에 아쉽거나 후회되는 게 분명 있을 테죠. 하지만 고민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한 뒤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드물어요.
예전 인터뷰에서 <도둑들>에서는 많이 발산했고, <신세계>가 쓸어 담는 연기였다면, <관상>은 불이 막 뿜어져 나오는 연기라고 했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의 연기는 어떤가요? 레이는 다소 복합적인 캐릭터예요. 추격하는 에너지의 분출은 있되 그 목적성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거든요. 표현을 절제하는 듯한 면도 없지 않아요.
이 영화에 임하게 된 목적은 뭔가요? 내가 맡은 캐릭터가 영화의 주제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하는지, 어떻게 해야 캐릭터의 표현과 주제의식이 잘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올곧이 전달될 수 있는가를 매 순간 고민하며 연기를 했어요. 이번에는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훨씬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액션 영화예요. 주제가 있긴 하지만 그보다 재미있고 오락적인 부분이 두드러져요.
예고편에도 실제 맞고 때리는 것처럼 타격감이 느껴지는 액션이 있었죠. 처음에는 액션이 많지 않았어요. 시나리오에는 “레이가 창고를 나와 숨을 헐떡인다” 정도로 상황을 표정으로 암시하는 식이었죠. 그런데 촬영을 위해 태국에 도착했을 때 감독님이 액션 장면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럽시다 했는데, 할 게 많았죠.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와 극장가 상황을 고려하면 개봉을 앞둔 심정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예전과는 느낌이 다른 게 사실이죠. 엄밀히 말하면 어렵기도 해요. “우리 영화 재미있게 봐 주세요”라는 이야기가 쉽게 나오지 않네요. 함부로 말하기 어렵지만 우리나라는 위기 상황에 잘 대응하고 있고, 사회 경제가 단계적으로 정상화되고 있어요. 그런 움직임 속에서 영화계도 재개를 해야겠죠. 무엇보다 하루빨리 상황이 나아졌으면 해요.
<신세계>가 재개봉하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은 출연작은 무엇인가요? <이재수의 난>이 생각나네요. 제주도 풍광을 공들여서 찍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곳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웠어요. 해가 쨍쨍해 자연광 촬영을 하려고 하면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계획을 바꿔 비 내리는 장면을 준비하면 다시 하늘이 맑게 개었어요. 하루에 날씨가 네 번이나 바뀌는 경험도 했어요. 그런 제주도의 날씨와 계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라 스크린으로 다시 보고 싶긴 해요.
극장에 가서 자신의 영화를 챙겨 보기도 하나요? 그게 참 쑥스럽더라고요. 영화가 슬슬 내려갈 즈음 극장에 가서 첫 회를 보기도 해요.
특별히 재미있게 본 작품은 뭔가요? 내가 나온 영화를 제대로 즐기면서 보긴 힘들어요. 아쉬운 부분이 먼저 보이고, 비슷한 장면을 연기하게 된다면 어떻게 준비해야겠다는 궁리를 하게 되니까요. 그나마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신과함께> 시리즈는 재미있게 즐기면서 봤던 것 같아요.
이정재에게 연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거의 삶이죠. 어느덧 30년을 바라보고 있어요. 인생의 반 이상을 연기를 하며 살았으니 내겐 삶이죠.
그렇게 오래 연기를 했지만 여전히 처음 겪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하나요? 물론이죠. 지금 찍고 있는 <오징어 게임>의 캐릭터가 그런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처음 접했을 땐 약간 가벼운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을수록 마냥 가볍지는 않더라고요. 촬영을 다섯 번쯤 하고 나니까 다시 캐릭터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직업적 특성이랄까, 배우들은 본능적인 기질이 발달되어 있어요. 처음 느낀 감정을 중요하게 여겨,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 계속 의심하고 확인하고 싶어 해요. 그리고 얼추 맞아요. 이번처럼 캐릭터의 처음 느낌과 연기했을 때의 차이가 큰 경험은 처음이에요.
그런 상황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나요? 재미죠. 엄청난 재미. 불확실성 속에서 밑도 끝도 없이 고민하고 새로운 뭔가를 찾다 보면 생각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돼요. 물론 난관에 부딪힐 때도 있어요. ‘괜히 여기까지 왔나?’ 그런 생각도 하고요.
나이가 들수록 주변에서는 알아서 잘하겠지, 하게 됩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유용한 조언 같은 게 있을까요? 그게 아쉽기도 해요. 젊은 시절 선배들에게 조언을 들을 기회가 많았지만 귀가 닫혀 있었던 것 같아요. 갑자기 귀가 확 열리고 눈이 번쩍 뜨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나 봐요. 천천히 보이고 들리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래도 그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들이 있겠죠.
과거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에는 얼마나 가까워진 것 같나요? 안성기 선배님이 롤 모델이에요. 모든 사람과 온화하게 잘 지내시고, 철두철미하게 개인적인 생활을 절제하면서 오랜 세월 자기 일에 집중하시는 모습을 다 본받고 싶어요. 그런데 내가 과연 선배님처럼 살아왔는지 돌아본다면, 그러지 못한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까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감사한 일이죠.
더 이루고 싶은 일이 있을까요? 아주 어릴 때부터 꿈이 크지 않았어요. 뭔가를 갖고 싶은 게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어머니께서도 왜 그렇게 욕심이 없냐고 말씀하실 정도였죠. 지금도 그래요. 뭘 더 이루고 싶은 욕구, 욕망은 크지 않아요.
그런 마음 없이 한 가지 일을 어떻게 30년 가까이 이어올 수 있었나요? 딱 하나, 내가 정말 열심히 했는지를 늘 고민해요. 오직 그것만 생각해요. 돈을 받고 연기를 하는 직업인으로서 일을 즐기는 것은 두 번째예요. 충실히 잘 해냈는지 계속 점검하고 고민하면서,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다음 작품에서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느낄 뿐이에요. 정답은 아닐 수 있지만, 하나하나 열심히 하다 보면 배우 생활을 조금 더 오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중압감이나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나요? 너무 잘하려고 애쓰는 강박 같은 게 있어요.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야 훨씬 더 자유로운 연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즐길 수 있어야죠.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죠? 그런 기대감이 있긴 해요. 오면 좋겠어요.
하루 중 마음이 마냥 즐거워지거나 여유를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식물을 키우는 게 유일한 취미예요. 나와 잘 맞아요. 집에 조그만 테라스가 있는데 오늘도 장미 넝쿨을 해가 잘 드는 곳으로 슬쩍 옮겨주고 나왔어요. 소소하지만 보람을 느끼는 일이죠. 동일한 환경에서 똑같이 신경을 써도 잘 자라는 친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친구가 있어요. 올해는 다 풍성해서 기분이 너무 좋아요. 정우성 씨가 가끔 우리 집에 오면 그것부터 보여줘요. 애들이 이만큼이나 자랐다고.
- 피쳐 에디터
- 김영재
- 포토그래퍼
- 홍장현
- 스타일리스트
- 황금남
- 헤어
- 태현 at Mizangwon by Taehyun
- 메이크업
- 하나 at Mizangwon by Taeh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