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한 이미지 사이로 한없이 투명한 결을 가진 배우 이태환.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그의 솔직한 이야기.
배우 이전에 모델로도 활동했죠? 벌써 10년 넘는 시간이 흘렀네요. 그땐 교복을 입고 촬영장에 갔어요. 어렸을 땐 낯가림이 심하고 주목받는 것에 공포증도 좀 있어서 현장에서 모든 걸 부딪히면서 배워나갔어요. 이쪽 일을 하면서 성격도 밝아지고 사람을 만나는 데 겁이 없어졌어요. AB형인데 지금은 오히려 O형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니까요. 능글맞아졌죠.
바르고 단정한 이미지 뒤에 의외로 엉뚱한 면도 많은가요? 네. 가끔 스스로 생각해도 만화 캐릭터 사오정 같을 때가 있어요. 편한 자리에서는 엉뚱한 모습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실없는 농담으로 사람들도 잘 웃겨요. 평상시에 여기저기 걸려서 잘 넘어지기도 하고요. 분명히 저기 테이블이 있으니까 피해 가야지 생각하면 이상하게 꼭 부딪치더라고요.
운동 신경이 굉장히 좋을 것 같은데. 운동을 좋아해서 몸을 열심히 키우던 시절이 있었죠.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제 나이보다 훨씬 성숙하게 봤어요. 그런 외모 때문에 20대 초반에도 나이가 꽤 있는 30대 역할을 연기했어요. 드라마 <돌아와요 아저씨>에서 조폭 역할을 맡았는데, 당시 제가 짧은 머리에 슈트를 입고 걸어 다니면 클러치 백에 금목걸이 하신 분들마저도 슬쩍 피해 가시더라고요. 그저 스마트폰으로 대본을 보느라 인상을 쓰면서 걸어갔을 뿐인데 말이죠. 지금 스물여섯인데 이제야 제 나이로 보인다고들 하더라고요.
최근 드라마 <우아한 친구들>에서는 극의 미스터리를 담당하는 골프 강사로 등장했어요. 등장 시간은 짧았지만 신스틸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주강산은 앞으로 이보다 더 센 역할은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악역이죠. 솔직히 많이 힘들었어요. 촬영하면서 긴장도 너무 많이 했고,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완전히 내려놓고 연기했던 것 같아요. 그동안 주로 누군가의 뒤에서 묵묵하게 바라보고 지켜주는 남자였다면, 이번엔 화내고 소리 지르는 연기가 많아서 힘들었어요. 사실 저는 아무리 화가 나도 잘 참는 성격이거든요.
화 자체를 잘 안 내는 성격이라는 인터뷰를 읽었어요. 뒤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침착하게 대놓고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이런 점들은 좀 고쳤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치고받고 싸운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관계라는 게 참 여전히 어려워요.
또래 친구들보다 빨리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조금 일찍이 깨우친 것도 있나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너무 애쓰려고 하지 않아요. 그럴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 신경을 쓰려고 해요. 누구든 만나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좋더라고요. 정말 안 맞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는 여기까지구나 단념하고 자연스럽게 인연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요. 그 사람이 틀린 게 아니라 나와 그저 다른 거니까 미련 없이 마음을 정리해요.
일상 가운데 소소한 행복은 뭔가요? 운동을 하고 땀을 쫙 빼고 나왔을 때 그 쾌감이 있어요. 오늘 하루 엄청 수고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저는 수다 떠는 걸 정말 좋아해요. 사람들하고 카페에 앉으면 3~4시간이 금방 지나가요. 친구들 만나서 소소한 이야기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아요.
경제적 독립을 일찍 한 편인가요?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면서 돈 모으는 재미를 어린 나이에 깨달았어요. 절약하는 법도 잘 터득해서 수입의 대부분을 차곡차곡 저축했어요. 부모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제 힘으로 대학교 등록금을 내고 싶어서 열심히 돈을 모았던 것 같아요.
평소에 어떤 항목에 돈을 많이 써요? 가족에게 가장 많이 쓰고, 그다음으로는 지인들에게 밥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아요. 옷도 좋아하고 쇼핑도 좋아하지만 사실 티셔츠는 소모품이라고 생각해서 몇 가지 옷을 돌려 입는 편이에요. 그런데 정작 쓸데없는 곳에 돈을 낭비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SNS에 뜨는 광고를 보면 주저 없이 돈을 써요. 호기심이 많아서 궁금한 게 생기면 그걸 사서 사용해봐야 직성이 풀리더라고요.
2013년 웹 드라마 <방과 후 복불복>으로 데뷔해서 쉬지 않고 작품을 해왔어요. 누군가 배우는 어떤 직업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고 싶어요? 어린 시절 제게 배우는 뭔가 신비로운 사람들 같았어요. 배우는 행복과 고통이 함께 공존하는 일 같아요. 여러 사람과 만나서 연기하며 제가 평생 경험하지 못할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낀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하지만 정답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분명히 스트레스를 받아요. 배우들은 완전한 프리랜서잖아요. 일이 있어도 괴롭고, 없으면 없는 대로 힘들어요. 고통이 따라오는 행복을 선택한 거나 다름없어요.
일이 주는 기쁨은 뭔가요? 내가 연기한 캐릭터와 대사를 누군가 공감해줬을 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었을 때 뿌듯해요.
하면 할수록 어려운 연기도 있나요? 표현하지 않는 연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감정을 숨기거나 그냥 묵묵하게 가만히 있는 연기가 제일 어려워요. 그런 잔잔한 연기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연기하면서 자신 있게 치고 나갈 때는 언제인가요? 애드리브를 좋아하고 성공 확률도 높아요. <터치>라는 드라마에서 철없고 천진난만한 아이돌 출신 배우를 연기한 적 있어요. 그때 매 신마다 애드리브를 준비해 갔어요. 나중에는 상대 배우도 스태프들도 다 제 애드리브를 기다리는 게 느껴졌어요. 함께 연기한 선배님들이 제가 준비한 걸 다 받아줘서 자신감이 좀 생겼던 것 같아요. 컷 사인이 떨어졌을 때 다 같이 깔깔깔 웃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촬영장에서 제가 친 대사가 유행어가 되기도 했어요.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유명 기획사에서 아이돌 제안을 받았다는 일화는 사실인가요? 방과 후 팝콘 치킨 사 먹으러 가는 길에 가수해볼 생각 없냐고 길거리에서 누가 따라온 적은 있어요. 한번은 이마트에서 엄마와 장을 보는데 아이돌 해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기도 했고요. 아마 그분들께서 저를 캐스팅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사실 몸이 엄청 뻣뻣해서 춤을 잘 못 추거든요.
노래 실력은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기가 막힙니다. 귀가 막힐 정도로(웃음). SG 워너비, 버즈, 먼데이 키즈 이런 파워 보컬리스트들의 굉장한 팬이었어요. 변성기 오기 전에는 ‘노원구의 김종국’으로 불렸는데. 미성과 진성을 섞어가며 마야 선배님의 ‘진달래꽃’을 부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확인해볼 길이 없네요. 얼마 전 데이트 코칭을 해주는 예능 <박장데소>에도 출연했어요. ‘연애 신생아’라는 별칭이 꽤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방송에서 보인 모습 그대로예요. 적극적으로 연애를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오히려 정말 소심해져요. 연애를 시작할 때 제일 겁이 많아요. 이런저런 생각도 많아지고요. 늘 상대방을 존중해주고, 질투보다는 이해하려고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서운함을 느끼더라고요. 20대가 끝나기 전에 직진만 하는 사랑을 저도 한번 해보고 싶네요.
살면서 가장 큰 용기를 냈던 순간은 언제예요?하고 싶은 일을 빨리 찾았던 것 같아요. 들어가고 싶은 학교를 스스로 찾았고, 수석으로 입학했어요.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학교를 빠지지 않고 3년 내내 개근했고요.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말처럼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큰 용기를 내서 제 인생을 스스로 바꾼 시기였어요.
누군가의 팬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해요. 완전히 다른 성향의 두 감독님을 좋아하는데, 이병헌 감독님과 유하 감독님의 팬이에요. 언젠가 누아르 영화를 꼭 해보고 싶어요.
좋아하는 누아르 영화는 뭔가요? <해바라기>요. 김래원 선배님이 지금 딱 제 나이인 스물여섯에 이 영화를 찍은 걸로 알고 있어요. 신을 이끌고 그런 리듬감과 박진감을 만들어냈다는 게 정말 대단해요. 열 번 이상 봐서 대사를 거의 다 외웠던 것 같아요. 스릴러나 공포 영화도 좋아해요. 귀신 나오는 영화도 무서워하지 않고 혼자서 잘 보곤 해요.
2020년을 떠올려보면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였나요? 아무래도 코로나 사태 때문에 혼자만의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면서 정신적으로 좀 더 편안한 시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과거의 나를 되돌아봤을 때 오히려 힘을 조금 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예전의 저는 벽을 단단하게 쳐놓고 자신을 가둬두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자유롭게 풀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애쓰지 말고 잘하려고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여주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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