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2010년부터 시행한 성인지 예산 제도는 이를 기준한다. ‘여성, 남성이 동등하게 예산을 수혜 받고 성차별을 개선하는 방향인가.’ 과연 그러했나.
일련의 성추행 사건 자체가 이미 최대치의 충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화두 뒤에 이어 나온 지질한 현실이 더 고통스러웠다. 박원순이 3선 시장으로 이룬 업적만 보는 시선은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고 내치면 그만이었지만, 그가 피의자인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시선에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할 말이 없었다. 피해자를 피해자라 부르지 못하는 수준도 처참했으나 누구 하나 박원순을 가해자로 지칭하지 않는 것도 허탈했다. “이 같은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단체장 비서실에 여직원을 없애라”고 지시한 김제시, “내 조직에서도 여자 간호사가 남자 의사 팬티를 챙겨준다”고 SNS에 적은 어느 의사, “데이트 강간으로 고소당했는데 무고로 맞고소하면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인터넷에 올리는 익명의 범죄자들. 자신의 잘못을 공개 고백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이 동시대 인류라는 사실이 비참했다.
이런 문제적 성의식을 개선하는 척도를 지칭하는 단어, 비교적 최근에야 널리 알려진 단어가 ‘성인지 감수성’이다. 영어로 ‘Gender Sensitivity’란 용어인데 학계에 따라 ‘감도’ 또는 ‘민감도’로 번역하기도 하는 ‘Sensitivity’란 단어를 왜 ‘감수성’으로 호칭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하드보일드한 현실 먼저 살피겠다.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이슈가 나 개인에게 중요한 진짜 이유는, 내가 현대 사회로 미루어 짐작할 때 퇴보와 변이를 거듭해 끔찍한 카오스로 추정되는 미래를 살아야만 하는 다음 세대를 자녀로 두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만연한 낮은 수준의 성인지 감수성을 감안한 채 적정 수준의 성인지 감수성을 장착한 한 사람으로 아이를 길러내야 하는 일은 한국인 부모에겐 숙명이다. 아직도 유아 보육기관의 만들기 시간에는 남자 어린이들은 넥타이 형태로 이미 오려진 종이를, 여자 어린이들은 핸드백 형태의 종이를 제공 받는다. 남자와 여자는 사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함께할 만한 일이 없고, 서로를 이성으로 느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 아래 결혼 놀이와 가족 역할극이 되풀이된다. 사회가 변할 거라는 기대치는 낮았으므로 나는 이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나는 아이에게 “남자애 같아”, “여자애 같아” 등의 표현은 지양하고 혹여 누군가 사용하면 고쳐주거나 최소한 동조하지 말아야 함과 그 이유를 항상 장황하게 설명한다. 나는 마트의 장난감이나 의류 판매대 위에 붙은 남아용, 여아용과 같은 표지판을 아이가 의식하지 않도록 보고도 못 본 척하고, 폭력적인 행위가 정당화되는 남아 타깃의 애니메이션은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도록 삭제하며, 여성에게 예쁘고 상냥할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동화책도 내 집엔 없다.
그럼에도 이런 방식이 평등한 젠더 의식을 심어줄지, 이런 교육이 옳은지, 나는 항상 불충분함을 느꼈다. 이것이 과연 성인지 감수성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늘 혼란스러웠다. 나도 모르는 새 아이에게 내 세대의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더하여 교육을 빙자해 강요하는 건 아닐까? 기준 없는 가르침을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숨 쉬듯 배어든 차별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말실수하지는 않을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이 사회의 젠더 방향성에 대한 불안감, 젠더 이슈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입장이 아무런 파급력을 갖지 못한다는 무력감은 나로 하여금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키워드를 살펴보게 만들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성인지 예산이라는 존재다. 성인지 예산은 성평등 추진이라는 목표 아래 2010년부터 국회예산처가 집행하고 있는 국비다. 국회예산정책처(nabo.go.kr)에서도 볼 수 있는 예산안 중 가장 최근 자료인 ‘2019~2020 예산안’을 보면 성인지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6조 이상 증액된 31조 8천억이다. 결코 적지 않다. 한국 사회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정부도 인식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예산이 계속 증액되는 만큼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사회로 가고 있다는 신뢰의 정비례 관계는 과연 구축되고 있는 것일까?
국가예산정책처는 여성에 대한 적극적 조치를 포함하는 사업에 성인지 예산이 사용된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 예산 수행 대상을 살펴보면 행정안전부에서 가져간 ‘몰래카메라 범죄 방지를 위한 정밀복합 탐지기 개발 예산(2019년 발표)’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몰카 범죄 증감률에 유의미한 영향을 줬는지 느낄 수 있는 지표는 전무하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여성중소기업을 지원하겠다는 명목으로 편성한 ‘전통시장 및 중소유통물류 기반조성 사업(2019년 발표)’은 전통시장과 상점가의 노후 시설 등을 개선하는 데만 1천2백17억 3천7백만원이 쓰였다. 여성가족부가 ‘성범죄자 신상공개 및 청소년성보호활동’을 명목으로 가져간 예산과 최근의 N번방 사건은 어떤 연유로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지 따져 묻고 싶다. 내 자식을 포함한 생물학적 남성이 통계청이 발표한 ‘성범죄 가해자 중 97퍼센트가 남성’이라는 수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교육, 여성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거나 피해 이후의 2차 가해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시스템, 가해자에 대해 납득할 만한 처벌이 이뤄지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기대를 성인지 예산에 거는 일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문고리에 영험한 것을 걸어두었으니 악귀가 오지 않을 거란 미신에 가까웠다.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인한 문제가 단지 심정적인 불만이었다면 적어도 희망이 사그라들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뿌리 깊은 성차별적 사고로부터 숙주를 키운 성범죄에 관련한 암묵적 편견은 매우 사적인 영역처럼 보이면서도 결국 사법 제도의 판결을 포함해 직장 문화와 승진 체계 등 매우 공적인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맥킨지앤드컴퍼니가 2019년에 발표한 ‘직장에서의 여성 Women in Work’ 연구는 여성의 승진이나 사회적 입지를 방해하는 성별 격차는 결국 국가 경제에 재정적인 악영향을 명백히 가져온다고 밝힌다. 성인지 감수성을 인식 차이이자 시대가 변하는 과정의 성장통쯤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얼마나 궁극적인 형태의 ‘눈 가리고 아웅’인가. 역으로 말하면, 남녀의 사회적 지위 격차가 큰 사회에서 남성 권력자와 그 위압에 의한 성범죄 문제가 별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들이 박원순과 안희정에 면죄부를 주는 것 자체가 국가적인 손실이자 퇴보라는 것이다. 해외 사례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빈정거린다. “걔네도 알고 보면 다 똑같아.’ 하지만 미국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2017~2018년에 성범죄로 기소된 의원 9명이 사임하거나 재선에 출마하지 못했고, 3명의 의원 후보가 모두 선거에서 패배했다. 하비 와인스타인은 60대 후반이란 나이를 고려할 때 사실상 종신형인 2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성적 학대와 강간 사건의 결과와 처벌은 성차별 또는 성범죄와 관련한 사회의 광범위한 문제를 국가가 해결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시험대가 아닐까.
이 글을 쓰면서 상당한 자기 검열을 거쳤다. 이 글이 항상 화가 나 있는 어떤 사람들을 또다시 도발하고, 가해자를 감싸고자 피해자를 저격하는 새로운 싸움판이 될까 봐 그랬다. 앞에 쓴 모든 글이 먹이가 되지 않도록 모두 지워버린다 해도 남기고 싶은 말은 성인지 감수성이 적정 수준에 도달해야 하는 대상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만약 그 수준에 미달된다면 뼈아프게 실패를 맞봐야 하고, 교육되어야 하고, 사고가 개조되어야 한다. 이 문장을 읽는 일이 불편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성인지 예산처가 도달해야 할 사용처이다. 글 / 이기영(프로젝트 매니저)
- 피쳐 에디터
- 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