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을 둘러싼 새로운 태도와 장면을 찾아나섰다.
Craftsmanship at 꽃술 kkotsul
우리 술을 둘러싼 가장 모던한 장면을 떠올리면 ‘꽃술’이란 이름이 첫 번째로 스친다. 용산구 원효로 낡은 주택을 개조한 이곳에는 한국 디자이너의 새로운 작업과 우리 술이 우아한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공간을 준비하면서 작가들의 작업실과 소규모 양조장을 찾아다녔는데 두 분야가 결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발효 과정을 거쳐 술이 나오는 것처럼 작가들 역시 어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점점 발전해나잖아요.” 잡지사 피처 에디터 출신인 이미혜 대표는 기획력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콘텐츠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다. 최근에 선보인 첫 기획 전시 타이틀은 <물 物의 정원>이다. 면과 선의 컬러풀한 변주를 즐길 수 있는 전산, 유쾌한 상상과 독특한 질감을 가진 스튜디오 학, 평면과 입체를 오가며 재치 있는 작업을 선보이는 티엘 등 오랜 시간 사물의 생김과 쓰임을 고민해온 디자이너들의 가구를 감각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다. 요리 스튜디오 구구모의 어여쁜 양갱을 안주 삼아 우리 술을 코스로도 맛볼 수 있는 곳. 지극히 현대적인 풍류가 그곳에 있다.
Cheese Matching at 현지날씨
우리 술과 음식의 매칭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한식 그 이상의 색다른 마리아주를 찾아나섰다. 문래동에서 우리 술 보틀 숍 현지날씨를 운영하는 한종진 대표에게 치즈와 마시기 좋은 술 추천을 부탁했다. “예산사과와인에서 생산하는 ‘추사 40’이라는 사과 증류주는 카망베르와 굉장히 잘 어울려요. 술에서 느껴지는 사과와 오크의 풍미는 치즈 특유의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과 잘 어우러지죠. ‘추사 40’은 달콤하고 감칠맛도 있는 술이라서 초콜릿 케이크와 먹어도 황홀한 맛을 느껴볼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말에 따르면 막걸리도 치즈와 좋은 조합을 이룬다. “꽃잠, 금정산성막걸리, 봇뜰막걸리, 희양산막걸리, 복순도가 손막걸리를 추천하고 싶어요. 치즈와 가볍게 마시기에 무난하죠.” 주로 산미가 도드라지는 술이 전반적으로 치즈와 잘 어울린다고 조언했다. “C막걸리, 술아핸드메이드, 맑은내일막걸리 등 산미 있는 막걸리는 기본적인 체다 치즈부터 브리 치즈까지 다양하게 잘 어울립니다.” 파티에 응용해보면 좋을 요즘식 막걸리 사용법.
Modernity at 농암종택
고택으로 여행을 떠나보면 알게 된다. 속세와 차단된 적막이야말로 고귀한 것이라는 걸. 안동 농암종택은 고택의 가치를 아는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경치를 즐기고 밤에 별을 보는 것이 전부인데, 여기에 술 한잔 곁들인다면 그 옛날 농암과 퇴계가 노닐던 풍류를 체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일엽편주의 브랜딩이 시작된 것 같아요.” 농암종택의 며느리 권잔디 씨의 말이다. “혼배주로 농암종택의 술을 처음 맛봤어요. 집밥처럼 슴슴하고 건강하며 다정한 맛이에요. 제사 때마다 어머니가 담근 술을 맛보며 이런 술은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했죠.” 그는 일엽편주를 “과거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재현하며 동시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의 매개”라고 생각한다. 술의 안과 밖 모두를 고민한다. 퇴계가 써준 ‘어부가’의 목판을 탁본해서 한지에 인쇄해 레이블을 제작했다. 맛과 멋 모두 모던함 그 자체다. 미쉐린 2스타 밍글스, 모수 서울을 비롯해 논현동의 리드미컬한 바 장생건강원, 삼청동의 말 탄 무사 등 서울의 은밀하고 근사한 공간에서 일엽편주의 흔적을 하나둘 발견해봐도 좋겠다.
Cute Glass at 고래 포차
자양골목시장 안에 숨어 있는 고래 포차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주당 문화’를 만들어 간다. 술을 사랑하고, 그것을 양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세계가 열리는 곳이랄까. 소정의 이용료가 있는 대신 하우스 막걸리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는 호방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다. 메뉴판을 펼쳐보면 막걸리부터 내추럴 와인까지 술의 경계가 흐릿하다. 터프한 냉장고에서 원하는 술을 취향과 주량에 맞게 직접 꺼내 마시며 술로 파도를 탈 수 있다. 키치한 테이블 위에서 떡볶이를 애피타이저로 먹고, 황동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와인 잔에 따라 마시는 장면은 귀엽고 새롭다. 술에 대한 그 어떤 격식도 편견도 허물어뜨리는 고래 포차만의 융합에서 호기로운 태도가 느껴진다. 이런 생각과 비슷한 결을 가진 젊고 힙한, 독 Dok 브루어리의 막걸리를 만날 수 있다. “독 막걸리는 전통주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새로운 지표를 제시하는 것 같아요. 와인 글라스에 막걸리를 따라 마시면 향이 더 풍부하게 느껴지죠. 무엇보다 기분이 좋잖아요.” 정보람 대표의 생각이다. 장어김밥, 간장 제 볶음, 가락국수로 이어지는 안주 가운데 화룡정점은 멜론과 수박. 늦은 밤까지 신나게 마실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Pink Pink at 술술상점
남산골한옥마을 근처 필동의 ‘예술통거리’에 우리 술 전문 보틀 숍 ‘술술상점’이 오픈했다. 외관만 봐서는 편의점이 떠오르는 귀엽고 단정한 분위기. 막걸리, 증류주, 약주, 청주, 한국 와인, 수제 맥주 등 다채로운 한국 술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다. 진열장과 냉장고를 훑는 것만으로도 우리 술의 다양성과 현주소를 재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익숙하고 낯선 한국 술의 신세계로 입문하기 좋은 공간이다. 운이 좋다면 새로 들어온 술을 시음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술술상점은 가볍고 산뜻한 태도를 지향한다. 집 앞 마트에서 먹고 마실 것을 구입하듯, 매장 한편에 놓인 하얀 바구니 안에 호기심 가는 술을 가득 담아 계산하는 시스템이다. 요즘 뜨는 핑크빛 우리 술 추천을 부탁했다. 문경시 특산물인 오미자로 만든 스파클링 막걸리 오희, 수유동에 위치한 독 Dok 브루어리의 석류막걸리, 영동이 포도로 만드는 달콤한 맛의 샤토미소 로제 스위트 등 바구니 한가득 싱그러운 술이 하나둘 담겼다. 바라만봐도 어여쁜 장면.
Urban Brewery at C 막걸리
구룡산이 보이는 개포동 도심 한복판. 회색 빌딩으로 들어가면 형형색색의 양조장이 등장한다. 21세기 동네 양조장 문화를 만들겠다는 어느 대치동 키즈의 대찬 도전. 오랜 해외 생활을 하며 구수한 그 맛이 그리워 집에서 막걸리를 빚기 시작한 것이 출발이었다. “막걸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보고 싶었어요. 하나의 문화로 접근하고 싶었죠.” 킥복싱 유단자인 최영은 대표는 술 빚는 일이 격투기보다 힘든 노동이라고 말한다. C 막거리는 컬러로 맛과 향을 연상할 수 있다. 당근, 레몬그라스의 이국적인 향기를 품은 옐로는 동남아 요리와 잘 어울린다. 비트루트로 빨간색 막걸리를 만들고, 케일과 개똥쑥으로 건강한 술을 만든다. 막걸리계의 샤블리라고 입소문을 타고 있는 시그니처 막걸리는 산미가 있어 식전주로 마셔도 좋고 치즈와 먹어도 색다르다. 최영은 대표는 “파격적인 향과 맛을 가진 막걸리”라고 솔직하게 소개한다. 금호동 금남정, 심야식당 켠, 이수 낯선한식붓다, 합정 지리, 압구정 막걸리는 살아있다 등 요즘 떠오르는 주점에서 매니악한 C 막걸리의 정수를 맛봐도 좋겠다.
New Wave Restaurant at 빛다리
광교 엘리웨이에 중요한 미식 지표가 생겼다. 맛있는 술과 음식으로 사람들의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어줄 공간 빛다리. 작년 금남방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정희 대표는 우연치 않게 한국 술에 빠졌다고 했다. “한국 술의 경우 온라인으로도 구매 가능한 것들이 좀 있어서 친구들과 놀면서 이것저것 마셔봤죠. 특히 내추럴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끌릴 만한 발효 향이나 산미가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프랑스와 이탈리아 요리, 한국 전통 장 문화를 섭렵한 박상필 셰프, 첫 만남에 직접 담근 전통주를 들고 나온 이대한 매니저가 합류하며 드림팀이 완성되었다. 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한국 술과 궁극의 마리아주를 찾아달라는 부탁에 이들은 테이블 가득 흥미로운 우리 술 지형도를 펼쳐 보였다. 상큼함과 감칠맛이 도는 고흥유자주에 곁들인 수제콩물과 토마토, 깔끔한 산도를 지닌 제주도 전통 약주 맑은바당에는 김과 톳을 이용해 만든 바다 내음 가득한 비빔면, 주정강화기법으로 만든 경성과하주에는 꽈리고추잡채와 달달한 과일 디저트를 매칭했다. 우리 술의 감도를 한층 섬세하게 끌어올렸다.
Transform at 코타티
“코타티 앞에서 만나.” 왜인지 낯선 섬 마을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같은 해방촌 언덕의 자그마한 젤라토 가게. 재스민 무화과, 구운 피스타치오, 허니라벤더 등 향기로운 맛 사이로 눈에 띄는 메뉴가 있다. 막걸리계의 ‘돔 페리뇽’이라 불리는 복순도가 손막걸리로 만든 젤라토. 순백색, 부드러운 질감, 코끝을 스치는 톡 쏘는 향. 애주가라면 단번에 빠질 수밖에 없는 묘한 맛의 젤라토를 맛본다. 대대로 내려온 레시피로 빚은 전통술이 재미있게 변주된 순간이다. 윤영심 대표가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가지 한국 술을 테이스팅 해봤는데 복순도가는 젊은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어요. 와인처럼 산미도 느껴지고 누룩 향도 은은하게 올라오는데, 약간의 탄산도 있어서 꼭 샴페인 같았죠.” 매주 일요일 저녁 7시가 되면 이곳은 칵테일 바로 은근하게 변한다. 위스키, 칵테일, 때때로 등장하는 와인을 버스 정류장 벤치처럼 나지막한 의자에 앉아 마신다. 취기가 슬슬 올라오면 복순도가 젤라토를 체이서 Chaser처럼 독한 술 뒤에 시원하게 머금어본다.
Home Brewing at 윤주당
남산 아래 술 빚는 주막 윤주당이 있다. 치즈단감자전, 막창순대, 호박찌개 등 호불호 없이 함박웃음 짓게 되는 알찬 메뉴에 잘 선별한 한국 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밤이 먹고 마시는 풍류의 시간이라면 낮에는 배움과 집중의 시간이 흐른다. 윤주당에서는 주말마다 술 빚는 클래스를 열고 있다. 수업이 시작되는 오후 3시, 밥 짓는 고소하고 달큰한 내음이 가득 찼다. “옛날엔 집집마다의 레시피로 술을 빚었어요. 오늘은 쌀, 물, 누룩 이렇게 기본적인 재료 3가지로 막걸리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한번 이 맛을 보게 되면 계속 술을 만들고 싶어질 거예요.” 윤나라 대표가 조곤조곤 말했다. 시루의 밥이 알맞게 익으면 넓은 판 위에 정성스럽게 주걱으로 펴서 식힌다. 그다음 누룩과 물을 넣고 섞어 리소토처럼 끈적끈적해질 때까지 어깨의 힘을 이용해 야무지게 비벼주면 된다. 청각, 시각, 촉각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술을 빚는 과정은 마치 테라피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것을 손으로 직접 만드는 몰입의 순간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단계 중 가장 고차원적인 방식의 진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 피쳐 에디터
- 김아름
- 포토그래퍼
- 홍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