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책 밖의 어른, 도정일

2014.04.18GQ

도정일은 기꺼이 ‘계몽주의자’라고 부르라고 한다. 다만 그는 책 읽어주는 계몽주의자를 넘어 책을 건네는 계몽주의자이고자 했다. 책 읽는 사회 만들기 운동을 일으키고 전국 11개 기적의 도서관 건립을 주도했다. “10년이 날아가 버렸다”고 했지만, 경제 살리기만이 교훈인 사회에서 그의 낭비는 이곳의 품위를 떠받치는 부력이었다. 얼마 전에 나온 도정일 문학선 첫 번째 권의 제목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다.

1994년에 출간된 문학 평론집이자 산문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서, 원고를 다 쓰고 1년 동안 미루다가 이제야 서문을 쓴다고 밝혔습니다. 얼마 전 나온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의 서문에서도 서문 쓰기의 괴로움을 토로했는데요, 워낙 글 쓰는 데 오래 걸리고 힘겨워하는 편인가요? 오래 걸립니다. 일단 마지막 문장까지 쓰고 나면 다시 보지는 않습니다만, 쓰고 교정 보고 쓰고 교정 보고 더디게 갑니다. 빨리 쓰지는 못해요.

다시 안 보는 이유는 뭔가요? 첫째는 마감 시간에 늦으니까 다시 볼 시간이 없어서 그렇고요. 둘째는 한참 지나서 다시 읽을 수는 있어도 그 자리에서는 다시 읽지 못하는 버릇이 있어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문장 하나하나 굉장히 신경을 많이 씁니다. 내가 쓴 글은 내가 보면 금방 알아봐요. 다른 글 쓰는 분들한테는 참 미안한 얘긴데, 휘갈겨 쓴 글, 정돈되지 않은 글을 보면 견딜 수 없이 기분이 나쁩니다. 산문은 산문으로서의 품질을 지켜야 합니다. 산문이라는 게 굉장히 창조적인 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한 번도 안 썼던 문장을 해내는 자세가 됩니다. 소설이나 시 같은 창작은 아니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창작한다는 생각으로 씁니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에 실린 산문 ‘봄은 어디에 와야 하는가’의 앞부분은 마치 소설의 묘사 같은 미문으로 시작합니다. 시사적인 주제를 다룬 산문이 많은데, 그런 글에서도 미문을 배제하지 않은 듯합니다. 미문이라고 불리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이 읽었을 때 아름다운 부분이 있구먼, 믿음이 있네, 이런 느낌을 받게 하려고 애씁니다. 미문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미문을 지향하지는 않아요. 대신에 일종의 산문적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문 칼럼이지만 신문 칼럼처럼 시작하지 않는 글들이 꽤 있습니다.

서문은 책을 만드는 어려운 과정을 다 지나고 나서의 과정, 일종의 자축 같은 걸 텐데 왜 쓰기 어려울까요? 자기소개서 쓸 때와 같은 부끄러움인가 싶었습니다. 편집, 교정까지 다 해놓고 서문을 쓰라 그러면 마치 그 일을 새로 시작하라는 명령처럼 들려요. 그래서 충격이 있습니다. 버릇처럼, 아이쿠, 이거 도망가야지, 해요.

서문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주의 깊게 봤습니다.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서문에서는 선배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에서는, 친구여! 라면서, 당신은 소중하고 고귀한 게 뭔지 알 거라고 말합니다. 이 차이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단서 같습니다. 20년이면 크게 오래되진 않았지만, 나를 안내하고 북돋워주는 선배들을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젠 내가 그 선배들의 나이에 도달했죠. 그래서 지금의 젊은 독자들, 젊은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노털’ 소리 안 들으려고 친구라는 표현을 염두에 뒀습니다. 하하. 근데 제가 친구여, 란 말을 곧잘 씁니다.

정신이 젊다는 자신감의 표현인가요? 허허. 말은 젊게 하려고 하는데 정신은 아마 늙었을 거예요.

또 하나의 변화를 본 대목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약력에 언론사에서 일한 내용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빠졌더라고요. 왜 빠졌나 모르겠어요. 허허. 언론에서도 상당히 오래 일했고, 열정을 바친 시기였는데.

언론사를 그만둔 건 당신의 삶의 궤적에서 큰 변화였죠? 맞습니다. 그때가 70년대 중반쯤이었는데, 우리 사회의 언론 검열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예요. 지금도 기억이 나요. 그때 ‘동아일보 사태’라는 게 터졌습니다. 동아일보가 백지광고를 내고 그랬죠. 나는 신문사가 아닌 통신사에 있었지만 한국 언론계에 희망이 없구나, 여기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이 엄습했습니다. 버티면서 그냥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국 언론에 대한 절망에서 벗어나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긴박한 자기 요청이 있었습니다. 유학길에 오르지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표제작이자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실린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영문학자이자 문학 평론가에서 실천가로 변모하는 모습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옛 시인들이 노래하던 자연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과거 회귀나 문명 거부를 꾀하기보단 적극적으로 문명을 재편하고 제도적인 변화를 꾀하자고 그 글에서 말합니다. 생태 비평을 지향한 평론집은 아니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가진 생각은 문학은 당연히 생명이 직면한 여러 가지 형태의 위험에 발언하고 맞서야 하고 그것이 문학의 존재 이유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문학은 생태문학이라는 생각을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생명문학 어쩌고 하는데 그런 말도 필요 없어요. 20년 동안 우리가 뭐가 변했나? 책을 내면서 예전에 쓴 글들을 읽어보니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어요. 문명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해요. 그런 점에서 사회 운동이나 생태 운동을 하는 분들과 공유하는 문제의식이 초등학교부터 생태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거예요. 대학생 되면 늦습니다. 화장실은 휴지로 가득하고, 지하 1층 가면서도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강의 끝나고 나가면서 불 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자질구레한 얘긴데 이런 얘길 할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성장 세대가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보여준다는 거죠.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와 닿지 않는 겁니다. 이런 소릴 하면 계몽주의자입니까?, 소릴 듣지만 만약에 그게 계몽주의자라면 나는 백 번 계몽주의자이고 싶어요.

교육이 바로 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책 운동에 주목하신 거죠. 그렇습니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은 단순히 책 예찬론자의 책이 아니에요. 2001년에 우리가 책 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을 시작했을 때 그 출발 지점에 함께 선 사람들이 대개 인문학 교수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데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문제는 없을까 생각하다 나온 거예요. 아무 방향 없이 무작정 뛰는 사회보다 어떤 사회를 만들고 어떤 문명을 꾸려 갈 것인지 생각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서 우리가 가진 유일한 수단은 책이었습니다.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자극의 매체, 촉발의 매체죠. 책을 안 읽고도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어떤 문제를 조직적이고 깊이 있게 생각하려면 책 없이는 안 됩니다. 책만이 사유를 촉발하는 건 아니고, 영화나 다른 장르도 그렇겠지만,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사유의 매체는 여전히 책이에요. 생각하는 사회를 만듭시다의 다른 말이 책 읽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학자가 사회운동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곤 합니다. 학자들과는 관계를 맺는 방식도, 말하는 방식도 다른 사람들과 일을 도모해야 할 테니까요. 왜 당신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나요? 쉽게 말하면 똥고집입니다. 이 책에 공자의 논어를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니 군자답지 않은가.” 무슨 일을 하는 데 남들이 알아주면 기분 좋죠. 손뼉을 쳐주면 힘도 나고요. 하지만 꼭 내가 안 하더라도 누가 하든 간에 할 만한 일이 있다면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올수록 타인의 시선에 지배되고, 누가 손뼉을 쳐주지 않으면 화를 내요. 예를 들어 우리가 투표를 하러 가는 건 누가 투표장에 가네, 잘한다 칭찬해서 갑니까? 자신의 마음이, 내부의 지성이 명령하는 걸 해야 합니다. 칸트의 정언명령 같은 거랄까요. 인문학은 관계의 건축학이라는 얘기를 책에도 썼는데요, 인문학이 사람들에게 맨 처음 알려줘야 할 것은 나와 나의 관계입니다. 남들의 시선을 무시하라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전적으로 좌우되지 않는 내적 견고함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거예요. 그것이, 인문학이 성찰을 중하게 생각하는 이유고요.

오히려 요즘은 좀 다른 명령이 있습니다. 이 사회는, 널 보호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지키라고요. 그 위기의식에 기름을 붓는 자기계발서가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자기계발서도 필요하죠. 그런데 자기계발서에 침몰되면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궁극적으로는 실망합니다. 자기계발서 백 번 읽어도 계발되지 않습니다. 자기계발서 내는 출판사들에게 미안합니다만, 뭘 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방법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도 좋은 충고와 지혜들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훨씬 더 진지한 자기 만들기 작업이 있는데, 우선 급하니까 답답하니까 그런 책을 보고 맙니다. 그걸 넘어서야 합니다. 힘들겠지만 자기계발서의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자기계발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넓게 보면 모든 소설은 성장소설이라는 말도 있긴 합니다만, 성장소설에 대한 각별한 애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키우고, 사람이 자라는 문제가 저의 항구한 관심입니다. 사람이 자란다는 게 참 이상한 일입니다. 거기에는 알 수 없는 비밀들이 있어요. 유전자가 어떻고 그 정보가 사람을 어떻게 바꾸고 하는 생물학의 설명이 있고,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다 설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성장을 돕는 비밀스러운 바람이 참 많습니다. ‘바람의 비밀’이나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가 다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어른이 돼서 뭐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는가를 돌아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사소한 일들에 자극을 받았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성장소설이 아주 매혹적입니다.

‘기적의 도서관’도 아이들의 성장에 대한 관심, 즉 오랫동안 강조해온 올바른 시민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당신은 ‘바보’에 대한 애착을 보여줍니다. 시민과 바보가 배치되는 건 아닐는지요? 바보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에 똑똑한 바보가 있어요. 절대로 나는 바보로 살 수 없어. 바보를 사절하고, 바보를 피하고,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똑똑한 사람들이죠. 우리 사회에 있는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입니다. 좋은 태도입니다만 그 사람들의 문제가 뭐냐면 바보를 기피하면 할수록 한 쪽으로는 바보가 된다는 거예요. 내가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성공, 명예 같은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산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는 어리숙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 우리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한 고귀한 절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바보들을 내치지 말고 눈여겨보자는 거예요. 김수환 추기경은 자기를 바보라고 불렀잖아요? 전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고요. 또 시인들은 대부분 바보입니다. 바보스러운 태도, 바보스러운 방식, 바보스러운 언어를 통해서만 자기를 표현하고 지킬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시민의 정수일 수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쓴 게 ‘산치’죠.

‘산치’로 나타나기도 하고, ‘버섯의 숲’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바보와 함께 ‘감응’이라는 단어도 당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시민을 구성하는 한 요소 같습니다. 당연히 건축가 정기용을 떠올렸습니다. 누구보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했던 건축가. 하지만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의 말을 들으면서 수업을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었는데요. 정기용은 건축물이 자연, 역사, 문화, 사람과 감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하면서 같이 부지를 보러 다녔는데 그랬어요. 어떤 땅에 가면 그 땅이 요구하는 설계가 느껴진다고. 저 역시 수업에서 많이 들어요. 존중하고요. 강의라는 게 한 시간 안에 소화해야 할 내용이 있어서 질문을 생략할 때도 있었지만 늘 궁금한 것은 내 얘기를 젊은 친구들이 알아듣는가였어요. 시험을 보면, 내가 이렇게 말했나? 애들이 이렇게 알아들었단 말이야? 하고 깜짝 놀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의 시간 중간에 자주 점검했습니다. 지금 다시 강단에 서라 해도 똑같이 그럴 거예요.

점검이라면 어떤 식인가요? 학생들이 어떤 질문을 가지고 왔는가에 대한 점검이죠.

한국 학생들에게 질문을 유도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써내라는 건 그러는 건 곧잘 써냅니다.

그렇죠. 말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죠. 네, 두려움이 있고 익숙하지가 않아요. 그것도 어려서부터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실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도 잘난 척하는 걸로 보니까 나서지 않고 질문도 안 합니다. 근데 요새 학생들은 말이죠, 특히 금년에 들어온, 다른 데는 모르겠지만 경희대학교 신입생을 보면 참 희망적인 것이 명랑하고 활발하고 질문이 많아요. 왜 그렇게 됐는지 좀 알아봐야 돼요.

젊은 세대와 당신 사이에는 이제 50년에 가까운 시간차가 있습니다. 그 시간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생각을 가지는 부분이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게임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게임이 대중화될 때 가졌던 우려와 달리 젊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사유를 발전시키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꼭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게임을 자기 창조, 새로운 형태의 생산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저 놀이로서, 오락으로서 빠져들면 문제입니다. 오락에 중독되면 치유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게임을 통해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지만, 오락에 중독되었을 때 개인에게 닥치는 자폐증보다 무서운 폐해가 있습니다. 혼자 그 세계에 갇혀서 사회적 삶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 경우를 경고하는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 게임은 4대 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규정은 어떨까요? 규정에 대해선 근본적으로 반대합니다. 다만 가정에서, 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이 자기를 통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내버려두면 하루 종일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게임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 지혜로운 방식으로 억제하는 게 사회적으로 필요하죠.

당신이 규정하는 즐거움의 코드는 사뭇 다릅니다. 쾌락이나 오락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즐거움보다는 좀 더 땀을 흘려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가치 있게 평가한달까요. 책이 그 한 예입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도 있어야 해요. 없으면 안 되죠. 예를 들어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일하다 집에 와서 책을 보겠어요? 못 봅니다. 머리를 쉬게 하고 심신을 풀어주는 오락도 필요해요. 대중문화가 수행하는 역할 가운데 하나예요. 내가 경고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문화생활 대부분을 장악해버리면 큰일이라는 겁니다. 즐거움은 쉬워야 하고, 쉽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달려들면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모두 날아가 버리죠. 산에 오르는 즐거움을 알려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미끄러져봐야 하고요. 책 읽기 쉽지 않습니다. 습관을 들여야 하고, 남들과 함께 읽어봐야 하고, 토론도 해봐야 하고. 그러다가 몸에 붙는 건데 지금 시대는 노력을 요구하는 정신적 활동에 대한 굉장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오락의 기회가 너무 많아요. 이 유혹의 매체들과의 관계에서 중독의 가능성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시민 각자가 자신의 문화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지금 글로 할수 있는 가장 손쉬운 쾌락은 SNS입니다. SNS의 방식은 어떤가요? 요새는 트위터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나라면 안 할 것 같습니다. 그거 말고 할 수 있는 다른 자유로운 상상과 자기표현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트위터가 유용할 때도 있고 그때는 써야겠지만, SNS 방식의 글쓰기? 그건 좀 한계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이제 와서 ‘IMF 시대의 지식인’을 읽으니, 대처리즘이랄지, 금융자본의 득세랄지 그 예견이 정확하게 실현된 시대를 살고 있더군요. 지금 보니까 그래요. 한참 세계화 구호를 띄울 때 그게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트로이의 목마가 될 수도 있다고 했거든요. 그게 94년이에요. 그로부터 3년 후에 IMF가 닥쳤죠. 나중에 들은 얘긴데 정치권에서 싫어했다고, 그런 칼럼 쓰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다행히 단기간에 극복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이후에 우리 사회가 골병이 든 부분이 있죠. 가치관이 시장 만능주의로 옮아간 것도 있고요.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그로부터 십몇 년 동안 바닥이라고 여겨지는 수많은 지점들이 있었는데,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안 좋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희망을 보시나요? 이 책에 쓴 과감한 선언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봐도 웃기는 선언. 인간이 사회적 삶을 영위해나갈 때 의미 있는 일 세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의미가 없는 곳에 의미를 집어넣자. 인간이 지상에 태어난다. 이거 전혀 의미 없는 일이거든요. 지구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졌나요? 천만에요. 그럼 인간이란 이 지구에서 뭘까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낙동강 오리알만도 못합니다. 왜 있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인간은 어찌된 건지 의미가 없이는 못 삽니다. 문학, 예술, 종교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곳에 의미를 만들려고 버둥거려온 역사입니다. 꼭 예술이나 인문학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자기 삶을 의미 있게 하려고 합니다.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을 때 행복합니다. 두 번째는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세워보자. 종교를 가졌다면 어디서 희망의 빛 한 줄기가 내려온다고 생각하겠지만, 제가 볼 때 인간은 어디에서도 희망을 구할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근데 절망 속에서 어떻게 삽니까.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야죠. 그리고 세 번째,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워보자.

늘 본질적인 문제를 따져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예, 우리 시대 인문학자들이 학생들에게 얘기해주면서 다 같이 본질적인 부분을 신경 써야 합니다. 그걸 놓치면 몰가치 사회로 치달을 수 있어요. 몰가치 사회가 잘 먹고 잘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고통의 양은 증대시키는 사회예요. 몰가치 사회를 막아낼 힘이 시민 사회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지식인이 시민사회를 이끄는 걸 역설해온 지난 시간이었죠. 하지만 그 때문에 일반적인 영문학자와는 사뭇 다른 활동과 업적을 쌓아왔습니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 이런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공부하는 분야, 그 좁은 분야만 열심히 파고 들어가면 되거든요. 하지만 인문학 교육은 거기에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기 분야의 연구도 필요하지만 이 시대 대중의 삶이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문명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유하고 의견을 말해야 합니다.

전공 분야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요? 아쉬움 투성이죠. 계획한 책을 거의 못 썼어요. 책 읽는 사회 운동하면서 한 10년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건 단독 저작은 6년 만이라고 들었습니다. 10년의 세월을 날렸는데 벌충할 데가 없어요. 내가 한 200년은 살 걸로 생각했어요. 바보의 특성을 보여줬죠.

‘쓰잘데없이’는 당신의 말버릇인가요? 제목에도 있지만 책에도 참 자주 나옵니다. ‘쓸데없이’라고 쓸 수가 없어서 ‘쓰잘데없이’라고 썼어요. 호남 사투리랑 비슷해요. ‘씨잘데기없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쓸데없이’는 왜 탈락했나요? ‘쓰잘데없이’가 표준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써야 될 것 같더라고요. ‘쓸데없다’보다는 좀 더 여운을 두는 표현을 쓰고 싶었어요.

‘누구시더라’는 서문 다음에 나오는 글인데 시로 치면 결구처럼 읽힙니다. ‘넌 누구냐’라는 질문이 갖는 무게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누구시더라, 라고 묻다가 나중에 질문을 바꿉니다. ‘너는 너를 연결할 더 큰 걸 찾았느냐.’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나한테 쏠립니다. 대상이 나로 축소돼요. 근데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나를 고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잊을 수 있는, 나를 포함한 더 큰 걸 찾는 겁니다. 물리적으로는 우주지만, 정의나 사랑도 나보다 더 큰 것이죠. 화이트헤드가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이라고 할 때 그 ‘위대하다’가 나보다 더 큰 어떤 겁니다. 그런 것과 나를 연결해야 사람다워지지 않겠는가. 난 아무개다!, 바락바락 이름 석 자 대는 게 능사는 아닐 거예요.

    에디터
    정우영
    포토그래퍼
    안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