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소설가 이기호의 반성문 <2>

2014.10.02정우영

소설가 이기호는 부끄러운 게 많았다. 종이를 내밀지도 않았는데 반성문도 읊었다. 무슨 잘못도 하지 않았으면서, 불편한 마음을 불편하게 간직하는 소설가를 만났다. 소설가가 문학을 대하는, 문장을 적을 때의 낮고 구부정한 자세가 생각났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두 번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의 해설에서 이런 얘기를 하죠. 참여를 유도하는 듯 하지만, 형식이 다시 독자를 속박하는 것. 그건 일종의 작가를 까는 말 아닌가요? 하하.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을 만큼 열려 있어서 거기 들어가 보는 게 소설 읽는 맛이잖아요. 그런데 이전의 제 소설들은, 어떤 차원에서는 강압적이었구나 하는 반성도 있어요.

이기호에 관한 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이기호는 부끄러워한다’던데, 오늘은 반성의 날인 것 같네요. 계속 반성하게 돼, 되돌아보게 되고.

한편 “이것을 들어보아라라고 말하는 데서, 독자더러 읽는게 아니라 들으라는건가 하는 질문도 떠올랐어요. 김순희가 받은 편지를 말하는 부분에서만 읽어보아라”라고 하죠. 예전 소설들은 누군가가 옆에서 계속 얘기해주는 느낌을 밀고 나갔어요. 지금도 분명히 그런데요. 소설은 보통 묵독으로 읽잖아요? 하지만 눈으로만 읽으면 놓치는 부분이 많아요. 입으로 읽으면 감각이 깨는데 묵독한단 말이에요? 묵독이 더 많은 걸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죠. 소설의 아주 바람직한 전통이라고 생각하는데, 둘을 하나로 붙이면서 이번에 나오는 게 “읽어보아라”예요. 여기서는 한 번 더 생각하고 고민해보라는 거죠. 예전 소설은 대부분 장터 돌아다니면서 이야기해주는 전기수 같은 입장이었어요. 하지만 이번엔 객관화해서 들려주려는 노력이 있었죠. “읽어보아라” 부분은 너희들 나름대로 읽어보라고 쓴 게 맞아요.

나복만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설정에서 이 소설의 페이소스가 나와요. 일종의 아이러니 효과를 거두려고 했어요. 글을 못 읽는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어서, 이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지령과 편지를 쓰게 한 건데, 사실은 그 시대 자체가 아이러니였어요. 수사관이 대통령이 되는 아이러니에서 파급돼서 그 밑에 형사와 안기부 요원이 그걸 이어받고,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화살이 고스란히 쏟아지죠.

책 전체를 소설론처럼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통령이 쓰는 것도 소설이고, 안기부요원이 쓰는 것도 소설인데, 나복만만이 소설 바깥에 있어요. 유일하게 소설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넌 읽어야만 아냐”고 일갈하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썼어요. 공권력과 문학의 상관관계가 있더라고요. 대통령도 소설을 쓰고, 안기부 요원도 창작을 해요. 시대에 따라서는 창작 혹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어요. 시대가 허구인 거죠. 그러면서 소설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고요. 진실을 다루기 위해서 허구가 필요한 것이지, 허구를 위한 허구가 중요하진 않거든요. 우리에게 있는 진실 대부분은 사실로부터 추출된 것이에요. 사실이 없는 상태에서 진실만 추출되는 게 아니고요. 그런데 이런 시대에는 그냥 허구를 위한 허구를 만들어내죠.

한국어는 알지만 한글은 모르는 나복만에 빗대어 소설가의 윤리를 말하는 거라면 너무 나간 걸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나복만은 까놓고 얘기하면 바보예요. 바보를 소설이나 영화의 주요 인물로 만들면 권력이나 세속의 언어와 의식을 뒤집는 효과를 낼 수 있죠. 이 힘없고 순진한 바보들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있다면 사디즘은 아니에요. 예를 들면 신호등이 고장 나서 빨간불만 켜져요. 어떤 사람들은 고장 난 걸 아니까 그냥 어기고 건너죠. 그 질서나 상징을요. 이게 사디즘적인 거예요. 법이 잘못되면 그게 잘못됐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에요. 반대로 아주 우둔하게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만든 인물들은 후자 쪽이에요. 언어 면에서 보자면 그럴 거예요. 우리가 지식으로 갖고 있는 한글과 한국어의 차이를 나복만이 상징적으로 드러내죠.

혹시 차남인가요? 그러니까 책을 썼죠. 차남들의 아픈 역사와 서글픔을 담아. 하하.

소설가가 차남일 것 같긴 해요.  장남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그러니까 적자가 얼마나 되겠어요.

(이기호에게) 소설가는 직업이 아니라 상태라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표현이 자신의 작가론을 정확히 읽었다고 말했죠? 앞서 소설가 이기호와 생활인 이기호의 괴리감도 얘기했는데, 쓰지 않을 때는 소설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퇴근 후에 다른 삶을 사는 직장인처럼요. 이론적으로는 쓸 때만 소설가가 아니죠. 삶 자체가 소설가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게 맞아요. 대부분 그렇고요. 그런데 현실에서는요, 한번은 고시원에 들어가서 글을 쓰다가 자료를 찾으러 피시방에 갔어요. 세상의 온갖 루저가 다 모여서 ‘롤(리그 오브 레전드)’을 하는 모습을 소설가적 시선으로 바라봤죠. 그러고 나서 나도 게임 한번 해볼까? 하고 앉아서 피파를 했어요. 지금 너무 아픈 질문을 했는데, 정말 쓸 때만 소설가인 것 같은 때가 많아요. 이 괴리를 없애는 방법은 매일 쓰는 거죠. 하지만 매일 쓸 수 없는 일이 생겨요. 이건 직업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일하는 프로페셔널한 분들을 좋아하지만 소설은 프로페셔널한 정신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좋은 작가들이 말하는 십계명 중에 “매일 꾸준히 쓰되, 정해진 시간에 시작해서 정해진 시간에 끝내라”가 있어요. 저도 그게 오래 쓰고 길게 가는 방법이라고 여겼어요. 근데 실제로 글을 쓰다 보면 예상치 못한 문장이 튀어나와요. 수많은 우연 속에서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과 감정과 정념이 끼어들어요. 이걸 솜씨 좋게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엔 풀어놓는 것도 중요해요. 직장인처럼 한다면 한계가 있을 거예요. 아주 유치한 비유일 수 있는데 무당처럼 느낄 때가 많아요.

쓰면서 희열을 느끼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차남들의 세계사>에 나오는 고문 장면을 써야 하는 순간도 있죠. 소설가도 배우처럼 감정이입을 해요. 제 생각엔 악역을 맡은 배우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면 굉장히 힘들 거예요. 그런데 소설가는 악역도 당하는 쪽도 감정이입을 해야 한단 말이에요? 고문을 받는 나복만 때문에 힘들었다기보다 고문하는 입장에서 힘들었어요. 뚝뚝 끊고 갔어요. 분량은 얼마 안 되는데 가장 오래 걸렸고요. 온갖 자료를 다 봤거든요? 그걸 제 문장으로 옮기는 게 정말 힘들더라고요. 빨리 이 장면을 넘기고 다른 걸 쓰고 싶은 거예요. 그때마다 멈췄어요.

한국이라서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은 부분이 있어요. 나복만이 차마 택시의 핸들을 왼쪽으로 못 틀어 곤란을 겪다가 오른쪽으로 꺾는 테러를 감행하죠. 사람들이 그걸 대부분 정치적으로 읽어서 당황했어요. 한국 사회라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맞아요. 나복만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사고에 얼마나 소심하게 반응하는지, 그 소심함의 전형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는데, 좌회전하니까 벌써 딱 걸리는 거예요.

소설을 쓰면서 독자에게 어떤 기대를 거나요? 큰 기대를 하진 않아요. 작가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지금은,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써요. 예전에는 의미가 아니라 재미, 흥미였을 거예요. 소설이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을 수행해도 전혀 무방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엔터테인먼트로 할 거면 내가 왜 소설을 써야 하나 싶어요. 소설의 존재 목적을 생각하는 시기예요. 동료 작가, 선후배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어요. 제 동료나 선후배들은 글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행동하고 있거든요. 저는 광주에 있고 서울 중심으로 활동이 이뤄지다 보니, 한 템포 늦게 다가오기도 하고 한 꺼풀이 씌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굉장히 편안하고 안락한 느낌을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그분들의 소설을 읽으면 늘 제가 쓴 소설이 부끄럽고 창피해요. 물론 저는 정치적 혁신도 있어야 하지만 미학적 혁신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정치적인 이야기에 어떤 미학적 혁신을 삽입하느냐가 저한테는 중요하죠.

반성도 좋지만 처음 등장했을 당시 소설가 이기호가 문단과 독자의 숨통을 틔워준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런 칭찬 아닌 칭찬을 들으면서 자족했어요. 자꾸 그 세계에 안주하려고 했고요. 하지만 제가 만난 훌륭한 작가들은요, 자기 세계가 만들어지면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사람들이었어요. 익숙한 독자를 저버리면서 손해가 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게 진정성인 거죠. 자기 세계를 부정하는 것, 아니 아예 자기 세계가 무엇이라고도 말하지 않는 것.

    에디터
    정우영
    포토그래퍼
    전힘찬(CHUN, HIM 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