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도 아닌데 하필 이름이 생각 안 난다. 조이였나 테디였나 타미였나, 잊기 쉬운 흔한 이름이었고 정작 당사자는 만난 적도 없으니 ‘조이스 카페테리아’ 정도로 기억해도 상관없겠지. 어느 해 가을, 일 관계로 뉴욕에 머물 때였고 체류비 좀 아끼겠다고 조식이 포함 안 된 호텔 패키지를 택한 (아둔함을 한껏 발휘한) 탓에, 아침마 다 덜 마른 머리로 커피를 찾아 헤매다 발견한 곳이었다. 동트자마자 문을 여는 부지런함이 무색하게도 실내는 꽤 터프했다. 짝이 안 맞는 의자엔 곰팡이색 코듀로이 쿠션이 널브러져 있고, 테이블마다 귀퉁이가 접힌 문고본부터 필터가 없는 골루아즈 담배까지 원래 제자리인 듯 뻔뻔하게 놓여 있었다. 벽에 붙은 음식 사진은 토너가 거의 떨어진 프린트로 인화한 탓에, 재료에선 궁극의 미스터리함마저 풍겼다. 너저분한 가게임에도 어딘지 망가져 보이지만 어디에도 굴복하지 않는 종류의 자신감이 있었다. 게다가 음악은 무려 플리트우드 맥. 약간 상스럽고 불손하며 메마른 늑대처럼 웃는 서버는 버려두듯이 음악을 틀었는데, 가끔 가슴이 멍들만큼 멋진 선곡으로 혼을 빼놓는 동시에 테이블 귀퉁이로 치킨 오버라이스를 내던지고 갔다. 우리는 곧 친해져서 어지럽고 남루하다가 돌연 황홀하고 우아해지는 방랑의 플레이리스트도 나누게 되고, 버섯 수프를 먹을 땐 야구공만한 하드 롤 서비스도 받게 되었다. 행성만큼 큰 접시에 달걀, 소시지, 구운 토마토, 베이컨과 산더미 같은 채소(그걸 다 먹으면 머리에 당장 싹이 날 게 분명하다), 매트리스처럼 두꺼운 호밀빵 두 쪽까지 나오는 ‘브렉퍼스트 넘버 원’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어서 주로 뜨거운 데일리 수프와 딱딱한 롤빵,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마무리로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캐롯 샐러드와 램 타진 같은 모로코식, 사우어크라우트와 부어스트 소시지가 섞인 독일식, 에그 머핀과 햄치즈 샌드위치류의 전형적인 미국식까지 막무가내로 혼재하는 메뉴는 기특하게도 전부 아주 맛있어 보였다. 메마른 늑대는 혼돈의 메뉴를 이렇게 정의했다. “전형적 관습을 타파하는 프랑스 뉴웨이브 정신이 깃들었음.” 한편, 무국적 카페테리아를 아침마다 북새통으로 만드는 손님들도 평범하진 않았다. 영국제 원단 수트에 존 롭 구두를 신었건, 슈퍼슬림한 블랙 진을 입고 다리를 두 번 꼬았건, 격자 체크 셔츠에 카고 팬츠를 입고 신생아를 업고 왔건 간에,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멋있었다. 그곳에선 수프 그릇에 크래커 열 봉지를 쏟아 붓는 남자, <마담 보바리>의 같은 페이지를 줄기차게 되풀이해서 읽는 여자마저도 지혜롭고 활기차 보였다. 누군가 수트에 스쿠버용 오리발을 신고 있어도 한심해 보일 것 같지 않은,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 그들 사이에 섞여 스스로의 행색을 뒤돌아봤다. 뭐랄까, 머리를 거리의 바람으로 말리고 왔다는 ‘로맨틱한’ 사실만이 그저 조촐한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며칠 지내고 보니, ‘조이스 카페테리아’ 안의 사람들이 비범해 보인 건 스타일이나 룩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아침 식당의 손님들에겐 풍성한 음식을 열심히 양껏 먹고 정신을 바짝 차린 후 이제부터 뭔가 해보려는, 부드럽지만 견고한 의지가 있었다. 오후 이후의 카페나 술집에서 흔히 만나는, 하는 것도 없이 괜히 상처받다가 오늘 저녁엔 기어코 일을 내고 말 것 같은 음울한 기운, 위로의 말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눈물부터 쏟아내는 우울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하긴, 허풍쟁이와 사기꾼, 간사한 모사꾼, 만성적 모순에 시달리는 철학자 등등은 사는 게 하도 복잡해서 그토록 이른 시간에는 깨어 있지도 않을 테니까. 가끔 쇠약한 술주정뱅이가 새벽부터 버번을 마셔대긴 했지만 존재감이 하도 미미하여 전체 분위기를 그르치진 못했다. 아침에 제대로 깨어있는 자들이 만드는 밝고 환하고 낙천적인 분위기. 뉴욕에 머무는 내내 이 매혹적이면서 더럽고, 조용하면서도 시끄러운 카페테리아에서 여섯 시의 수프와 빵을 먹었고, 아침을 먹는 즐거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매일 아침의 청결한 빛, 어젯밤 무슨 일을 겪었건 정직하게 다시 오는 새로운 하루에 대해서도 새삼.
- 편집장
- 강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