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차를 보며 떠올린 상상.
S7의 엉뚱한 도전
S7이 런던탑의 근위병처럼 단정하게 서 있다. 비가 막 그쳤지만 차체에는 광택이 여전한 걸로 봐서 S7의 오너는 적어도 부지런한 사람이겠거니, 이런저런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러다 주차된 배경마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S7을 잘 정리된 도시가 아닌, 전혀 다른 환경에 옮겨놓고 싶은 못된 상상까지 해본다. 이를테면 비를 한껏 머금어 지저분해질 대로 지저분해진 임도라든지, 정비가 안 돼 지뢰밭처럼 드문드문 포트 홀이 나타나는 답 없는 도로라든지. 왠지 모르게 S7이라면 그런 친절하지 못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지키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쉬이 빠져나올 것 같으니까. 반대편에 앉아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S7의 커다란 휠을 따라 그리며 상상을 이어간다. 홍천강 400리 길은 어떨까. 강원도의 굽이진 지류를 따라 들고 나는 롤러코스터 같은 코스가 140킬로미터쯤 펼쳐지는 곳.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S7을 흥분시키기에는 부족함 없는 코스가 되지 않을까.
GLE의 다음 경로
오른쪽으로 천천히 코너를 돌자 계절을 한껏 머금은 숲을 뒤로한 채 GLE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차체만큼 묵직한 GLE의 존재감에 황금빛 배경이 더해지면서 시각적 즐거움이 배가된 순간이다. 폭이 좁은 다리를 나란히 교차하며 툭 내뱉은 ‘멋있다’는 감탄은 아쉽지만 앞에 펼쳐진 눈부신 가을 풍경 보다는 담담하게 바로 옆을 지나는 GLE 쪽에 전한 것이 맞다. 백미러로 멀어지는 GLE를 곁눈질하며 긴 숲길을 빠져 나온 오너의 다음 목적지를 상상해본다. 그래도 육중한 몸집을 이곳까지 끌고 나왔다면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건 영 아쉬운 선택일 것이다. 노란 은행나무가 남한강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강천섬이나 자작나무 숲을 왼쪽으로 두고 내린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인제 31번 국도라면 괜찮겠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찰나의 막연한 상상이 깨진 건 그때. 좁은 길을 빠져나온 GLE가 포효하듯 배기음을 터뜨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기세라면 굳이 어울리는 길을 찾는 건 옹색하다.
조에와의 잠잠한 일주
사이드 미러 안으로 조에가 쏙 들어왔다 빠져나갔다. EV 차량답게 어떤 엔진음도 없이 얌전하게 옆으로 지나갔다. 규정 속도를 지키며, 차선 변경도 없이 성실하게 제 갈 길을 가는 뒷모습이 귀여워 앞 유리 너머로 한참을 바라봤다. 예전부터 장거리라면 정숙하고 경제적인 EV 차량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달리는 조에의 오너가 되는 상상을 잠깐 해볼까. 어차피 상상이니까 이왕이면 크게. 그렇다면 서해안과 남해안의 77번 국도와 동해안의 7번 국도를 ‘U’자 형태로 연결하는 일주는 어떨까. 임진각에서 부산, 다시 부산에서 고성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은 꼭 잠잠하고 편안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중간중간 휘발유 냄새를 맡지 않아도, 덜덜덜 돌아가는 엔진음을 들으며 불편한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조에의 넓은 창 너머로 달려오듯 다가오는 가을을 영사기처럼 넘기며 감상해보는 건 또 얼마나 멋진 시간일지. 짧은 상상이지만 조에의 운전석이 꽤 탐났다.
글래디에이터의 말쑥한 오너
올리브색 셔츠의 소매를 무심하게 둘둘 말아 올리고, 데님 팬츠에 워크 부츠를 신은 남자가 루비콘에서 내리는 장면은 이제 재미없다. 그동안 공식처럼 지프에 대입되던 뻔한 남성상은 조금 많이 지루해졌다. 그래서 붉은 노을을 닮은 건물 앞에 글래디에이터가 정차했을 때 차에서 내리는 오너는 말쑥한 수트 차림이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이왕이면 푸른색 재킷에 눈부시게 환한 화이트 팬츠라면 저 위에 펼쳐진 가을 하늘과 잘 어울렸을까. 그대로 오프로드를 내달리며 글래디에이터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상상도 해본다. 별로. 그것보다는 커다란 오프로드용 타이어를 천천히, 부드럽게 굴려가며 세단이 나란한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더 섹시하다. 네모난 엔진룸에 네모난 카시트, 거기에 길쭉하게 허리를 뺀 글래디에이터가 유려한 곡선을 뽐내는 고급 세단 사이에서 어깨를 쫙 펴고 있는 장면은 점잖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꼭 다부진 근육을 세련된 수트로 맵시 있게 포장한 남자처럼.
- 콘텐츠 에디터
- 신기호
- 포토그래퍼
- 김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