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퍼거슨과의 이 특별한 독점 인터뷰를 통해 당대 가장 위대한 축구감독이 축구로 보낸 일생을 돌아본다. 킨, 케니언, 긱스, 가자에 이르는 인물들에 대한 진심까지.
근성, 야망, 계략 등과 같이 축구감독으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 여럿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위대한 감독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꼽는 것은 한 가지 특성이다. 철저하고 단호하게 악역을 맡는다는 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은 잠시 이 화두에 대해 생각하더니 말했다.
“분명 축구는 거친 경기다. 때로 축구는 내 안에 있는 최악의 모습이 드러나게 한다.” “점잖고 원래 내성적인 성품으로 클럽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사람은 프레스톤 시절의 바비 찰턴이 언뜻 떠오르는데 많지는 않다. 그렇지 않은가?”
“맞다. 이 문제를 놓고 바비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알렉스 퍼거슨 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플레이의 방향 전환을 수반하는 연습을 선수들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선수들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세련되고 기품 있는 선수였던 찰턴은 이런 기술을 본능적으로 습득했었다. 하지만 그는 선수들이 자신의 요구대로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그는 이 일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축구감독의 성공 여부가 그저 기질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냉혹한 사람이 훌륭한 감독이 되느냐 하는 문제로 되돌아보면, 난 로이 킨이 성공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선더랜드에서의 모습을 보면 그럴 만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좀 더 부드럽게 말해서 감독에게는 강철 같은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가령 찰턴은 자기가 선수들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선수들이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에 절망감을 느꼈다. 킨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의 몇 안 되는 라이벌들, 국제적으로 열정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감독들 중에서도 그를 허풍쟁이라고 손가락질 할 사람은 거의 없다. 운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여러 가지 관리가 가능한 다른 요인에 의해 성공이 좌우된다고 생각하리라고 본다.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준비, 체력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경기장에서 발휘하는 강철 같은 용기들 말이다. 25년 전 아르헨티나 출신 감독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결승전에서 자기 팀인 레알 마드리드가 퍼거슨의 에버딘에게 패배한 직후에 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난 것은 축구 팀이 아니었다. 그건 불굴의 투혼이었다.” 하지만 퍼거슨은 이 비즈니스에 너무나 오랫동안 몸을 담았기 때문에 은근히 자신의 천재성을 강조하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우리는 맨유의 캐링턴 훈련장에 있는 접견실 위쪽의 한적한 발코니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사무실보다 여기가 나을 거라고 했다. 사무실에서는 전화소리 때문에 방해를 받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유일하게 대화가 끊어졌다. 그가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브라질 출신 수비수인 라파엘 디 실바가 리셉션에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선수에 대해 잘 모를 때가 있다. 어떨 때는 의문을 품고, 어떨 때는 추측이 필요하다. 어떨 때는…” 그는 18세 소년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단박에 알 수 있다.”
올해 66세인 퍼거슨이 재킷 없이 셔츠와 넥타이 차림으로 양손에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그의 팀 전원이 이곳에 있다. 접객 담당인 캐스와 개인 비서인 린, 홍보를 담당하는 다이애나로에 이르기까지 친근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를 지니고 있어 감독의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대화는 몇몇 축구 인사에게서 볼 수 있는 퉁명스럽고 단조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식의 대화는 축구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는 잘 웃고 말할 줄 알 뿐 아니라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고, 거의 지나칠 정도로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19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맨유를 지켜본 사람이 아니라면 퍼거슨이 이 클럽을 위해 한 일의 진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7세에 어른들 손에 이끌려 매트 버스비 경이 이끌었던 맨유에서 한창 절정기를 누렸던 베스트, 데니스 로, 찰턴의 활약을 보았고, 그 다음에는 테라스에 서서 몇 년 동안 맨유가 수치와 모욕을 감수하다가, 결국 1980년대 중반에 론 앳킨슨의 지휘 아래서 보통 팀으로 반짝 부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퍼거슨이 맨유를 맡기 이전 20년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았던 시절에 맨유가 리그에서 우승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은, 마치 뉴캐슬이나 잉글랜드를 지지하는 것과 비슷해서, 비현실적인 기대와 끊임없는 실망이 교차하는 끔찍한 순간이었다는 점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나는 퍼거슨에게 이렇게 물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유벤투스와의 프리시즌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는 것을 보았다. 14살 때, 이탈리언 컵에서 맨유가 당시 2류 팀인 바리에게 제압당한 모습을 본 기억이 났다. 밤 경기였고 관중은 아마 1만7천 명 정도였던 것 같다. 선수들의 기술력과 작전 스케일의 측면에서 클럽의 변신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신이 팀을 맡기 전에 클럽의 모토는 <미스터 크림슨 구출 작전>에서 존 클리즈가 했던 대사였을 것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전쟁터에서 비틀거리며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절망이 아니야. 난 절망을 이길 수 있어. 그게 희망이야.’ 당신은 이런 부활을 꿈꾸었는가?”
“1986년 11월에 내가 처음 맨유에 부임하고 몇 달이 지난 뒤였다. 바비 찰턴과 나는 마크 휴즈를 다시 데려오려고 바르셀로나로 갔다. 우리는 아침에 스타디움을 거닐었다. 농구장과 엄청난 훈련시설을 둘러보았다. 찰턴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모습이 이래야 한다. 이런 수준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버스비의 아이들과 훌륭했던 모든 팀들을 돌아보면 지금 이렇지 않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바르셀로나처럼 될 방법을 생각해보자.’”
“이탈리아나 스페인 팀이 올 때마다 항상 놀랐다. 만약 어떤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 어김없이 의사, 물리치료사, 주술사 등 대여섯 명이 경기장에 나타난다. 우리에게는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 치료와 재활에 관한 한 우리 팀은 그 어떤 팀에도 뒤지지 않는다. 퍼거슨은 이렇게 덧붙였다.
1999년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 난 그의 몇 미터 뒤에 앉아 있었다. 추가 시간을 3분 남겼고 이미 바이에른 깃발이 트로피에 묶이는 순간이었는데 그 얼굴은 부처처럼 평안했다. “당시 코치였던 스티브 맥클라렌은 이런 말을 했다. 연장전에 들어가기 직전 테디 세링엄이 동점골을 넣자, 그는 당신에게 연장전에 어떻게 경기를 운영할지 말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당신은 ‘연장전까지 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해낼 것이다. 나를 믿으라’고 말했다던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가? 직감이었나?”
바이에른 선수들이 포지션 감각을 얼마나 잃었는지 직감적으로 파악했다고 퍼거슨은 말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바이에른 선수들은 “비행기 충돌 현장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는” 사람들 같았다고 한다.
“정신적인 면에서 바이에른 선수들이…”
“정신이 해이해졌다는 것이다.”
“당신은 모스크바에서도 마찬가지로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존 테리가 페널티킥을 차려고 달려가기 시작했을 때다. 성공하면 첼시에게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 때 표정도 똑같이 확고한 내적 자신감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다. 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퍼거슨이 나를 바라보고 머리를 흔들며 ‘망할 놈의 축구!’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당신의 그런 표정을 보고는 누구도 당신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첼시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 페널티킥을 찰 때, 누구였더라. 아, 애슐리 콜이었던 것 같다. 나는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반 데 샤르가 거의 막을 뻔했다. 하지만 일단 볼이 들어가자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다시는 기도하지 말자고. 내가 애버딘의 감독으로 첫 번째 결승전을 치를 때 우리는 1대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추가 시간 마지막 2분에 레인저스가 두 골을 넣었다. 나는 그날도 기도를 했고, 다시는 기도를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나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를 2대1로 눌렀다.” 퍼거슨은 테리가 볼을 차기 위해 준비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테리가 볼을 향해 다가가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테리가 망칠 거야. 분명해.’ 그러자 그는 볼을 발의 측면으로 차려고 달려가다가 넘어졌다.”
“그날 결정적인 순간은 맨유의 평생 팬이라고 주장하는 전 구단주 피터 케니언을 본 것이다. 그는 2004년,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첼시로 자리를 옮겨 흠뻑 젖은 명품 정장 재킷 위로 은메달을 달았지만, 바비 찰턴 경은 자기에게 주어진 메달을 달지 않겠노라고 거부했었다.”
“그가 메달을 달았더라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버스비의 아이들부터 50년 동안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선수들과 축구 클럽을 생각했다. 바비 찰턴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케니언은 6개월의 유급휴가를 받고 클럽을 떠났지만, 맨유 측에서 그와 함께 사라진 노하우를 회복하는 데 수년은 걸렸을 것이다. 그가 떠나 맨유가 큰 타격을 받았을 것 같다.” “천만의 말씀이다. 피터 케니언이 떠난 건 결코 손실이 아니었다. 최근에 가장 좋았던 일은 데이비드 길이 그의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케니언은 언제나 소름 끼치는 존재였다. 맨유에 있을 때도 말이다.” 퍼거슨은 이에 대한 대답을 비공개로 해달라고 했다. 나는 실제로 알렉스 퍼거슨 경을 좋아하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퍼거슨을 거북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그가 위협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부츠와 찻잔이 날아다닌다는 이야기가 무성하게 떠돌기 몇 년 전에 이스트 스트링셔(퍼거슨이 처음으로 감독을 맡았던 곳)에서 퍼거슨 감독 밑에 있던 보비 맥컬리는 “퍼거슨은 처음부터 두려운 인물이었다. 정말 사나웠다”고 회상한다. 두 번째로 감독을 맡은 세인트 미렌 클럽에서 퍼거슨은 몇몇 선수들의 머리 너머로 콜라 캔을 던져 캔이 벽에 부딪쳐 찌그러지게 하면서, 선수들에게 다시는 술집에 가지 말라고 했다. 바로 뒤에 주장인 재키 코플란드가 퍼거슨의 사무실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성질을 내니 아무도 견디지 못하죠. 아마 지금 거기서 오줌을 지리고 있을 겁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퍼거슨이 그토록 매력적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할 때 어느 정도 전략을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그 스타인 아래서 배운 것들을 설명하는 <무한 인생경영>(1999년에 출간된 퍼거슨의 자서전)의 한 장은 그의 대인관계 기법을 보여준다.
퍼거슨은 이렇게 썼다. “스타인은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것은 엄청난 재산이었다.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바로 그들의 호감을 얻게 마련이다.” 그는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대해 박식하고 열정적인 토론을 하기도 했다. 2006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영화의 배경은 아일랜드 독립전쟁이다(로치는 현재 에릭 칸토나 주연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백미는 아일랜드가 분단되었던 극적인 역사의 순간을 포착하는 장면이다. 마이클 콜린스가 런던에서 돌아왔을 때 조약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 장면은 정말 잊을 수 없다. 그 방에서 20명 정도가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이 모임은 아일랜드의 분단을 초래한 조약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장면을 기억한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이다.”
퍼거슨과 첫 번째 대화를 나눈 직후 나는 맥클배니에게 전화를 해서 퍼거슨의 매너에 놀랐노라고 했다. 킬마느녹 출신의 작가인 맥클배니는 이렇게 말했다. “퍼거슨에게는 좋은 점이 매우 많다. 그는 자주 오해를 사는데, 알고 보면 진국이다. 네가 정말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달려와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알렉스는 알면 알수록 더 좋은 사람이다. 진정으로 그를 알면서 그를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앞으로 명심해야겠지만 알렉스는 만약 누군가가 자기 편을 들지 않으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생각한다.”
맥클배니가 마지막으로 말한 경향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그가 편집증을 가졌다고 비난한다. “내가 어렸을 적에 맨유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팀이었다. 이제 이 클럽은 여기저기서 욕을 먹고 있다. 얼마 전에 한 일간 신문사 사무실에 앉아있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편집자가 맨유를 ‘빌어먹을 놈들’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나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에 아주 익숙하다. 런던 신문사에는 고의적으로 나를 적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항상 축구감독에게서 당신의 성품 이야기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아르센 벵거가 그 사건 이후에 투덜거리고 있고 때로 그의 짜증은 팀 안에서 전염되는 것 같다. 호세 무링요는 근거가 없고…”
“호세가? 좀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하는 말을 생각해 보면… 어느 날 나는 젊은 축구기자 중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기자에게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신이 언론과 좀 더 친해지려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유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신이 언론을 가까이 했다면 당신에게서 매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다음 그가 처음으로 참석했던 맨유와의 기자회견장에서 위협을 느낀 적이 있노라고 고백했다. 당신이 무례한 질문을 한 어떤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망신을 주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적이 있다.” “그러면 당신은 남을 괴롭히는 행동이 당신의 단점이라고 말할 것인가? 중압감이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고 말이다.” “절대로 아니다. 한번은 사전에서‘ 불량배’라는 단어를 찾아본 적이 있다. 내 기억에 ‘불량배’는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말했다. 여기서 ‘약자’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가리킨다. 내가 감독으로서 지난 수년 동안 상대한 사람들을 본다면 – 그리고 나는 탈의실에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말다툼을 벌인다 – 전반적으로 말해서 그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컸다. 그러니 내가 그들을 괴롭히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젊은 기자들을 위협했던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축구기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그들의 행동이 신경을 거스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들이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 최후의 칼자루를 쥔 사람은 언제나 기자이기 때문이다.”
퍼거슨은 <레이싱 포스트> 프리시즌 호를 예로 들었다. “거기 있는 모든 분석가들은 첼시의 우승을 점쳤다. 누군가 ‘그 이유는 스콜라리가 시내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분석가들은 내가 스콜라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벵거, 무링요, 아브람 그랜트는 ‘나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신문은 내가 평균 나이가 30세가 넘은 팀은 리그에서 우승할 수 없다는 말로 첼시를 ‘비난’했다고 말했다.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난 30세가 넘은 팀은 크게 향상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첼시의 경우는 지난 시즌의 성적을 감안할 때 큰 향상이 없어도 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퍼거슨은 다시 주제로 돌아왔다“. 바로 그 기자가 스콜라리가 나보다 나은 감독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만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각 있는 기자라면 잉글랜드에서 감독을 하지 않았던 사람에 대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콜라리의 이력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17팀의 감독을 맡았었다.”
심장전문 주치의는 어떤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2004년에 심장 박동 조절 장치를 단 그는 자신이 올드 트래포드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던 유일한 순간은 1989-90 시즌,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5-1로 패하고 일부 지지자들이 그의 사임을 요구한 후라고 한다.
“그때쯤 패트릭 바클레이가 상당히 통찰력 있는 기사에서 당신을 옹호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퍼거슨 감독은 클럽에서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있다. 1군 문제만 제외하고 말이다’라고 썼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때 나는 당시의 선수진으로는 리그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당시 회장이었던 마틴 에드워즈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는 출혈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선수 8명을 이적 시켰다. 그리고 청소년 프로그램에 전력을 다했다.” 감독들마다 특별한 포즈가 있다. 무링요는 오버 코트를 걸치고 도전적으로 찡그린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내밀고, 벵거는 불공정한 처사를 당하면 얼굴에 고뇌의 주름이 가득하다. 퍼거슨은 과도하게 시간에 얽매인다.
“축구 때문에 견딜 수 없이 긴장이 고조될 때 생기는 스트레스의 또 다른 증상은 병이 아닌가?” 퍼거슨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의 전략이었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전략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 심판은 추가 시간을 3분 밖에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심판만이 시간을 정할 수 있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퍼거슨은 체스에 적용되는 것처럼 ‘타임키핑’에 대해 좀 더 절도 있는 방법이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온 사람이다. “대기 심판이 자리에 앉아있고 그가 쉽게 시간을 처리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한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니면 작은 의자에 앉은 사람이 할 수도 있고. 하지만 3분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상대편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 시계를 보았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러고 있다면 우리가 게임을 끝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상대편이 원하더라도 우리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 안 끝났다는 우리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신의 생애에서 무엇이 두려웠는가?” “음… 한 두 선수가…” 퍼거슨은 말을 멈추었다. “당신이 말하려고 했던 선수는 누구인가?” “셀틱의 수비수인 존 맥나미를 말하려고 했다.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무한 인생경영>에서 그를 언급하려 한다고 말하자, 그는 정신없이 웃었다. 하지만 그는 위압적인 인물이다.”
선수 시절 퍼거슨은 데니스 로가 우상이었던 호전적인 중앙공격수로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한창 때는 던퍼린 유니폼을 입고 뛰며 51 경기에서 45골을 기록했다. 전성기를 누려야 했을 레인저스에서는 감독과 마음이 맞지 않았고, 아내 케시와 그의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게 되면서 선수로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런데도 경기에 임하는 그의 자세는 밥 페리어와 로버터 맥엘로이가 쓴 <글래스고 레인저스: 선수들의 면면>에서 잘 드러난다. “축구계에서 꾸준히 논란의 대상이 된 인물 중 한 사람은 호리호리하고 건장하며, 활동적이고 부산하며, 남을 밀어 제치는 스트라이커다. 그가 주변에 나타나면 수비수들은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는 1941년 섣달 그믐밤에 태어났다. 24세에 전임 코치가 되고, 이스트 스트링셔와 세인트 미렌에서 감독수업을 받은 다음에 애버딘으로 가서 거의 10년 동안 셀틱과 레인저스를 물리치고 중심에 섰다. 퍼거슨은 글래스고 서남부의 고반에 있는 집에서 자랐고, 버스비, 스타인, 빌 샹글리와 마찬가지로 서부 스코틀랜드의 노동자 집안 출신이다. 호평을 받았던 BBC 아레나 프로그램에서 알렉스 퍼거슨 경의 유명한 선조 3명을 추적했던 맥클배니는 퍼거슨이 그의 유명한 동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점에 “절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맥클바니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퍼거슨이 특히 전략적인 면에서 우수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영역이 취약한 감독이 가장 수준 높은 근대 경기에서 그토록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그런 감독의 팀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놀랍도록 즐거운 축구와 효율을 결합하여 트로피를 무더기로 받을 수 있었을까? 퍼거슨은 자크 스타인이 스코틀랜드 감독이었을 때 코치로 있었고, 1985년 9월에 스코틀랜드 대표팀이 니니안 파크에서 열린 월드컵 대표팀 선발전에서 웨일즈 팀과 팽팽한 경기를 치를 때, 죽어가는 스타인 곁을
지켰다. 스타인은 향년 62세에 세상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 대피소에 주저앉아 울었던 퍼거슨은 스타인이‘ 1인 대학’이었다고 회상한다.
“어떻게 스코틀랜드 서부에서 그토록 위대한 감독을 배출할 수 있을까? 리버풀, 맨체스터는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했고, 비슷한 압제를 받았다.” “나는 글래스고와 서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후에서 자랐다고 생각한다.” “문화적인 배경을 말하는가?” “문자 그대로 기후를 말한다. 서부 스코틀랜드는 비가 잘 오고 습하며 가혹한 기후이다.” 어떻게 기상이 영국 축구계의 위대한 인물을 빚어냈는지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감정이입을 잘하며 듣는 사람이라도, 햇빛과 달콤한 와인과 케이크로 유명한 마데이라 섬에서 자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 전설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다 끝났다.” 퍼거슨이 말했다. “지중해 생활방식의 유혹이 맨유에게 영원한 문제가 되리라고 보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이것이 영국으로 오는 선수들에게 방해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 뿐이다. 런던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안전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선수들은 거기에서 숨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극장이나 영화관, 또는 멋진 식당에 가면 눈에 더 잘 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누군가가 훌륭한 축구팀과 계약을 맺고 충성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 나는 레인저스에 갔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무언가를 얻으러 온 거야. 국제경기와 트로피를!’”
“하지만 실제로는…” “전적이 형편없었다.” “제프 블래터(FIFA 회장)는 무슨 생각으로 호날두와의 계약 상황을 노예계약에 비유했을까?” “내 생각엔 블래터 회장이 축구계에서 조롱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거나, 그럴 위험에 처한 것 같다. 아니면 너무 늙었든지. 엄청난 권력을 가진 위치에서 블래터는 너무나 황당한 발언을 많이 하는 바람에 자신의 신뢰성에 심각하게 금이 갈 위험에 처했다. 따라서 노예제 폐지 200주년이 지난 마당에 그런 식으로 발언을 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게 되었다.”
“영국 팬들은 훌륭한 외국선수가 팀에 헌신할 때 각별히 관심을 갖는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서 에릭 칸토나가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지 않는가? 그는 맨체스 “세상에서 맨유를 위해 태어난 선수가 한 명 있다면, 바로 칸토나다. 나는 그가 평생 그를 주목하고 자신이 있는 곳을 고향처럼 느끼게 해줄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숱한 나라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방랑벽이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가 여기 왔을 때 이곳이 자기가 찾던 곳임을 알았다. 보면 안다.”
최근에 그는 게리 네빌과 마르세이유에서 온 사나이를 추억했다. “네빌이 이런 말을 했다. ‘칸토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알아?’ 클럽의 운영 측면에서는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어쨌든 게리가 그런 말을 했다. ‘가끔 우리는 밤중에 외출을 했고, 감독님에게 그걸 숨겼어요. 우리는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자고 했죠. 그러고 나서 훈련할 때 칸토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좋아. 모두 이따 보자고. 오늘 밤에. 9시에.거기에서.” 그러면 사람들은 “조용히 해, 감독 있잖아”라며 허둥지둥했죠’라고. 요는 그가 선수들과 함께 밤에 외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것이다. 칸토나는 술을 잘 못했다. 맥주 한 병이나 와인 한 잔이면 충분했다. 그는 단지 선수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칸토나가 악수를 하고 눈을 들여다보면…”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퍼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 인생경영>에서 당신은 아이콘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선수인 폴 개스코인과 계약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이야기를 길게 썼다. 나는 당신이 거의 10년이 지난 후에 데이비스 프로스트와의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그 일을 그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개스코인이 우리 팀에 있었다면 어떤 성적을 올렸을까 하는 생각을 언제나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왜 우리 팀에 합류하지 않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맨유의 전설이 될 수 있었던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파올로 디카니오로부터 당신이 그와 계약하려고 두 번 시도했다는 말을 들었다.” 디 카니오는 맨유에서 정말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내 말은, 그는 위대한 선수였다. 하지만 디 카니오처럼 개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선수가 있다면, 금세 영웅을 만들 수 있다. 베스트가 그랬고, 칸토나가 그럴 수 있었고 라이언 긱스가 그러고 있으며, 웨인 루니, 호날두,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나가 그렇다. 디 카니오가 그런 범주에 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선수들은 영웅이고 사람들로부터 숭배를 받는다. 내가 아는 모든 맨유 팬은 여름에 레알 마드리드와의 소동에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당신은 어떤가?”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기 때문에 달리 생각한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우리가 가브리엘 에인세를 이적시키면서 예견된 일이었다. 호날두와 에인세가 아주 가까운 사이기 때문이다. 에인세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순간,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할지 알았다. 그들이 에인세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해는 마라. 에인세는 좋은 선수다. 그들은 결국 호날두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 불쾌한 것은 프랑코 장군의 클럽으로서 마드리드가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찾아오기 전까지 자기네들이 원하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역사를 가졌다는 점이다.” 다시 퍼거슨은 자기 대답을 비공개로 해달라고 했다.
알렉스 퍼거슨 경이 이룩한 가장 놀라운 업적은 이전 스코틀랜드 감독 세대의 가치관을 이어받아 이를 현대 기업 게임에 적용해 엄청난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특히 숙적인 첼시가 세계 축구 역사상 그 어떤 클럽보다 막강한 재정적인 힘을 휘두르는 시점에 말이다. 그의 현실적인 정치감각은 특히 PLC에서 클레이저 가의 소유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관리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나 같은 팬들은 매입의 역학에 곤혹스러워하고 (호날두의 유명한 표현을 빌릴 수 있다면) 어느 날 서포터들이 다수지분을 갖게 되는 클럽을 꿈꾸지만, 경기장에서 나타나는 결과의 측면에서 이런 방식이 항상 부활을 이끌었다는 점을 어쩌면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시즌이나 다음 시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퍼거슨 자신의 평판은 이런 비난을 넘어 오랫동안 상승세를 탈 것이다. 중동지역의 정세와 관련해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퍼거슨의 경우는 그 반대에 해당한다. 그의 회복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었고, 맥클배니, 제임스 로튼, 바클레이, 스티브 통그, 필 쇼, 팀 리치, 데이비드 레이시, 샘 왈라스, 켄 존스 등과 같은 내로라하는 스포츠 기자들은 항상 그 점을 잊지 않았다.
그와의 마지막 대화는 훈련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박스’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원 한가운데 서서 그들 주변을 지나가는 예닐곱 명에게서 공을 빼앗는 간단한 게임이다. 퍼거슨이 이스트 스트링셔에서 연습했던 것과 똑같은 게임이다. 여기에서는 원 중앙에 있는 사람이 루니와 긱스라는 점을 빼고 말이다. 올드 트래포드에서는, 그가 말했듯이, 2012년 전에 그가 떠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재단이 그대로고, 사기도 그대로다. 나는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은퇴가 두려워진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차지할 것이다.”
“‘누군가’는 정말 중요한 대명사 같다. 그렇지 않은가?” 퍼거슨이 웃었다. “그렇다. 막강한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 이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막강한 사람, 당신처럼 말인가?” “아니다. 이 일은 같은 방식으로 두 번 할 수 없다. 그게 좋은 점이다.” 그가 맨유를 떠나 어떻게 불안한 마음을 다스릴지를 말하자면, 그가 어떤 일을 시도하든지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정치나 자선활동(특히 그에게 국제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에, 아니면 소설 창작에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풀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느긋하게 은퇴를 즐기는 것 말고 어떤 일이든 할 것이다. 물론 가장 격렬한 적개심을 품은 리버풀과 아스날의 추종자라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터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재능이 어디서나 인정 받을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그 시기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 가는 순간에 스톱워치를 보며 흥분한 몸짓을 하는 모습으로 영원히 그려질 이 사나이에게도 딱 한 번, 시간이 분명히 그의 편을 들어줄 마지막 게임이 있을 것이다.
- 에디터
- 로버트 칼머스
- 포토그래퍼
- Mark Lee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