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삶과 대양, 노스탤지어를 담은 엽서를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그곳을 넘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포르투갈까지 7km’를 알리는 이정표 앞에서 나는 거침없이 브레이크를 밟아 양 갈래 도로를 빠져나갔다. 대자연 앞에서 나는 두렵지 않았다. 낯선 나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스투스와 참나무, 돌무더기 좁은 길을 지나 페달을 밟자 눈 깜짝하는 사이에 절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포르투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생의 두오로강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어떤 이질감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내가 좀 더 서사적인 인물이었다면 헤엄을 쳐서 이 강을 건넜겠지만(물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자전거를 타고 트라스오스몬테스 Trás-Os-Montes를 향해 5분 만에 국경을 넘어 시곗바늘을 1시간 앞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짜릿한 일이다. 덤으로 얻은 이 값진 1시간으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TV에서만 봤던 달콤한 에그타르트 가게에 들러 “감사합니다 Obrigado”라고 본토 발음으로 주문도 해보고, 유명한 로컬 음식점에서 개구리 뒷다리 요리와 엄청난 양의 버섯이 들어간 포스타 데 비텔라 Posta De Vitela를 맛보고, 씨줄과 날줄로 엮은 새하얀 시트를 살 것이다.
21세기. 처음 포르투에 갔을 때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팠다. 길고 긴 밤이 지나 우리가 도착한 도스 알리아도스 Dos Aliados 펜션의 외관은 마치 리츠 호텔 같았는데 특히 다소 퇴폐적인 느낌의 스파가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그 펜션은 우리에게 리츠나 마찬가지였다. 프란세지냐 Francesinha(포르투갈식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해치우고 나서 우리는 갈랑 Galão(오랜 전통을 가진 포르투갈식 라테로, 할머니 집에 가면 있는 유리컵에 담겨 나오는 게 특징이다)을 마셨다. 살짝 졸음이 몰려왔지만 우리는 영화 <국외자들 Bande à part>처럼 이 도시를 낭만적으로 탐험하고 싶었다. 앤디 워홀 작품 사이를 뛰어다니며 셀카를 찍기 위해 세랄베스 박물관으로 달려갔다.(실제로 셀카를 찍진 않았다.) 2000년도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간행물에 찍힌 날짜는 2000년이라는 걸 증명해줬다. 당시 나는 코임브라에 살았다. 코임브라는 내가 ‘Espanto’라는 단어가 놀라움, ‘Esquisito’는 이상함, ‘Brincas’는 농담하다라는 뜻임을 처음 배운 곳이다. 또 말은 되지만 엄청나게 웃긴 속담도 알게 되었다. “스페인에는 좋은 바람도, 좋은 결혼 생활도 없다.” 이 속담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든지, 이베리아 반도의 결혼식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다지 믿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나는 초봄에 피게이라다포스에서 용감하게 수영을 하고, 칼두 베르데 요리에 피리피리(포르투갈 고추)를 넣어 먹고, 벨하 대성당 옆에서 울려 퍼지던 파두 세레나데를 듣고, 자동차를 타고 이스트렐라 산맥을 여행했으며, 토스트를 곁들인 풍성한 아침 식사(그때만 해도 우린 젊었기 때문에 토스트를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를 했다.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세상이 시작되는 곳으로의 여행>의 사라마고처럼 살고 싶고 로부 안투느스 작가처럼 글을 쓰고 싶었던 그때. ‘The Gift’ 노래에 맞춰 춤을 추던 새벽과 핫도그를 손에 쥐고 간이침대로 돌아오다 실패했던 그날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당시 포르투갈은 아주 멋진 관광지는 아니었다. 우리는 스페인이 훨씬 더 쿨하다고 생각했다. 잘난 척하던 우리는 포르투갈엔 로메르나 펠리니, 베를랑가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포르투갈엔 브리지트 바르도나 비티, 몬티엘, 세르주 갱스부르, 미나나 마리솔 같은 인물들이 없었다. 프랑스가 누벨바그로 우쭐대고 이탈리아는 신현실주의와 마조라타 Maggiorata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스페인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이뤘던 때, 포르투갈은 20세기 유럽에서 가장 길었던 독재 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Amália Rodrigues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파두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포르투갈을 넘어 대서양의 자랑이었고, 이 절절한 파두 음악을 기가 막히게 불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사우다지 Saudade(포르투갈어로 ‘사무치게 그리운’)’ 했는지.
포르투갈에서는 영국의 냉소도 찾아볼 수 있다. 1373년 6월 13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동맹이자 지금까지도 유효한 앵글로-포르투갈 협약을 통해 아마 영국식 냉소가 포르투갈에 전파된 것 같다. 어쨌든 우리의 이웃은 스페인의 포스터를 아줄레주(포르투갈의 전통 타일 장식)로, 스페인의 플라멩코를 수탉으로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점차 포르투갈에 매료되고 있을 때, 우리는 약간 질투가 섞인 말투로 조금은 너그러운 척 이렇게 말했다. “그래, 포르투갈. 네가 있어 참 다행이야.”
그 후 몇 년 동안은 온갖 핑계를 갖다 대며 계속 포르투갈에 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콤포르타 해변에서 매일같이 수영을 했다. 그곳에서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 모기에 잔뜩 물렸던 기억이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할 일도 없이 뭣 하러 그곳까지 가느냐고 묻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포르투갈에 가는 이유는 알렌테의 어느 황무지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찾아 헤매며 길을 잃었던 것과 비슷하다. 황무지 중 가끔씩 나타난 그늘 같다고 할까. 우리는 알케바 Alqueva에서 서핑을 하고 아라이로스 Arraiolos에서 양탄자를 밟아보기도 하고 이스트레모스 Estremoz의 장사꾼들과 흥정하고, 그룹 패밀리의 노래에 나오는 젊은 이방인과 같이 비센티나 Vicentina 해안에 앉아 파도가 우리를 소금기로 흠뻑 적실 때까지 시에 심취해 있었다. 타비라 Tavira에 도착했지만 즉시 돌아 나왔다. 금방이라도 스페인이 시계를 불쑥 들고 나타나서 이미 시간이 흘러버렸다고 말할 것 같아서였다. 이제 힙스터들은 모우라이라 Mouraira의 밤거리에 울려 퍼지는 파두를 듣고, 수많은 선술집의 정어리 요리를 맛본다. 카실하스 Cacilhas로 이어지는 해산물 가게가 줄줄이 늘어져 있는 길목, 도둑 시장 Feira da Ladra의 아침저녁에는 페소아 Pessoa 동상 옆에 앉아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구절인 “여행은 여행자이다. 보는 것은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다”를 읊조렸다. 구인초 Guincho 해변의 바람, 부서지는 파도, 나자레 Nazaré(포르투갈의 전통 의상)의 일곱 겹 치마, 오비두스 Óbidos의 초콜릿, 피오다오 Piodão의 동화 속 집들, 콜라레스 Colares의 와인, 브라가의 소투 드 모우라 Soto de Moura en Braga 경기장, 세투발 Setúbal의 갑오징어 튀김, 페소 다 헤구아 Peso da Régua의 거대한 별장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나날을 보내던 우리에게 포르투갈 사람들은 팔을 뻗어 우리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승계권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식민지에 편입되지 않음으로, 우정과 이웃이라는 고리를 바탕으로 앞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 카를로스 3세를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 글
- David Moralejo
- 포토그래퍼
- Mirta Ro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