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경우의 수]가 종영을 앞두고 있다. 많은 이들이 놓쳤을 수도 있는 이 드라마의 진가에 대하여.
JTBC 드라마 [경우의 수]에는 답답한 구석이 없다. 10년 넘게 이수(옹성우)를 짝사랑하면서도 술만 취하면 이미 유학을 떠난 이수의 전화에 대고 온갖 욕을 해대며 “나 한 번만 좋아해주면 안되냐”고 매달리는 경우연(신예은)이 안타까운 순간은 있지만, 할 말 못하고 사는 애처로운 순정은 아니어서 속이 시원하다. 이수와 마주하고서도 꿈인지 실제인지 구별하지 못한 채 술김에 온갖 원망을 쏟아붓다가 갑자기 애정 폭격기로 변해버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터진다. 남자 주인공인 이수는 명백히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우정 이상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데, 그 경계선을 설정하면서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우유부단하지 않은 명백한 거절의 말들이라 시원하다.
마치 남자와 여자 주인공이 바뀐 것 같기도 한 이 드라마의 설정과 여러 대사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예전 같았으면 들이 받듯이 상대에게 애정을 고백하고 술주정을 부렸을, 예를 들자면 ‘취중진담’의 주인공이 되어 길바닥을 누볐을 남자 주인공 대신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여자 주인공이 나온다. 그리고 반대로 끊임없이 선을 그은 채로 과거의 상처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자기를 트라우마 안에 꽁꽁 가둬둔, “미모”가 뛰어난 남자 주인공이 그 여자 주인공의 옆을 지키고 있다. 먼저 입을 맞추는 것도 여자 주인공인 경우연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추행”이라며 면박을 주는 사람은 남자 주인공인 이수다.
애초에 이 드라마는 소개글에서부터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놓았다. 남자 주인공 이수를 소개하면서 ‘”미모만으로도 신은 나한테 충분히 불공평했다”라고 말하는 자뻑 왕’이라며 ‘미모’라는 단어를 활용했고, 경우연을 소개할 때는 “좋게 말하면 자기 주관 뚜렷하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라고 기존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 소개와는 다소 다르게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묘사했다. 성별애 구애받지 않는 이런 소개부터 드라마의 진행 과정에 이르기까지 이수와 경우연은 작가의 의도 대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와 다소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물론 이수가 경우연을 지켜주려는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이는 보호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철저히 사랑하는 사람을 배려한 행동이거나 상처 받지 않게 하려는 노력에 가까울 뿐이다.
자극적인 장면도 하나 없고, 어딘가에서 한두 번쯤은 들어본 것 같은 차분하고 덤덤한 로맨스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도 바로 이 지점 덕분이다. 학창시절부터 대학 졸업 후에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까지 한 사람만을 사랑했던 경우연의 사연을 모두 알면서도 자꾸만 거부의 의사를 보이는 이수. 바깥으로 빠져나와야 하지만 도무지 용기를 내지 못하는 한 청년은 경우연과 주변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얻는다. 여기에는 이수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온준수(김동준)도 있고, 당장 이수에 대한 미련 따위 치워버리라며 이수의 면전에서 “꺼져”라고 외치는 한진주(백수민)와 김영희(안은진)도 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이수가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순간, 온준수와 이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경우연의 모습까지 완벽하게 얽히는 삼각관계는 잔잔한 로맨스에서 몇 안 되게 일어나는 파동을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성별에 엮인 고정관념을 작가의 마음대로 뒤섞은 다음에 솔직하고 직설적인 주인공들을 마구 풀어놓은 이 드라마 안에서 캐릭터들은 매우 자유롭게 뛰놀 수 있다. 시청률과는 별개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그랬듯 차분한 멜로 드라마에 대한 수요가 좀 더 명확하게 생겨나고 있는 요즘, 이 드라마는 조금 더 시끌벅적하고 가끔 고성방가도 서슴지 않는 주인공들을 보여주며 자기 식대로 잔잔하지만 활력을 잃지 않는 멜로 드라마로 자리잡았다. 유학 간다는 남자 주인공에게 고백하러 공항까지 맨 얼굴로 달려간 여자 주인공, 이 두 사람이 고등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설레지 않는가. 그리고 결국 성인이 된 두 사람의 입장이 뒤바뀐다면 어느 쪽이 더 애가 탈까. 뻔해보이지만 정해진 답이 있기에 더 설레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 에디터
- 글 / 박희아(대중문화 저널리스트)
- 사진
- 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