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성이라는 바다는 예측 불가하다. 잔잔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고, 극단의 끝에서 낙관적 순간을 맞이한다.
오늘 사진가의 카메라에 관심을 많이 보이던데요. 예전부터 갖고 싶었던 카메라예요. 혹시 박찬욱 감독님이 인스타그램 하는 거 아세요? 사진만 찍어 올리는 계정이 있거든요. 사진이 좋아서 시사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어떤 카메라를 쓰는지 물어봤더니 오늘 촬영한 카메라랑 같은 걸 쓰시더라고요.
요즘도 사진을 찍나요? 한동안 안 찍다가 1년 전부터 다시 좀 찍고 있어요. 휴대 전화 카메라의 와이드 렌즈가 좀 질리더라고요. 단렌즈 카메라로 찍으면 아마 지금 여기서 저 커튼밖에 안 보일 거예요. 그런 생경한 시야로 찍는 게 재밌어요.
어떤 순간에 셔터를 누르고 싶어요? 사람을 많이 찍어요. 배우들도 찍고. 찍은 사람의 마음이 확 느껴지는 그런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때의 상황과 느낌이 담겨 있는. 어윈 올라프의 옛날 작업을 되게 좋아해요. 이종필 작가님 때문에 알게 됐는데 오늘 화보에서 그런 느낌이 나서 반가웠어요.
1백만 명 이상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극장에서 봤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유의미한 기록이죠. 관객의 리뷰를 이렇게 열심히 찾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이 영화를 찍으면서 미스터리한 부분이 하나 있었어요. 굉장히 즐겁고 명랑한 영화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는 순간이 많은 거예요. 그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내가 주책인가 싶을 정도로 혼자 울고 말았는데, 어떤 분이 이런 편지를 써주셨어요. 이 영화가 여자로, 직장인으로 살면서 묵혀둔 감정을 들끓게 한다고요. 그때 뭔가 깨달았어요. 아, 우리 영화가 이런 힘이 있구나.
어떤 순간에 울컥했을까요?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공감을 못 하실 수 있어요. 출근길에 다 같이 걸어가는 장면이라든지 퇴근하고 셋이 조촐하게 뭘 먹는 자리랄까.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무래도 그때는 여가 생활이 없을 정도로 늦게까지 일을 했으니까 먹는 거라도 잘 챙겨주고 싶었다고요. 그래서 영화에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해요.
떡볶이, 칼국수, 그리고 꽈배기까지 진짜 맛있게 먹던 장면이 생각나요. 저는 먹는 장면에 많은 의미를 두는 편이에요. 이번에는 뭘 먹더라도 정성스럽게 먹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맛있고 배부르게 먹으려고 했어요.
작품이 끝나면 영화의 소품을 한 가지씩 수집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어떤 걸 골랐어요? 이번에는 두 개 챙겼어요(웃음). 하나는 교재처럼 쓰던 파란색 기초토익문제집. 그리고 계획에 없었는데 자영이 입었던 옷을 잘 간직하고 있어요. 자영이 대리로 승진하고 나서 검은 원피스를 입고 걷잖아요. 그 장면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거든요.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작품 속 의상이 있나요? 분기별로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카메라 앞에 선 최초의 경험이었던 MBC <스타 탄생>의 의상을 엄마가 가지고 계시고, <괴물>에서 입었던 교복, <오피스>의 정장은 피 묻은 상태 그대로 있어요.
이번 영화의 최대 수혜자는 김현철 씨 아닐까 생각해요.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고아성, 이솜, 박혜수 배우가 함께 부른 ‘왜 그래’의 조회수가 벌써 326만을 넘겼어요. 저희는 애초에 잘 부르는 걸 목표로 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를 진정성 있게 부르자, 재밌게 놀다 오자고 했죠. 노래방에 간 기분도 들었고요. 특히 밴드분들이 연주하는 사운드가 너무 좋으니까 오랜만에 되게 신났어요. 코로나 이후에 답답한 것 중 하나가 공연을 못 보는 거라서. 좋은 사운드 시스템에서 공연 보는 걸 정기적으로 해왔는데, 제가 그걸 그리워하고 있었더라고요.
코로나를 계기로 영화 신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어요. 요즘 무대 인사를 많이 다니는데, 오늘이 마지막인 극장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슬프더라고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영화 보는 문화가 우리 세대에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런 상황 속에서 틸다 스윈튼 언니가 올해 9월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수상 소감으로 “비바 베네치아, 시네마, 시네마, 시네마”라고 외쳤어요. 코로나로 침체된 상황 속에서 오랜만에 영화제가 열린 거였거든요. 그 말을 듣고 운 사람도 있어요. 저도 위로를 많이 받았고요. 모두에게 보내는 응원이자 여전히 남아 있는 극장에 대한 갈채 같았어요.
좋아했던 극장이 있나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소격동에 있던 씨네코드 선재를 자주 갔어요. <서칭 포 슈가맨>, <아티스트>, <메종 드 히미코> 등 거기서 본 영화들을 아마 평생 기억할 것 같아요.
일기를 십 년 넘게 써온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글 쓰는 게 제일 좋아요. 일로 삼지 않아서 그럴 수 있겠죠. 아마 직업이 된다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울 것 같아요. 글로 써보면 가장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어서 연기보다 더 좋을 때도 있어요.
대체 불가능한 배우, 다채로운 필모그래피, 주체적인 힘을 가진 캐릭터. 사진가와 아성 씨의 화보를 준비하면서 유리나 돌처럼 단단한 물성을 떠올렸어요. 어떻게 보면 이번 영화의 자영도 달걀로 바위를 치는 사람이었는데 결코 밀리지 않았잖아요. 저는 제가 존경할 수 있고 닮고 싶은 인물들에 끌려요. 어떤 역할이 제 마음에 와 닿을 때 그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사진작가님과 쉬는 시간에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충격을 받았어요. <라이프 온 마스>를 재밌게 보셨다고 해서 이번 영화의 자영도 윤나영과 비슷한 점이 있는 인물이라고 했죠. 둘 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자신의 소신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묵묵하게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그랬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근데 그거 알아요? 아성 씨는 다정한데 사람을 약간 불안하게 해요.” 어떤 의미인지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혈액형이 어떻게 되나요? 맞춰보세요. 보통 사람들이 저를 O형이라고 생각 안 하더라고요. 저 되게 둥굴둥글한 사람인데(웃음).
유머러스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본인의 세계가 좀 더 넓고 가벼워졌다고 말한 적 있어요. 고아성의 유머 코드는 뭔가요? 켄 로치의 <엔젤스 셰어>를 보면서 많이 웃었어요. 정말 고급스러운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해요. 웃음 코드가 너무 예술적이에요. <쓰리 빌보드>나 <미드소마>도 초반에 되게 웃긴 포인트가 몇 개 있어요. 별거 아닌 걸로도 그냥 쿨하게 웃게 만들죠. 저는 남을 잘 웃기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재밌는 걸 좋아해요.
올해 본 영화 중 최고를 뽑는다면요? 넷플릭스를 통해 올해 초에 <추억은 방울방울>을 봤어요.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까지 울어본 적이 없어요. 꼭 보셔야 해요. <벌새>와 약간 비슷한 지점이 있어요. 같은 감독님의 애니메이션 중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도 정말 좋아요. 이 감독님이 엔딩을 정말 잘 만드는 것 같아요.
<심야식당: 도쿄 스토리> 오므라이스 편에서 잠깐이나마 멜로 연기를 펼쳤고, 누군가는 <라이프 온 마스>의 태주와 나영을 아련한 사랑 이야기로 기억할 수도 있어요. 멜로 장르를 더 해보고 싶진 않아요? 진득한 사랑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긴 해요. 산뜻하고 설레는 멜로도 좋고,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 이야기도 좋아해요.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랑 이야기는 <색, 계>인 것 같아요. 가림막이 많은 영화이기도 한데, 한예리 배우님이 <색, 계>를 인생 영화라고 했을 때 너무 반가웠어요. 저도 그렇거든요. 아마 저와 같은 지점에서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나중에 만나면 이 영화에 대해 꼭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천천히 그러나 빼곡하게 무언가를 계속해서 쌓아왔어요. 배우로서 나아가고 있는 속도와 리듬에 대해서도 고민하나요? 20대 초반까지는 일을 다양하게 도전하는 편이었어요. 지금은 그런 마음이 잘 안 들어요. 그냥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싶어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캐릭터에 대한 취향이 조금 더 지속될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한 2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 또 획기적인 인물과 만나고 싶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길 수 있는 스포츠가 볼링인데 연기도 그렇다고 말한 적 있어요. 배우가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각자의 그릇 안에 담으려면 4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가 만든 기준인데, 4년 이상이면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주연과 조연, 전문과 비전문을 구분 짓지 않고 매력으로 무장한 여러 배우들의 활약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흥행 이유였던 것 같아요. 이주영, 심달기, 조현철, 백현진, 방준석 등 함께 연기한 배우들로부터 받은 새로운 자극과 에너지가 있었나요? 너무 많아요. 아무리 시나리오를 열심히 분석하고 준비를 해가도 현장에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기운은 절대 예측할 수 없어요. 자영이는 아마 영화 안에서 가장 다양한 인물을 만나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다양한 배우들과 연기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특히 신림동 S대 교수로 등장했던 분은 직업이 배우가 아니셨어요. 촬영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연기를 하셔서 오히려 감정이 더 잘 살아 있는 연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의 연기를 보고 신선하다, 틀을 깨는 것 같다고 느낀 적도 있나요? 아역 배우들의 연기는 다 신선한 것 같아요. 볼 때마다 너무 새로워요. 어떤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정말 순수하게 대본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상상해서 만든 진짜 연기가 아이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시간과 정신의 방’이라는 작업실을 갖고 있어요. 연습실이자 도서관, 그리고 친한 배우들이 모이는 아지트 같은 존재인데, 언제부터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2015년에 처음 만들었어요. ‘시정방’에 머물면 의미 있는 하루가 되는 느낌을 받아요. 사실 일을 쉴 때는 은은하게 죄책감이 쌓이는 기분이 들거든요. 꼭 멋진 작품을 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였다고 생각해요. 노동의 참된 의미랄까?
기타 연습도 계속하고 있나요? 최근에 혜수가 연주하는 걸 듣고 오랜만에 다시 기타를 치고 있어요. 하루를 다채롭게 보내는 편이라 작업실에서 매일 다른 걸 해요. 싫증이 빠른 편이거든요.
요트를 타고 바다 위에서 살아본 소감은 어때요? <바닷길 선발대>는 다른 예능보다 더 특별해요. 정말 현실을 잊게 해준 작품 같아요. 12일 동안 바다 위를 항해하면서 한배에 탔다는 말을 실감했어요. 너무 지쳐 있을 때 떠난 거라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던 것 같아요. 사실 한동안 제가 좀 가라앉은 상태였거든요. 그 흐름을 좀 끊고 싶어서 도전적인 일에 뛰어든 것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배 위에서는 늘 신나게 지냈던 것 같아요. 비행기나 기차에서는 한 곳에 오래 앉아 있으니까 생각이 많아지는데, 배를 타면 오히려 잡념이 사라져요. 매 순간 생존 본능을 점화시키고 있어야 하거든요.
자연의 경이로움을 새롭게 깨닫는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광활한 자연 앞에 있으면 사람의 존재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바다 한가운데서 일출을 보는 건 완전히 다른 느낌이더라고요. 풍경을 보고 감동을 받는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다에 나가보니까 어리석고 경솔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겪어보지 못한 게 풍경 말고도 더 있겠구나 싶었어요. 몰랐던 세계를 살짝 엿본 느낌이었죠.
겁이 없는 편인가요?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제가 긴장되는 순간에 이상하게 낙천성을 발휘할 때가 있어요.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그런 마음가짐이랄까.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거죠. 파도가 거세서 긴장해야 하는 상태인데도 뭐든 다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너무 짜릿해요.
익스트림 마니아답네요. 미국 뉴저지에 킹 다카라는 롤러코스터가 있어요.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놀이기구라는데 그것도 타보고 싶어요.
갑판 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울 것 같아요. 밤에 거기 앉아 있으면 정말 좋아요. 바다가 정말 포근해 보이거든요.
그때 어떤 음악을 플레이했어요? 체리필터의 ‘달빛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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