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상징과도 같아서 발명가들이 한 세기 가까이 매달렸던 제트팩이 마침내 실현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물건을 어디에 써야 한단 말인가?
제트팩을 메고 날아오르면 낯설고도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전개된다. 몸이 공중에 떠오르자마자 두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린다. 혈관을 따라 아드레날린이 빠르게 순환하는 사이 발가락은 의지와 반대로 오그라든다. 지면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절박한 모양새다. 그사이 제트팩의 추력이 몸무게를 넘어서고 이륙. 그렇게 공중으로 부양한다.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을 건너 뛰어 위도와 경도로만 표현되는 2차원 세계에서 고도를 더한 3차원으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리처드 브라우닝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압도적인 경험이에요”라고 말했다. 햇빛에 적당히 그을린 듯한 갈색 머리칼과 수염, 마라톤 선수처럼 날렵한 체격을 지닌 브라우닝은 영국의 제트팩 스타트업 그래비티 인더스트리 Gravity Industries의 설립자 겸 CEO이며, 수석 디자이너이자 테스트 파일럿이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수천 번의 제트팩 비행을 진행했다. 또 30여 개 국가에서 시범 비행을 선보였으며 제트팩 관련 기네스 세계 기록을 두 차례나 경신하기도 했다. 그의 비행 장면을 담은 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1천만 회를 넘겼다. 전 세계 언론은 그를 “현실판 아이언맨”이라고 부른다. 가장 간단하면서 딱 들어맞는 수식어다. 브라우닝은 숱한 비행 경험 중에서 첫 이륙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2016년 11월, 아이언맨의 이야기는 솔즈베리의 한 농장에서 시작됐다.
당시 브라우닝은 글로벌 정유회사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에서 트레이더로 근무하고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 밖에서는 뭔가를 뜯어고치면서 시간을 보냈고, 영국 왕립해병대 출신답게 자신의 한계를 깨는 일에 몰두했다. 고강도 근력 운동을 하는가 하면 울트라 마라톤에 출전했다.
그는 정유회사에 재직할 때 선박의 GPS를 모니터링해 전 세계의 원유 이동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2만 파운드를 들인 이 시스템은 불과 반년 만에 회사에 5천만 파운드의 수익을 안겼다. 브라우닝의 전 직장 동료이자 그래비티 인더스트리의 COO를 맡고 있는 마리아 빌다브스카야는 그에 대해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발상을 시도하곤 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2016년 이른 봄에 브라우닝은 제트 엔진을 주문했다. 아주 뜬금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집안 대대로 항공 관련 종사자가 많았다. 외할아버지는 헬리콥터 제조사의 CEO를 지냈고 친할아버지는 참전 경험이 있는 전투기 조종사였다. 아버지 마이클 브라우닝은 항공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기숙학교를 다녔던 브라우닝은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의 작업을 거들었다. 부자는 발사목으로 글라이더 모형을 만든 뒤 인근 언덕 꼭대기에서 날리곤 했다. “집안 내력의 영향으로 열 살 무렵에는 제트 엔진의 작동 원리를 막힘 없이 설명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브라우닝은 마이크로 가스터빈 엔진을 구입했다. 극도로 빠른 속도로 압축한 공기를 연료로 태워 추력을 발생시키는 소형 제트 엔진이다. 크기가 작아 민간 항공기에는 사용하지 못하지만 항공 마니아층의 수요와 드론 시장의 확장에 힘입어 급격한 기술적 발전을 이뤘다. 2리터 콜라병 정도의 크기로 무게가 2킬로그램이 안 되지만 22킬로그램의 추력을 낼 수 있다. 이 점에 착안해 브라우닝은 여러 개의 엔진을 이어 붙이면 사람을 들어 올릴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소리가 어마어마했어요.” 엔진을 처음 가동했던 순간을 떠올린 브라우닝의 표정에는 그때의 흥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엔진을 팔에 장착하기 위한 장비를 만들기 시작했고, 전동 드릴 트리거를 활용해 엔진 출력을 조절할 수 있는 조종장치도 구상했다. 얼마 뒤 브라우닝은 두 팔에 낙엽 수거용 전동 송풍기를 매단 것 같은 모습으로 인적이 드문 시골길에 나타났다. 플라스틱 들통은 연료 탱크 구실을 했다. “첫 발걸음을 떼는 아주 심오한 순간이었죠.” 엔진 토크 때문에 팔이 뒤틀려 뜯겨 나가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소방 호스로 물을 쏘는 것처럼 부드러운 탄력이 느껴진 게 전부였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브라우닝은 수개월에 걸쳐 제트 수트 개발에 매달렸다. 매일 새벽 1시에 일어나 서너 시간씩 작업을 한 뒤 런던행 통근 기차에서 쪽잠을 자는 나날이 반복됐다. 엔진은 두 개, 네 개를 거쳐 여섯 개로 늘어났다. 양팔에 두 개씩, 발목에 하나씩 엔진을 장착했다. 연료통은 배낭 안에 담아 등산용 하네스로 단단히 고정했다. 브라우닝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성공할 거라고 여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주말이 되면 가족을 데리고 농장에서 제트 수트를 테스트했다. 초반에는 실패를 거듭했다. 비행은 꿈도 못 꿨고 공중에 잠깐이라도 떠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발바닥에 스프링을 달고 높이 뛰는 것처럼 도약하는 수준에 그쳤다. 곤두박질을 대비해 안전벨트를 장착했다. 별 소용이 없었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사방으로 흔들리기만 했다. 게다가 엔진은 관리가 까다롭고 제법 비쌌다. 망가질 때마다 수리를 위해 독일의 제조사에 보내야 했다. “온통 카오스였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났어요. 어떤 날은 완전히 진이 빠진 나머지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었어요.” 위안거리라면 쌓이는 실패 속에서 더딘 속도로 진전이 이루어지긴 했다는 점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흥분에 도취됐던 것 같아요. ‘이건 반드시 된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어요.”
2016년 11월의 어느 주말, 그가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던 장면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졌다. 길게 점프를 한 뒤 팔에 부착된 엔진에 몸을 맡긴 채 공중에 떠오른 것이다. 브라우닝이 그 순간을 담은 영상을 보여줬다. 화면 속에서 그는 공중에 뜬 채 한쪽 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지만 마당을 가로지른 뒤 비틀거리며 착지했다. 비행 시간은 6초를 겨우 넘겼지만 카메라를 향해 브라우닝은 소리쳤다. “나 방금 날았어! 하늘을 날았다고!”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브라우닝은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비행이 가능한 수준으로 제트 수트를 개량했다. 발에 부착된 탓에 다루기 까다롭던 추진 엔진은 허리 위치로 옮겼다. 그 결과 등에 멘 팩과 엔진을 부착한 양팔 사이에서 제각각 분사된 추력이 텐트의 버팀목처럼 한 지점으로 모였다. 사실 하늘을 나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그저 한 방향으로 공기를 고속으로 분사함으로써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물리학적 작용에 불과하죠.” 그는 친구에게 종잣돈을 빌려 제트 수트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고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명은 그가 넘어서야 하는 숙적의 이름을 빌려 그래비티 인더스트리로 지었다.
탄력을 받은 그 시기에 브라우닝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던 불안감은 커졌다. 두려움의 근원은 안타까운 가족사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직접 디자인한 산악 자전거 서스펜션을 본격적으로 사업화하기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아버지는 성공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했어요. 하지만 생각과 달리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고 우리 가족은 경제적 곤궁에 빠졌어요.” 결국 부모님은 갈라섰다. 아버지는 후유증처럼 정신 건강이 악화되었고 브라우닝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트 수트의 잠재력에 마음을 뺏길수록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 선명해졌다. “아버지가 그렇게 떠나간 것을 보며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도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런 상황이 재현될까 두려워요. 리스크로 인해 저나 다른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는 일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요.” 브라우닝은 제트 수트에 ‘다이달로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 신화의 발명가이자 태양을 향해 날아간 이카루스의 아버지가 바로 다이달로스다.
그는 만약의 실패에 대비했다. 직장을 그만두는 대신 2년간 휴직을 신청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갈 여지를 남겨뒀죠.” 2017년 4월 1일, 그의 불안감을 종식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비티 인더스트리는 유튜브에 두 편의 짧은 비행 영상을 올렸다. 반응은 즉각적이고 뜨거웠다. “영상 조회수가 일주일도 안 돼 10억 회를 달성했어요.” 며칠 후에는 TED 컨퍼런스를 이끄는 크리스 앤더슨의 연락이 날아왔다. “프란치스코 교황, 일론 머스크와 같은 날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비웠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죠.” 테슬라와 트위치의 투자자인 팀 트레이퍼는 65만 달러를 투자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주차장에서 브라우닝이 비행하는 것을 직접 확인한 뒤 그 자리에서 1백 달러짜리 지폐 뒷면에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는 그래비티 인더스트리에 65억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6월, 햄프셔의 뉴 포레스트 워터파크에서 브라우닝을 만났다. 코로나19로 인한 락다운이 완화됐을 때였다. 그는 수트의 변경 사항을 테스트하고 간단한 광고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호숫가에 나와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모든 것이 잠에서 덜 깬 듯 고요했다. 수면에는 잔잔한 물결이 일었고 제방 위의 나무에서 가끔 새의 울음이 들렸다. 브라우닝 역시 코로나19 팬데믹에 타격을 입었다. 그래비티 인더스트리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비행 퍼포먼스를 하는 것으로 큰 수익을 냈다. 회당 최대 10만 파운드를 벌었다. 비행 훈련 프로그램도 주요 수익원이다. 이 모든 것이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그럼에도 브라우닝은 이 사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다양한 연구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요.” 브라우닝은 더 이상 회사의 유일한 파일럿이 아니다. 그래비티 인더스트리는 체조 선수 출신과 스턴트 배우가 포함된 10여 명의 파일럿을 두고 있다. 그날 호숫가에 도착한 두 명의 파일럿은 마블 영화 <블랙 위도우>의 촬영 크루 재킷을 입고 있었다.
우아하고 경이로운 몸놀림이었다. 그가 다른 차원의 경지에 올랐음을 확인했다.
제트 수트는 눈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개선되어 있었다. “이제는 수트를 전부 3D 프린터로 제작해요. 덕분에 수트 디자인을 쉽게 개량할 수 있어요.” 이동식 작업장을 안내하며 브라우닝이 설명했다. 말 운반용 화물차를 개조한 작업장은 여러 벌의 제트 수트, 전방에 엔진 상태와 비행 정보를 표시해주는 헬멧, 카메라 장비와 각종 도구 등을 갖췄다. 50킬로그램의 추력을 내는 한 개의 커다란 터빈 엔진을 파일럿의 등에 장착하고 있지만 조만간 더 가볍고 강력한 세 개의 엔진으로 교체할 예정이다. “작업대 위에 놓인 최신 버전의 엔진을 오늘 테스트할 거예요.” 브라우닝은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잔뜩 신이 나 보였다.
그의 최고 비행 속도는 시속 137킬로미터라고 했다. 수트에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됐다. 팬츠에서 물갈퀴 같은 게 눈에 띄었는데 다리를 쫙 뻗으면 꼬리 날개가 된다. 고속으로 비행하는 동안 날개 아래로 밀려드는 공기에서 추가로 양력을 얻어 더 빠르게 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다. “해리어 전투기와 비슷한 비행 방식이에요. 계산대로라면 연료를 아끼면서 윙수트 수준의 속도를 낼 수 있을 거예요. 현재 연료 사용량의 20퍼센트까지 기대해요.” 그는 수트의 구명조끼에 머리를 구겨 넣으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안전을 위해 파일럿들은 수면 위에서 테스트 비행을 한다. 다이달로스는 1천8백 미터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아직 10미터 이하로만 비행을 진행했다. 그 이상은 위험하다. 추락할 경우 살아남기 어려운 데다 낙하산을 펼치기에는 턱없이 낮은 고도이기 때문이다.
제트팩의 무게와 다리에 부착된 날개 때문에 구부정한 자세를 취한 브라우닝은 뒤뚱거리며 물가로 걸어 나갔다. 헬멧과 어깨에는 360도 카메라가 부착된 기다란 봉이 하나씩 달려 멀어질수록 사람 크기의 곤충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방 끝에 다다른 그가 점화 장치를 당겼다. 윙 소리와 함께 엔진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힘을 끌어올릴수록 굉음이 진동해 귀를 때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수의 관객들은 귀마개를 착용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브라우닝이 둑을 딛고 양팔을 날개처럼 펼치자 엔진이 뿜어내는 바람에 물보라가 일었다. 출발 총소리와 동시에 스프린터가 치고 나가듯이 무성하게 뻗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한 무리의 새 떼가 쫓기듯 날아올랐다. 이윽고 브라우닝은 팔을 내려 지면에서 몸을 띄웠다. 링을 잡고 몸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체조 선수처럼 우아하고 경이로운 몸놀림이었다. 그가 다른 차원의 경지에 올랐음을 확인했다.
인류사에서 제트팩이라는 개념은 1919년에 최초로 등장했다. 러시아의 발명가 알렉산더 페도로비치 안드레예프가 배낭에 담긴 로켓으로 특허를 냈다. 군사적 용도를 염두에 둔 로켓 팩이었다. 지상의 장애물을 피해 자유롭게 적의 후방으로 날아가 요새를 함락하도록 고안했다. 실제로 제작되진 않았지만 그 아이디어가 세상에 알려졌다. 1962년에는 벨 에어로 시스템이 실질적인 제트팩을 선보였다. 은박을 입힌 두 개의 배기 노즐이 연료 탱크 뒤로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벨 로켓 벨트라는 별명이 붙은 이 제트팩은 과산화수소를 연료로 사용했고 21초간 비행이 가능했다. 대략 250미터를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동거리의 제약 때문에 군사용으로 도입하기에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지만 큰 파장을 일으켰다. SF 애니메이션 <젯슨 가족>과 영화 <007 선더볼 작전>에 제트팩이 등장했다. 제임스 본드는 벨 로켓 벨트를 착용하고 유유히 탈출에 성공했다.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진척 상황은 더뎠고 제트팩에 쏟아졌던 관심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엔진은 무거웠고 로켓 추진 방식은 비효율적이었다. 연료 탱크의 용량으로는 30초 이상 비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충분히 높이 날기 어려웠다. 무거운 짐을 나를 수도 없었다. 그저 눈요기로 훌륭했다.
21세기에 이르러 맥이 빠졌던 제트팩 개발을 부활시키려는 조짐이 발견됐다. 마이크로 가스터빈 엔진의 등장이 제트팩의 실현 가능성을 좀 더 높이면서 새로운 세대 발명가들의 흥미를 끌었다. 2008년에는 스위스의 전직 비행사 이브 로시가 손수 제작한 제트 엔진과 탄소 섬유 날개를 장착하고 영국 해협을 건넜다. 로시는 일약 ‘제트맨’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세계 각지의 에어 쇼에서 비행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2015년 두바이 정부와 후원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에는 호주의 사업가이자 제트팩 발명가인 데이비드 메이맨이 JB-9이라는 제트팩을 메고 자유의 여신상 주변을 선회했다. 2019년 8월, 프랑스의 발명가 프랭키 자파타는 제트 엔진을 탑재한 호버 보드를 타고 영국 해협 비행에 성공했다.
물론 이들의 모든 도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로시는 두바이 프로젝트에서 발을 뺐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두바이 정부가 더 이상 보수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윙수트에 관한 라이선스를 두바이 정부가 보유하고 있으며 그의 팀원을 고용해 자체적으로 프로젝트를 재개했다고 전했다.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건 자파도 마찬가지다. 2016년 미국의 방위산업체에 자파타 레이싱을 매각하려 했지만 투자 회사가 커다란 사기 사건에 휘말리면서 성사 직전에 불발됐다. 한편 현실의 제약에 직면한 제트팩 스타트업들은 1960년대의 발명가들이 해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다시 한번 짊어지게 됐다. 그래서 제트팩을 도대체 어디에 써야 한단 말인가?
활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야는 군사적 용도다. 실제로 영국군은 브라우닝의 제트 수트에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군사 훈련에 참여해 탱크와 항공 모함 위로 착륙하는 시연을 보이기도 했다. “추가로 50킬로그램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수트를 개발
중이에요. 전장이나 구조 현장에서 장비를 나르는 게 가능해질 겁니다.” 지난 9월에는 영국의 에어 앰뷸런스 운영기관과 함께 응급 환자를 구조하는 시험 비행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군의 관심이 실제 주문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엔진의 불안정함, 소음, 짧은 이동 거리 등의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긴박한 실전 상황에서 제대로 활용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했다. 게다가 무인 드론과 개인 비행체의 경쟁력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브라우닝의 시선은 일반 소비자 시장이 아니라 스포츠를 겨냥하고 있다. 지난 1년간 그래비티 인더스트리는 레드불 에어 레이스와 포뮬러 원에서 영감을 얻어 제트팩 레이싱 대회를 준비했다. 한 팀당 두 명의 선수가 참가해 물 위에 설치된 장애물을 피해 다니며 경주를 하는 방식이다. 브라우닝은 슈퍼히어로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면 인간과 기계의 한계를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팬데믹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올해 3월 버뮤다에서 첫 레이스가 개최됐을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어요”라고 말하며 그가 아쉬움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행 테스트를 마친 뒤 우리는 브라우닝의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원래 자택 별채였던 작업장의 벽에는 각기 다른 버전의 수트들이 진열품처럼 걸려 있었다. 예비 부품과 프로토타입, 영화 <아이언맨> 기념품, 각종 행사의 명찰, 그래비티 인더스트리에 관한 뉴스 스크랩 등이 사방을 빼곡하게 채웠다. 책상에는 가족 사진이 여럿 놓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아버지를 그린 그림에 시선이 멈췄다. 패러글라이더처럼 생긴 비행체에 올라 페달을 밟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도전에 나섰던 길을 운명처럼 따라 걷고 있는 셈이죠.” 브라우닝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버지와는 정말 가까운 관계였어요. 아버지는 자신의 꿈 앞까지 갔지만 결국 도달하지 못했어요. 비극으로 끝난 이야기를 성공담으로 되돌리는 것이 제 운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고개를 들어 우러러봐야 할 정도로 브라우닝이 엄청나고 멋진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도 앞으로의 행보에 낙관적인 기대를 걸었다. “1년 사이에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지도 몰라요. 세상이 예측 불가능한 양상으로 흘러가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 그렇고요. 하지만 우리는 발버둥을 치면서도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고 있어요.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본다면 뿌듯해할 거라 믿어요.” 브라우닝이 트럭에서 장비를 가져와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묵직한 소리가 작업장을 가득 채웠다. 대화를 마친 그는 가족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 글
- Oliver Franklin-Wallis
- 포토그래퍼
- Shamil T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