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가 새 앨범 <It’s Not Too Late>로 33년만에 돌아왔다. “늦기 전에” 팬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첫 곡 ‘몰라주고 말았어’를 들어보니, 오히려 몰라주고 늦은 건 우리들의 헌사였다. 한국대중음악에 관한 가장 진지하고 해박한 조언을 들려주는 네 사람, 디제이 소울스케이프, 이봉수, 하세가와 요헤이, 최규성을 찾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상세한 김추자를 통해 김추자의 현대성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김추자의 불꽃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 음악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언뜻 지미 헨드릭스를 비롯한 영미권 사이키델릭 록의 흔적이 들렸지만, 분명히 자기만의 확실한 관점이 있는 것 같았다. ‘루츠’가 안 보였다. 일반적으로 한 음악가의 음악을 들여다봤을 때 그가 영향을 받은 음악가의 흔적이 70퍼센트, 자기 색이 30퍼센트 정도라면 완전히 반대였다. 30퍼센트 대 70퍼센트. 한국에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하세가와가 좋아할 거라”며 녹음해 들려준 테이프의 A면엔 그런 놀라운 음악이 들어 있었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첫 번째 음반이었다.
일본 매체와 인터뷰를 할 때면 이런 표현을 많이 쓴다. 냄새가 난다고. 신중현의 음악에선 고려인삼 냄새가 났다. 그렇게 만들려고 의도한 것 같진 않았다. 리듬이 어떻고 베이스라인이 어떻고 따져들기 전에 난 이미 그 냄새를 쫓고 있었다. 그 냄새의 원류를 찾을 수 있다면, “사이키델릭은 뭔가?” 더 나아가 “음악이라는 건 뭘까?”란 자문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음표가 너무 많았다. 정보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렇게 가까운 나라의 음악인데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신중현의 음악을 듣고 단번에 “아, 이렇게 만든 거구나”란 판단이 섰다면 한국에 오진 않았을 것이다.(친구가 준 테이프 B면엔 산울림 베스트 음반이 있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먹고 어떤 생활을 하면 이런 음악이 나오는 걸까? 90년대 중반부터 수시로 한국을 드나들었다.
일본에도 전후 미군이 주둔했다. 자연히 당대에 유행하던 소울과 사이키델릭 음악도 있었다. 다행히 ‘아카이빙’이 잘되어 있고, 재발매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60~70년대 세계 음악계엔 사이키델릭 록, 소울이라는 거대한 태풍이 움직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지역별로 음악 색이 꽤 구별되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래선지 확실히 힘이 있었다. 일본과 한국은 물론이고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어느 나라에나 그런 태풍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에 오면 청계천에 나가서 한국의 60~70년대 록을 찾았다. 레코드만 파는 건 아니었지만, 다양한 물건 사이로 레코드가 끼어있었다. 열 장 남짓한 작은 규모의 레코드 더미에서도 신중현과 퀘스천스, 골든 그레입스의 음반 같은, 지금으로 치면 희귀반이 심심찮게 나왔다. “이건 신중현이니까 비싼데… 1만원?” 당시엔 대부분 천원이었으니, 만원이면 꽤 값이 나가는 편이었다. 지금이라면 그 수십, 수백 배를 줘야 하는 레코드들을 그렇게 사고 또 샀다. 이미 “일본인들이 신중현 판을 찾는다”는 소문은 알음알음 나 있었다. 종이에 “신중현 판을 삽니다”라고 한글로 써서 청계천을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1만원이던 레코드가 2만원이 되고, 5만원이 됐다. 일본인인 걸 알면 가격을 높게 부르는 경우가 많아, 왠만하면 한국말을 쓰려고 했다. 청 테이프가 붙어 있어 커버가 아쉬운 레코드는 한 장 더 샀고, 그 당시엔 어쩐일인지 록으로 분류되지 않은 히식스, 검은나비를 너머 이른바 ‘뽕짝’ 코너도 꼼꼼히 살폈다.
그때 가이드가 될 만한 정보가 있었다면 유명한 한국 록 음반들을 들어보고 “아 좋다!”는 정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찾지 않으면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사명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당시엔 흥미에 가까웠다. 끝까지 알고 싶은 것. 그러면서 자부심도 생겼다. 내가 알아가고 있구나, 제대로 공부하고 있구나…. 알려고 노력할수록 더 매력적이었다. 5년을 만났는데도 가끔씩 내게 차갑게 대하는 여자처럼,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순간을 만날 때마다 기쁨은 더 커졌다.
“역시 그 충격 그대로구나.” 김추자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땐 그런 기분이었다. ‘거짓말이야’와 ‘댄서의 순정’이 들어 있던 <금지해제곡> 음반이었다. 신중현과의 연결고리가 단단한 가수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상황. 그녀의 음반엔 모든 게 들어 있었다. 신중현의 곡, 내가 원하고 찾던 그룹사운드의 연주와 비트, 그리고 무엇보다 김추자의 독보적인 목소리. 신기했던 건 음반과 곡에 따라 달라지는 보컬이었다. 신중현과 함께한 초기작에선 맑고 청아했다. 이후에 발매된 김희갑, 이봉조의 노래를 부를 땐 또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꺼냈다. 전성기, 황금기란 표현은 도무지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김추자는 언제 누구의 곡을 부르던 확고해 보였다. 그런 자신감을 듣는 즐거움은 김추자의 음반을 빠짐없이 찾고 사게 되는 원동력이었다. 김추자와 검은나비의 <내마음은 곱다오>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음반이다. 특히 ‘잊어야 한다면’에서 김추자는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사람처럼 노래한다. 인트로가 끝나고 목소리가 나오는 그 순간은 감탄사 이외의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 과정을 감히 숙성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한 뮤지션 경력을 그래프로 표현하자면 대부분 ‘페이드아웃’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김추자에게 그런 하향곡선을 찾기 어렵다. 그리고 33년 만에 발표한 신보 ‘It’s Not Too Late’에서 그녀는 페이드아웃은커녕 다시 한 번 볼륨을 콱 올린다. 1번 트랙 ‘몰라주고 말았어’와 2번 트랙 ‘가버린 사람아’가 연이어 나올 때, 속된 말로 난 완전히 가버렸다. 연주는 그야말로 ‘헤비’하다. 보통 연주가 육중하면 보컬과 연주가 멀어지기 마련이지만, 김추자는 그런 연주의 밀도를 고스란히 견뎌낸다. 아니, 이겨낸다. 더 섹시하고 더 훵키하게. 신중현과 산울림을 일본에서 처음 들었던 때와 같은 기분 좋은 혼란이었다. “이건 대체 뭐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때만 찾아오는 쾌감이 다시 한 번 생겼다. 계산이 전혀 안 섰다. 그리고 오랫동안 한국 록을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뭘 했는지,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가수의 33년 만의 컴백. 후배로서 이런 얘길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낼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녀 안에서 뭔가 꾸준히 불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숯을 계속 밀어 넣으며 성화를 키우고 계셨구나…. 살다 보면 때가 묻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돈을 벌겠구나, 이렇게 하면 좀 편하게 살겠구나에 대한 방법도 알게 된다. 그것을 좋게 말할 경우, 어른이 된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김추자는 33년 동안 김추자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순수하게.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 성화가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가끔 “이렇게 재능이 없는 내가 어떻게 음악을 계속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한다. 이론도 잘 모르고, 악보를 1백 퍼센트 읽어내는 것도 아니고, 화성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결국은 에너지를 잃지 않아야 한다. 지금까지도 음악에 대한 에너지, 애정만으로 해왔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계속 듣는다. 가끔 이 세상에 음악이 없어지면 어떡하나, 덜컥 겁이 날 때가 있다. 음악과 음반 말고는 재미있는 게 거의 없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음악을 튼다. 새로 나오는 음악엔 이제 기대할 게 없어, 가 아니라 아직까지 뭔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음반을 산다. 그리고 김추자의 <It’s Not Too Late> 같은 음반을 만날 때면 “역시나 아직 음악에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있구나”라며 안도한다. 김추자의 불꽃이 성화라면, 나한테도 촛불 정도는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연주자이자 프로듀서로서, ‘It’s Not Too Late’처럼 흔들리지 않는 음반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한다. 신선하다는 것, 그리고 ‘루츠’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롭다는 건 결국 스스로도, 누구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 하세가와 요헤이(장기하와 얼굴들 기타리스트, 프로듀서)
- 에디터
- 정우영, 유지성
- 포토그래퍼
- LEE SEUNG YOUN, LEE HYUN SEOK
- 기타
- 자료 제공 및 해설 / 최규성(대중음악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