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그런 걸까? ‘88만원 세대’ 라고도 하고, 그저 ‘애들’ 이라고도 한다. 학생이거나, 군인이거나, 마냥 젊은이 거나…. 남산 숲 속에 머물렀던 다섯 청년에겐 어떨까. 푸를 청에 해 년, 그들의 어떤 기록이다.
김성멘은 어젯밤 ‘3단계 톤 조절이 가능한 전기 크로마하프’ 제작에 성공했다.
고장난 코리아 펜더 전기 기타에서 픽업을 분리해 크로마하프 뒷면을 뚫고 장착한 뒤, 그가 좋아하는 재미난 그래픽들을 붙여서 완성했다. 그는 항상 뭘 만들거나, 뭘 만들까 궁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퍼포먼스를 할 땐 흰색 가운을 입기도 한다. 그는 낮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되도록 혼자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밤엔, “여러가지 물건들을 만들고, 수리하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되도록 혼자 있고자 노력”한다. 그는 뮤지션이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시듯이, 그 음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매우 ‘로(Raw)한 건데…”라고 말하고는 미키마우스 입처럼 된다. 몰라서가 아니라 차라리 정의가 불필요해서다. 그는 이미 일본 레이블 ‘파워쇼벨오디오’에서 앨범 <Reasoning Album>을 발표했고, 올여름을 지나면서 자신의 디스코그래피에 두 장의 앨범을 추가할 계획이다. 하나는 국내에서 발표하는 힙합 앨범이고, 또 하나는 일본 YMO 스튜디오에서 YMO 엔지니어와 또다른 두 명의 뮤지션과 함께 소바 배달 시켜먹으면서 했던 잼 세션을 엮은 앨범이다. 그는 새로운가? “취미 정도의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흉내내거나 따라해보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새로워야 할 의무, 적어도 새로운 사람이 되려는 태도를 각성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직 새롭지 않죠. 그래서 창작을 업으로 하고자 한다면 부담이 있어요. 또한 뭔가 새로운 것을 창작해보려는 욕구가 존재하는 한 누구나 젊겠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면 나이와 육체가 젊어도 늙은 거겠죠. 그런 관점에서 나는 젊어요. 젊고 싶고요.” 젊음으로부터 새로움을 분리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골똘한 밤과 일상의 낮이 만든 화음과도 같다. 김성멘은 그런 채 또 다른 걸 만들고, 또 다른 걸 만드는 사람이고자 한다. “깊은 우물을 파기보다는 얕고 다양한 우물을 파 나가는 사람이죠. 우물의 개수가 늘어가는 것이 성장이고 발전이에요. 새로운 우물을 팠다는 것은 첫발을 내디딘 또 하나의 분야가 생겨나는 거거든요? 설레죠.” 뭐든지 자작하는 ‘우물파기 대장’ 김성멘이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픈 세 가지도 있다. “셜록 홈즈, 블로그 제작, 그리고 점토 공예예요.”
소리꾼 남상일은 어제 급성 후두염 진단을 받았다.
“노래 일절 허지 말라고 그러는데, 어제도 한 자락 했어요. 괜찮죠 뭐.” 그가 웃는다. 그저께 영광에서 공연을 마치고 올라와서 된통 몸살을 앓았는데 결국 후두염이었다. 링거를 맞고 오늘 겨우 국립극장 연습실로 출근했다. 그는 며칠 묵은 우편물을 뜯는다. 대개 카드 대금 고지서다. “사람들이 국악 하면 돈 잘 못 벌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일단 국악은 수가 적잖아요. 제 나이 또래 서양 음악 공부한 사람들, 대개 오케스트라 객원 다니거나 예식장 행사 하고 그러죠. 예식장 피아노 치면 3만원 5만원 받고, 오케스트라 객원하면 15만원 20만원 받아요. 근데 국악은 그렇게 안 받아요. 어느 정도 잘 나가는 사람 얘기지만 저도 어디 가서 소리 하면 1백만원은 받아요.” 그는 소위 ‘잘 나가는’ 소리꾼이다. 잘난 체가 아니다. 잘 나가니까 잘 나간다고 하지, 못 나가는데 잘 나간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남상일이 ‘잘 나가게’된 이유는 실력에 덧붙여진 ‘젊은’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판소리하는 사람들은 정통 판소리 아니면 큰일나는 줄 알아요. <시사 투나잇>에 나가는 것도 안 되고, 심지어 창작 판소리도 안 된다고 하죠. 저는 민요를 불러도 팔도민요를 다 부르고 싶어요. 원래 판소리 하는 사람들은 남도소리만 하거든요. 경기민요 하는 사람들은 경기민요만 하고요. 불문율이 되어버렸어요. 게다가 서로를 무시하는 경향도 있어요. 판소리 하는 사람더러는 노상 어허허 거리면서 걸걸한 소리나 내쌌는다 그러고, 경기민요 하는 사람들보고는 만날 에에에에 거리면서 씨름판 잔칫집에서나 부른다 그러죠. 그게 아니죠. 저는 이 소리 저 소리 다 하고 싶어요. 멀티 소리꾼이랄까요?” 생강이 많이 나는 전주 근교 봉동에서 유난히 울음소리가 우렁찼던(그의 부친이 녹음해 놓은 테이프가 박스로 있다) 아기는 곧 ‘소년 명창’소리를 들었고, 동아 콩쿠르에서 장원하고(군대 면제라는 또 하나의 쾌거), 국립창극단 단원이 되었다. 그는 소리만 하면서 살았고 늘 곁에는 한복 입은 어른들이 계셨다. 그에게 ‘동세대’를 물었다. “군대도 4주 훈련만 다녀왔어요. 일반적인 20대의 삶을 살진 않았죠. 그래서인지 동세대 하면 오히려 나와는 다르구나라고 느끼는 편이에요.”그는 다만 소리꾼이다. 소리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진심이라고 했다. “굳이 동세대를 느낀다면 창작 판소리를 만들어서 이 시대의 얘기를 들려줄 때에요. <10대 애로가>, <노총각 거시기가> 같은 걸 할 때 관객들 반응이 가장 열정적이에요. 심청이 춘향이는 좋기는 해도 단박에 와 닿진 않잖아요.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더 교감할 수 있다는 걸 느끼죠.” 또한 그는 싸운다. 판소리에 대한 판에 박힌 듯한 생각들과 맞선다. “어디 가서 소리한다고 그러면 다들 그래요. 똥물 마셨봤어요? 피 토했어요? 폭포 갔어요? 한 많으세요? 저는 한 없어요. 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인정받고 돈 버는데 그렇게 복받은 사람인데요.” 전주사투리가 슴슴히 배어 있는 그의 느릿한 말투는 사실 귀로 들어야 제 맛이다. 웃긴 얘기가 아니어도 듣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샌다. ‘당신은 새로운가?’라는 질문을 했다. 그는 대번 정색하며 말했다. “안 새롭죠.” 그럼 혹시 자신의 나이가 몇 살쯤이라고 생각하느냐고 1979년생 남상일에게 물었다. “한 마흔 정도 될랑가요?”
노정태는 6월 12일, 자신의 블로그에 ‘6월 10일, 그리고 그날 이후’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모인 것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가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사건은 결국 하나의 원인에 기인한다. ‘비폭력’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일반 시민’들의 패배주의가 <오마이뉴스> 등의 진보 상업주의와 만나, 축제의 형식을 띤 투쟁이 아닌 투쟁의 외양을 흉내내는 축제를 낳았고, 그래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도 파업이 시작되고 있다. 그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도 전례 없이 높다. 촛불시위대는 파업 노동자들의 옆에서, 촛불을 들고 사수대를 뛰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바 ‘공공성의 복구’를 실어 나르는 신문팔이 소년 소녀가 되어야 한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토론하며 철옹성을 넘어설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할 일이 너무도 많다. 비폭력 패배주의자들과 다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능동적이지 않을 사람들은 이명박이 만들어준 청계천으로 돌아가라. 불복종 없는 비폭력은 투항일 뿐이다. 본격적으로 제2라운드가 시작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똑부러진다. 마냥 뜨겁지 않다. 들뜨지 않는다. 그는 정확하려고 한다. “노정태는 어떻게 젊은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일단 나이가 젊죠,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화가 납니다. <개그콘서트>나 <웃찾사>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웃는 사람들을 봐도 화가 나요. 왜 저렇게 기계적으로 웃을까, 나는 보고 화가 나는데, 왜 웃을까. 극장에서,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를 보면서 웃는 사람들을 봐도 화가 납니다. 가령 <데어 윌 비 블로드>에 “I drink your milkshake” 운운하는 대사가 나오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목사를 때려죽이죠. 그 장면을 보고도 사람들이 웃습니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고 거기에 빨려들어가는, 그런 어려운 일을 하는 대신 그냥 웃어넘기는 거죠. 저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젊은 육체를 뒤집어쓰고 있는 노친네들이라고 봅니다. 진지한 감상과 치열한 해석을 요하는 영화, 문학, 산문, 시 등을 보면 “와하하하” 때우려 들죠. 기계적인 반응을 하면 편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남산 분수대 옆 벤치에서 노정태가 <Foreign Policy> 한국어판의 편집장 명함을 건넨다. 얼마 전까지 그는 김수현과 임성한과 김은숙과 최완규 등에 대해 얘기하던 <Dramatique>의에디터였다. 요샌 드라마를 아예 보지 않는다. 어떤 판단에 의해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온 세계가 한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그건 한국인들을 털어먹기 위한 음모, 영국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근데 그건 정말 아니거든요. 물론 <FP>가 미국 잡지니까, 미국적인 시각일 뿐이라고 하면 따로 할 말은 없습니다만, 적어도 이 매체를 다루면서 시각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그는 입술이 트실트실 부르텄다. 20대의 섹스에 대해선 “놀랍게도 섹스를 하고 나면 착해진다.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것같다”고 말하고, 군대는 미필인채 “가고 싶지 않은 곳, 무조건 모병제가 답이라고 할 수는 없고, 북유럽 수준으로 6개월 이하의 징병제가 제일 적절할 듯싶다”고 답한다. 사실, 그는 책을 많이 읽는다. 그가 가장 많이 들고 다닌 쇼핑백은 서점에서 지급되었다. 바흐를 좋아하는데 갓 입문한 수준이고, 옷에 원색이 쓰이는 것까지는 좋지만 복잡한 무늬는 피하는 편이며, ‘왜냐하면’으로 시작한 문장이 ‘때문이다’로 끝나지 않으면 불안하고, 소설 중에는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제일 좋아한다. 누군가에게 단 한 권의 책을 권해야 할 때 플라톤의 <국가>를 떠올리는노정태는 자신이 앞으로 나간다고 생각한다. “2003년의 나는 2008년의 나와 토론해서 이길 수 없습니다. 진보하고 있나봐요.” 웃으면 얼굴이 조개를 잡은 보노보노처럼 된다.
날씬한 홍석우는 우연히 만날 때마다 탈색된 것 같은 ‘무표정’이다.
그는 낮에 복합 공간 데일리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MD다. 편집 매장에서 판매되는 의류와 서적 바잉에 관련한 전반적인 일을 한다. 그 사이 드문드문 개인적으로 만드는 인터넷 사이트 ‘당신의 소년기’에 업데이트할 사진을 찍기도 한다. 밤은 다르다. “술자리가 요즘 부쩍 잦아졌어요. 만화책을 포함해 책을 읽고, 가끔 파티에 가고, 대부분의 시간은 잠을 자죠.”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오늘은 “비가 그친 후 쌀쌀해진 바람에 아직은 재킷을 입을 수 있겠다는 행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는 그는 ‘옷’이 좋아서 ‘옷’에 관한 일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길거리에서 스트리트 패션 스냅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사실은 그 자신의 옷차림이 ‘열 명 중한명’이라는 뉘앙스로서 눈에 띈다. 브랜드와 브랜드와 브랜드와 디자이너와 디자이너와 패션과 또 패션…. 그러는 동안 그는 ‘옷’으로부터 어떤 ‘문화’라는 광활함에대해 함께 생각하고자 했다. 데일리 프로젝트에서의 일은 그 생각에 긍지와 불안을 동시에 던져주고 있다. “새로운 디자이너 브랜드라든가, 새로운 책 같은 것을 발굴해서 소개하고,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좋은 반응을 보일 때 뿌듯함을 느낍니다. 지난 3월부터 한 달간 진행했던 잡지에 관한 전시 <인디펜던트 나우>처럼 어떤 걸 기획해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고, 또한 그것들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때 특히 긍지를 갖게 되죠.
그럼에도 아직 뚜렷하게 이게 내 길이다라고 할 만한 것을 발견하진 못했어요. 대강의 그림을 그리지만 소모적으로 일한다고 느낄 때, 일로 인해 얻은 것만큼 잃어버린 것들이 생각나니까요. 넘기 힘든 큰 벽들을 느낄 때마다 지금의 나를 믿자고 되새기긴 하지만, 두렵죠.” 그는 좀 더 ‘개인적인’ 영역으로부터 발견되고 또한 진보하길 원하는 걸까? 취향이란 어쩔 수 없이 ‘공유’되지 않으니, 결국 ‘나 자신’을 여럿 중에 하나로 두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양한 것들 중의 어떤 것이 되고 싶고, 서로 다른 것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이고 서로 소통하고, 존중하고 점점 늘어나면 좋겠어요. 그래서 내 취향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어요. 다만 편집 매장의 MD라는 직업은 좀 더 포괄적인 사람들의 취향에 대해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내 취향보다 남들을 더 생각하게 될 때도 있지요. 팔릴까, 안 팔릴까 같은 문제죠. 그 외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어떤 ‘무표정’은 홍석우의 얼굴에만 있는 게 아니다. ‘패션’ 어쩌구 하면 으레 떠오르는 요란한 것들로부터 그는 거리를 둔다. 그의 ‘무표정’은 분노와 고민과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을 얘기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럼 ‘새로움’에 대해서는? “내가 그리 새로운 것 같진 않아요. 내가 새롭다고 느끼면 그것에 대해 어떤 강박이 생길 것 같거든요. 그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 현실감각 제로의 정부와 청와대를 용서할 수 없다면서, 그는 또 한 번 ‘무표정’으로 인사를 마치고 남산도서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어디로 가는지 트렌치코트에 매치한 형광 노랑색 모자가 공기중을 둥둥둥 흘러갔다.
사진가 최다함은 지금 논산훈련소에 있다.
그는 오늘 오뉴월 땡볕의 각개전투 교장에서 한바탕 ‘구르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입소하기 전엔 사진을 찍었다. 도시에서 도시를 찍었다. 그 사진은 청청하고 깊었다. 어떤 ‘치기’ 대신 세심하고 차분하게 셔터를 눌렀다는 감각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유난히 희고 납작한 운동화를 신고 남산에서 촬영한 일주일 뒤, 최다함은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갔다. 대한민국 젊은 남자 60만 명이 모여 있다는 유명한 곳으로. 에디터가 보낸 질문 메일을 대신 열어본 그의 여자친구는 “다함이가 군대에 갔어요. 어떡하죠?”라고 대신 답장을 보냈다.
- 에디터
- 장우철
- 포토그래퍼
- 한동호
- 어시스턴트
- 김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