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주말은 모닝 샴페인과 함께 영화 <녹색 광선>을 본 것부터 시작됐다. 이미 아는 내용이지만 갑자기 델핀 생각이 나서 도츠 샴페인과 호두 몇 개를 차린 후, 틀어두고 다른 짓도 좀 하면서. 델핀은 혼자 있는 게 싫지만 타인과 적당히 어울리는 것도 못 하는, 예민한(남들 눈에는 난처한) 여자다. 길에서 갑자기 냅다 울기도 하고 “난 가진 게 없는데 왜 사람들은 자꾸만 나에게 뭔가를 보여달라고 할까”, 어쩌자는 건지 모를 원망과 자책도 한다. 에릭 로메르가 80년대 비아리츠 해변의 여름을 다 끌어모아 푸르게 칠한 영화 <녹색 광선>은 델핀의 ‘서머 다이어리’라고 해도 좋겠다. 바다, 여름 빛, 들풀, 샤도네이 냄새가 빼곡하고, 보는 내내 들뜨고 실수하고 후회하고 못 잊는 여름의 기분이 심장에 콱 박힌다. 델핀이 그토록 기다리는 녹색 광선은 해 질 무렵 수평선에 나타나는 얇은 녹색 띠로, 찰나를 관측하기 어려울 뿐 실제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다. 녹색 광선을 보게 되면 그때 함께 있는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고, 그 순간 타인에 대한 헛된 기대와 거짓말은 다 사라진다(고 전해진다). 무지개를 보면 행운이 온다든지 유성을 찾으면 꿈이 이뤄진다든지 하는 식의 귀여운 주술 정도겠지? 영화는 델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정말로 재미있고, 그게 아니면 뚱딴지, 오리무중이다. 그러고 나서 노래를 들었다. 오해하기 쉬운 이름이지만 시벨레는 아름다운 브라질 여자다. 시각 예술가이자 뮤지션이고 ‘그린 그래스’라는 휘파람 같고 새벽 바람 같은 노래를 불렀다. 나긋나긋 속삭이듯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꼬리를 밟힌 돼지처럼 날뛰던 마음도 차분해진다. 포에틱한 표현 때문에 잘 지은 시 한 수 같지만, 결국은 아주 솔직한 사랑 노래다. “Remember When You Loved Me”라는 구절이야말로 모든 연인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마음. 한편, 메이어 호손의 이름은 낯설어도 얼굴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앗,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하는 순간 전설의 신스팝 듀오 턱시도가 오버랩된다. 턱시도 둘 중 머리숱이 더 많은 남자, 그가 호손이다. 펑키와 클래식 재즈를 영리하게 혼합한 네오 소울이란 평단의 극찬을 받지만, 그런 거창한 설명 없이도 ‘그린 아이드 러브’를 들으면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목록 먼저 적게 된다. 음악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두 곡의 뮤직비디오도 아주 좋다.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도 송두리째 집중하게 하는 힘은 같다. 온갖 감정으로 마음이 흠뻑 젖는 기분이 들어서 나른하게 있다, 노래 제목에 둘 다 ‘그린’이 들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군, 갸우뚱해졌다. 녹색 광선과 녹색 잔디와 녹색 눈동자. 참, 두어 잔만 마시려다 결국 다 마셔버린 도츠 샴페인 병도 녹색이었지. 내친김에 하이네켄을 몇 캔 딸깍딸깍 따면서, 녹색 주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녹색은 생명의 색, 낙원의 색, 성장과 번영의 색이라니 좋은 일이 왕창 생기려나 순진한 기대도 해봤다. 그보다는 그린이야말로 계절의 색깔이니까 여름을 기다리는 마음이 커져서 이런 일이 생겼단 게 더 맞겠지만. 저녁에 창 밖으로 해가 지는 걸 보면서 아침에 본 영화 생각을 다시 했다. 델핀은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마음이 안 가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게 맞는 걸까?”
- 편집장
- 강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