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세계에 인간은 가장 늦게 도착했다. 식물을 가꾼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식물을 가꾸는 사람’으로 성장해 나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꽃집을 하신다. 나는 꽃에 트라우마가 있다. 매년 2월 졸업식. 새벽 5시마다 벌어지는 교문 앞 꽃집 자리 전쟁. 아버지의 실랑이로 자리를 사수하면 꽃이 얼기 시작한다. 동트면 좀 낫다. 오전 10시. 두 손, 겨드랑이까지 꽃다발을 끼고서 내가 꽃이 되어 학부모를 유혹한다. “어차피 찍고 말건데 아무거나 사. 저거 만원이네.”, “비누꽃은 없어요?” 꽃으로 하는 대화가 서툴렀던 소년에게 단비 같던 한 신사의 기억. “오늘 제 딸 졸업식입니다. 여기서 제일 예쁘고, 가장 비싼 아이로 주세요.” 식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타인을 대하는 자세를 짐작할 수 있다. 교문에서 배운 공부였다.
파도식물의 한 직원은 제주 구좌읍 세화리에 산다. 구좌는 당근이 유명하다. 당근밭에 세워진 빌라. 그야말로 당근 뷰다. 바람이 어찌 노닐다 가는지 당근 잎을 보면 알 수 있다. 8월이면 파종이고 곧 한 번 솎는다. 제주 할망들이 일렬횡대로 밭을 장악해 솎고, 뽑으며 나아간다. 땅에서 낙오한 당근 몇을 직원분이 주워왔고 우리가 관리하는 단지 중앙정원에 이걸 꽂았다. 해를 넘기니 싹을 귀여워할 새도 없이 줄기가 가슴팍을 넘는다. 5월, 흰 꽃이 만발이다. 지금 이놈은 작은 무 크기가 되어, 다리를 꼰 주황빛 인삼처럼 보인다. 기웃대길 좋아하는 나는 한 날 제주 오일장 할망이 들고 나온 당근 한 소쿠리를 샀다. 3천원. 돌아와 놀고 있는 화분에 심고 물을 줬다. 잠깐 볕 쬐려 가게 밖에 두었더니 야외가 소란스럽다. “이 당근 판매하시는 거에여?”(이걸 사겠단 말인가!) “(침착하게) 아 네. 이 당근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렇게 가게는 당근마켓이 되어갔다. 새로운 즐거움이라면 당근을 분양받은 친구들의 이름 짓기 구경. 아끼는 열 살 터울 동생의 당근은 캐럿 캐에 이름은 퓨레, 캐퓨레. 같은 단지에서 일하는 한 여직원은 무와 당근은 친구이고, 그 뿌리가 살아 있어 언젠가 피어날 테니 뿌리 근根자를 써 ‘근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이름대로 마음이 가는 건지 근무는 썩어 죽었고 다음 아이의 이름은 사랑 애愛를 붙여 ‘퇴근후애’가 되었다. 잘 산다.
제주에 숍을 내는 것을 반대했다. 돌보다 많은 게 꽃집이었다. “여행 와서 잘도 사겠다!” 나는 무지했다. 한남동 한복판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다 이젠 팔도 손님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그들이 계산하는 것은 화분이나 식물 따위가 아닌, 낯선 타지에서 식물을 골라보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둘 공간을 상상하고, 식물을 안고 비행기를 타보는 경험(식물 엑스레이 사진을 보셨는지?)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항공 포장 전문가가 되었다. 반려식물이나 플랜테리어, 홈가드닝 등의 단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초록빛 관심이 늘어가고 있음은 최남단 섬에서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린 크리에이터들의 다양한 취향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는 것 역시.
2021년, 코로나 베이비들이 두 살을 맞는다. 사람들은 각자 주안상을 차려 랜선으로 회식을 하고, BTS 콘서트를 보고, 유튜브로 부장가아사나를 배우고, 밥을 짓는다. 방에서 세상을 살아내는 중이다. 역力동적이 아닌, 역逆동적으로 산다. 마치 서 있는 여행자, 식물처럼. 드넓은 초원을 이동하며 살아가던 인류에게 ‘공간’이라는 개념이 생긴 역사는 길지 않다.
건물에서 잠을 깬 우리는 건물로 들어가 일하고, 또 다른 건물에서 커피를 마신다. 생활한다. 빛이 들고, 물이 나온다. 오수가 처리된다. 바람을 막아주고, 뜨끈하게 때론 선선하게. 모든 것이 충족된 공간에서 알 수 없는 삭막함과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나는 이것을 ‘나무(자연)를 향한 인간의 근원적인 그리움’이라 생각한다.
“도면에는 표시되지 않는 벌과 나비, 새들을 부르고 싶습니다.” 디앤디파트먼트 제주 조경 기획서에 이렇게 썼다. 여린 하귤나무 새순이 조파나무 진딧물도 부르고, 탑동 해안가가 태풍도 불러준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벌은 새벽에, 새는 아침에, 나비는 오전에 차례로 우리의 정원을 제 식대로 즐기다 간다. 다음은 사람이 붙는다. 숨을 공간이 많은 옥상 정원. 나무 사이로 사람 발 하나가 아래서부터 스윽 올라온다. 점심시간을 틈타 몸을 리셋하는 한 여직원의 요가다. 커피를 들고, 헤드폰을 쓰고, 책을 끼고 사람들은 식물 곁으로 간다. 패션 화보를 찍으러 온 쇼핑몰 친구들은 그럴싸한 벽을 배경으로, 연인들은 서로를 앵글에 식물이 걸리도록 담아준다. 할아버지 분재놀이의 어렴풋한 추억, 피부가 쩍쩍 갈라지는 사무실 자리에 생명이 함께하는 안도감, 황사 철마다 검색률이 올라가는 식물에 바라는 어떤 기능적인 기대.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애호愛好. 재테크의 수단. 누구나 저마다의 식물 스토리는 있다. 공간 연출의 관점으로 본대도 마찬가지다.
식물은 공간 스스로 표정을 짓게 한다. 때론 주인의 취향과 생명에 대한 마음 씀씀이를 표현하는 무언의 장치가 되기도 한다. 주연이거나 조연의 역할일 때나 우리 구역의 테마를 말없이 완성시켜간다. 그래서 건축 안에 조경이 있고, 조경 안에 건축이 있다. 주말마다 8만~9만 명을 맞이하는 더현대서울이 사운즈 포레스트로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짧든 길든 공간마다 스토리는 있다. 그래서 식물은 공간의 메시지다.
다이소는 물론 이마트, GS25에서도 가드닝 코너를 만나는 요즘. 어떤 식물을 얼마나 들일까가 아닌 어떻게 식물에게 다가가면 좋을까? 새로 산 USM 선반을 자랑할 사진을 찍으려고 식물을 찾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카페, 게스트하우스, 뮤직 바, 리조트, 라이프스타일 숍…. 부적처럼 식물만 놓으면 손님이 철썩 붙을 것 같다 생각하는 대표님도 있을지 모른다. 기다리자, 천천히 씨방을 부풀려, 파도에 씨앗을 띄울 준비를 하는 모감주나무처럼. 하루에 1미터씩 키를 키워내기 위해, 4년 동안 뿌리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맹종죽처럼. 기다리자, 식물을 내 공간에 초대하고 싶은 건지, 식물을 결제하는 나를 즐기고 싶은 건지 모른다면 기다리자. 많을 다多에 고기 육肉을 쓰는 다육식물은 건기를 버텨야 했다. 그래서 기다리는 힘을 위해 몸에 물을 가둔다. 느려도 탄탄하게 자란다. 식물은 빛이 밥이다. 밥이 부족해도 사람은 자란다. 마찬가지다. 빛이 부족해도 다육식물은 자란다. 다만 호리호리한 모습으로 묽게 성장한다. 이걸 ‘웃자람’이라 표현한다. 대한민국은 웃자랐다. 즉각, 즉흥, 즉석의 시대. 기다림이라는 가치는 시시하고 뒤떨어진 것일까? 허무와 불안이라는 곰팡이가 피기 유리한 환경이다. 그런 점에서 고독사 예방을 위해 부산시에서 시행한 1인 가구 식물지원사업은 많은 바를 시사한다. 헤르만 헤세는 저서 <정원 일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나무의 세계에 인간은 가장 늦게 도착했다. 현관 앞에 달려와 있거나, 몸을 비비거나, 배가 고프다 보채지 않는다. 식물은 그냥 거기 있었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식물에게 물을 주고, 잎을 다듬고, 벌레를 살피고, 주변을 청결히 한다는 것은 나를 보듬고, 내 마음에 물을 주는 것. 결국 겸손한 나를 내가 가꾸어 가는 게 아닐까? 그래서 되려 식물이 사람을 ‘식물을 가꾸는 사람’으로 키우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말없이 묻는다. 기다렸냐고. 나를 보라, 나를 보라. 침묵하고, 생존하라. 너는 네 할 일만 하라 말한다.
- 글
- 복창민(파도식물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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