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허장강, 미로 같은 남자

2014.11.04GQ

긴장과 이완의 폭이 얼굴 안에서 등압선을 만든다. 약하든 세든 그의 얼굴에선 이리저리 사방으로 바람이 분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다들 허장강만 못해.” 어떤 남자 배우의 연기를 말할 때마다 마지막엔 꼭 이 말을 했다. 허장강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배우 허준호의 아버지라는 것과 쉰세 살이 되자마자 심장마비로, 동대문운동장에서 축구하다가 급사했다는 사실, 두 가지뿐이었다. 고백하자면 엄마의 회상이 흔히 어른들의 미화된 기억, 과대평가일 뿐이라고 단정했다. 매번 더빙을 하고 겹치기 출연이 일상이던 1960~70년대 영화에서 ‘성격파 배우’라는 수식어는 평생 조연만을 맡은 배우에게 주는 훈장, 애써 만든 상은 아닐는지. 그 의심으로 엄마의 습관을 대했다.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온 어느 날, 엄마는 또 그 말을 했다. 불현듯 대체 ‘왜?’라는 의문이 들었다. 단지 1960~70년대 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엔 엄마는 지금도 영화를 꽤 많이 보는 21세기 관객이었다. “더빙인데 연기가 좋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어차피 성우 목소리잖아요.” “눈빛이 다르지. 요즘 배우들은 내지르긴 해도 얼굴에 뭔가를 품고 있진 않아.” “그 뭔가가 뭔데요?” “뭔가가 뭔지 알면 뭔가니?”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모자母子가 나눈 대화는 생생하다. 처음으로 배우에게 필요한 건 그 ‘뭔가’가 아닐까 의심했기 때문이다. 의심은 계속됐다.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하 <놈놈놈>)이 개봉했을 때,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은 다트 게임으로 따지면 중앙이 아닌 맨 바깥쪽만을 맞춘 영화였다. 통쾌하게 가운데를 맞추지는 못했지만 각 구역 점수에 ‘곱하기 3’을 하는, 말하자면 주변을 맞췄지만 꽤 많은 점수를 획득한 영화였다. <놈놈놈>이 정중앙을 맞추지 못한 아쉬움은 결국 <쇠사슬을 끊어라>로 이끌었다. 하지만 영화보다 먼저 본 건 그 영화에 대한 비평. 영화보다 비평을 먼저 보는 건 편견이 생기니 언제나 악수에 가깝다. 대부분의 비평은 허장강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주를 이뤘다. 그 사실에 의심부터 들었다면 끝내 내 고약한 성격을 고백하는 걸까? 하여튼 허장강에 대한 관심은 그의 연기를 부정하고 싶은, 어쩌면 과거 한국영화에 대한 과대평가와 단절하고 싶다는 목표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난 그 이후로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인지 고민할 때마다 허장강의 연기를 떠올린다. 그 뭔지 모르는 매력, 정의할 수 없는 품위가 배우에게 있는지 없는지가 기준이 된다. 그는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미스터리’를 말할 수 있는 배우다.

 

<쇠사슬을 끊어라>에서 허달건(허장강)이 말을 타고 등장한다. 얼룩말 코트에 높게 솟은 중절모를 쓰고 빨간 스카프를 한 채. (허장강은 빨간 넥타이를 좋아했다.) 술집으로 들어가 여자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한다. “한잔 따라.” 여자 얼굴을 보며 다시 대사. “어! 마차를 기다리는 손님이군. 실례했소. (혼잣말이지만 들리게) 한잔 좀 따르면 어때? 여자가.” 등장부터 어떤 동의도 구할 수 없는 악당이자 마초. 하지만 허장강의 얼굴엔 익살이 있다. 단지 밉지 않다고만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짜면서 매운, 묘한 맛이 있다. 그 맛은 얼굴로 낸다. 얼굴의 눈과 눈썹, 미간과 이마를 윗부분이라고 하고 입과 턱, 볼을 아랫부분이라고 나눈다면 허장강은 위아래 부분으로 동시에 아주 상반된 감정을 표현한다. 사실 이건 별거 아닐 수도 있다. 지문으로 말하면 ‘눈은 째려보면서 입은 웃는다’, 정도일 텐데 막상 이 연기가 ‘어색하지 않게’ 하는 능력은 다른 문제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만 턱은 분노하고, 미간은 찌푸리지만 입술엔 슬쩍 미소만 짓는다. 그 얼굴로 캐릭터의 경계를 예상 밖으로 넓힌다. 영화에서 다른 두 주인공 철수(남궁원)와 태호(장동휘)와 만나 함께 지내는 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호한 상황, 달건이 같은 앵글 안에 있는 철수를 보고, 프레임 밖에 있는 태호를 차례로 볼 때, 미스터리는 순식간에 팽창한다. 오밤중에 자다가 발에 쥐가 나듯이 순식간에 찾아오는 마비다.

 

그의 연기에서 기묘한 감정이 느껴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배우가 그렇듯이) 눈 때문이다. 평상시 허장강의 눈엔 검은 동자만 있다. 덕분에 뭘 응시하는지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한데 불안하지 않다. 그의 입이 천연덕스럽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뾰로통하든 입꼬리를 올리든지 뭐라도 하기만 하면 안심이 된다. 하지만 그건 못 보던 표정이다. 눈빛을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입만 따로 움직이니 감정을 알 수 없다. 얼굴의 위아래가 상반되게 극단으로 치달으면 쇼트는 단박에 굳는다. 그러다 그의 얇은 눈이 두 배로 커지면 흰자가 드디어 나타난다. 그건 사건의 암시, 혹은 맥거핀, 아니면 그 둘 모두. 흰자가 보일 때만 그가 뭘 응시하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긴장과 이완의 폭이 얼굴 안에서 등압선을 만든다. 약하든 세든 그의 얼굴에선 이리저리 사방으로 바람이 분다.

 

배우에게 얼굴은 무기, 깨고 싶은 기록, 함락되고 싶지 않은 벽, 결국 그 모든 것. 한편 배역을 결정하는 단하나의 조건. 허장강은 그의 별명이 ‘코장강’일 정도로 긴 코와 두꺼운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 때문에, 당시의 전형적인 미남에서 벗어나 있다. 그 탓에 주인공보다는 악역과 조연을 주로 했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주연만 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는 성우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맡기지도 않고, 대부분 자신의 목소리로 후시녹음을 했다. 당시엔 아주 소수의 배우만이 자기 목소리를 고집했다. 이마저도 신념만으로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주연으로 그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면 녹음만 하다가 끝났을 테니까. 그는 잘생기지 않은 얼굴 때문에 연기를 단련할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얻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주 노출되었는데도 그의 많은 연기는 신비로운 배역으로 남았다. (배우가 아니다.) 스스로 스타로서 신비로워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각각 독립시켰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많다. 진중하게 연기하는 배우도 많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을 미로로 만들어 배역을 가둔 건 허장강이 유일하다 느낀다.

 

1958년, 그의 초창기 작품인 <종각>을 다시 본다. 그 영화에서 문정숙과 허장강이 한복을 입고 발을 물에 담그고 있다. 둘은 가만히 종소리를 들으며 앙상블 연기를 한다. 난 두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허장강이든 문정숙이든 어떤 배우이든 초창기 한국영화에서 뛰어난 연기가 있었다고 미화하고 싶지 않다. <종각>보다 15년 전에 할리우드에선 <카사블랑카>를 만들었고, 같은 해엔 <벤허>를 찍고 있었다. 하필 눈에 띄는 건 두 배우의 눈썹이다. 두껍고 짙다. 둘의 눈썹이 움직일 때마다 기이한 분위기를 만든다. 난 그게 뭔지 정의할 수 없다. 그냥 당시의 흑백 필름과 한복과 “종쟁이가 될까 봐”하는 순정적인 대사 사이에서 두 얼굴이 만드는 굴곡이 예상치 못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느낄 뿐이다. 의도하진 않았을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영화라는 매체를 처음 대하는 순수한 태도로 눈치 보지 않고 사방으로 기를 뻗치며 연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허장강과 문정숙이 만들어낸 그 순간이 어떤 건지 몰라도, 아름답다. 어떻게 하면 지금 그런 순간과 마주할 수 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뭐가 뭔지 모르는 걸 당당히 여기는 것, 그런 충돌을 그대로 두는 것, 그게 미스테리이며, 그 증거를 허장강의 얼굴에서부터 찾았다.

    에디터
    양승철
    ILLUSTRATION
    안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