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은 산뜻하게 진지하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 결코 시시한 적 없듯이, 그렇게.
GQ 오늘 촬영 컷 보면서 생각나는 거 없었어요?
JH 음….
GQ 쿠바, 아바나요. 마침 어제 <트래블러> 마지막화 보고 잠들었는데, 모로요새에서 석양에 물든 제훈 씨 얼굴이 오늘 현실로 나온 것 같지 뭐예요.
JH 하하하 맞네요. 그러네요.
GQ 화보 찍을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는 걸 좋아한다고요. 오늘 스스로 발견한 얼굴이 있나요?
JH 제 입으로 말하긴 쑥쓰러운데. 평소보다 좀 성숙한 얼굴이랄까요. 촬영 내내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떠올렸어요. <리플리>로 리메이크되었던.
GQ 알랭 들롱 말이죠? 제훈 씨 몸에는 <모범택시>의 김도기 흔적이 잔뜩 남아 있는 것 같아요.
JH 아직 김도기를 떠나보내지 못했어요. 어제도 무지개운수 동료들과 회동했거든요. 배유람 배우의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여수네 한상’이란 식당에서. 홍어가 아주 맛있는 곳이에요.
GQ 무슨 얘기 나눴어요?
JH <모범택시> 결말 이후 이야기는 어떻게 될 것 같냐, 우리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등등.
GQ <모범택시>의 인기가 대단했죠. 감독이 <그것이 알고 싶다>를 연출한 박준우 PD란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JH 실제 사건을 많이 참고한 작품이라 실제 피해자나 비슷한 사례를 겪은 분들의 아픔, 울분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야기를 재미로만 휘발시킨다면 안 만드니만 못 하다고 생각했죠. 진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태도나 자세에서 감독, 제작진과 한마음이었어요. 작품을 선택한 큰 부분 중 하나가 감독님이었어요.
GQ 감독과 어떤 고민들을 많이 주고받았어요?
JH 김도기는 해결사같이 나서는 인물이죠. 원테이크로 시퀀스를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액션 준비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감독님의 주문이 있었어요. 본격적인 액션 연기는 처음이었고, 타격감 있는 액션을 시원하게 보여주고 싶어서 굉장히 준비를 많이 했어요. 많이 들떠 있었죠. 그런데 스태프 모두 안전에 만전을 기하다 보니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부분도 있어요.
GQ 처음에 대역 논란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죠.
JH 속상하고 안타까웠어요. 감독님을 비롯한 제작진도 너무 미안해하셨고요. 그래도 배우는 그런 피드백에 책임이 있으니 무게감을 느끼면서 더 잘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죠. 논란 이후엔 주변을 안심시키면서 촬영을 이어갔어요.
GQ 속상해도 좀처럼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편이죠?
JH 움츠러들고 힘들어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아요. 시간이 지나 잊힐 수는 있겠지만. 작품은 진행 중이고, 그 안에서 더 보여주고 노력할 부분이 있다면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죠.
GQ 김도기라는 캐릭터는 매 에피소드마다 다른 부캐를 연기했어요. 매번 이렇게까지 진심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몰입이 대단하던데요.
JH 연쇄살인마에게 어머니를 여의고 비참하고 처절한 인생을 살아가는 김도기와 각 에피소드의 해결 과정 속에서 김도기가 연기하는 수많은 언더커버의 모습은 분명 간극이 커요. 시청자를 어떻게 설득하며 나아갈 수 있을까, 당위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대사를 하나 추가했죠. “엄마, 진로 결정했어. 육군 사관학교 가기로. 원래 나 연극영화과 가고 싶었잖아.”
GQ 그게 원래 대본엔 없었다고요?
JH 네. 제가 표현하고 싶다고 해서 넣은 거예요. 배우를 꿈꿨던 어린 시절이 뒷받침되어야 김도기가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평소에 해보고 싶은 역할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놨는데 이번에 많이 써먹었어요. 조선족 왕따오지, 너드 같은 회사원도 다 거기서 나온 거예요. 다행히 감독님은 변화에 늘 열려 계셨고요.
GQ <모범택시> 직전의 <무브 투 헤븐> 역시 뜨거운 사랑을 받았죠. 동시대 구석진 삶의 이야기란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어요.
JH 배우로서 시나리오에 텍스트로 적힌 것 너머 그 인물의 삶을 추적하다 보면 자연스레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돼요. 지금 대한민국은 혐오에 대한 이야기로 팽배해요. 양극단의 충돌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돼요.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 서로 이해하고,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반드시 작품 선택으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모범택시>와 <무브 투 헤븐>을 선택하는 시야로 확장되는 데 저도 모르는 사이 작용했을 거예요.
GQ 최근엔 자신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면서요.
JH 왓챠에서 연말에 공개할 단편 영화예요. 박정민, 최희서, 손석구 배우가 연출하는 작품 네 편이 동시에 공개돼요. 기획, 제작, 연출까지 하려다 보니 머리가 좀 아파요. 왜 이걸 하자고 했을까!(웃음)
GQ 어떤 부분이 가장 아프죠?
JH 시나리오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 뒤 피드백을 받잖아요. 아…. 그때 감정이 되게 오르락내리락하더라고요. 보여줄 땐 쿨하게 말하죠. “어떻게 봤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줘.” 단점을 말하는 솔직함은 아파요. 폐부를 찌르는 느낌이에요. 이런 경험을 하는 제 자신에게도 놀랐어요.
GQ 도대체 어떤 피드백을 받았길래?
JH 시나리오는 20~30대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소재, 주식에 대한 이야기예요.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과 행복, 패배감 등을 겪어나가는 과정인데, 직접 경험한 자와 아닌 자의 갭에서 오는 공감의 차이가 있죠. 고민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보는 분들이 공감하면서도 뾰족하게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요.
GQ 피드백을 수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독으로서 확신이 있다면 밀고 나가는 것도 중요할 텐데요.
JH 그렇죠. 그래서 어느 순간 피드백에 대해 제가 대변하고 있더라고요. 이야기의 너머엔 이런 이야기가 있고, 이 장면은 이렇게 표현될 것이며, 단순히 텍스트 그대로가 아니라 행간을 읽어달라, 연출은 이렇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GQ 직접 출연도 하나요? 한껏 몰입했다가 갑자기 “컷!” 외치는 장면 상상하니까 좀 흥미로워서요.
JH 그 모습을 제가 보고 싶지 않아서 출연은 안 하고요.(웃음) 연출에 좀 더 집중하고 싶었어요.
GQ 최근에 어디선가 그랬어요. 감독으로서 스스로에게 역할을 준다면 돌아이 역을 맡기고 싶다고.
JH 맞아요. 하하하하!
GQ 그것은 도대체?
JH 저는 이야기를 볼 때 개연성을 굉장히 중요시해요.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 그것이 성립돼야 빠져들어 연기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게 어디 그런가요?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들도 있고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해서 다 알 수도 없는 노릇이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연기하며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어요. 흔히 말해 ‘저 세상 텐션’?
GQ 그런 모습이 스스로에게도 있다고 느껴요?
JH 네 분명. 지금 막상 생각하려니 안 떠오르네.
GQ 이쯤 되니 이제훈을 북 치고 장구 치게 만든 제작사 ‘하드컷’이 궁금해요. 이름부터 퍽 멋져요.
JH 20대 초반에 만난 양경모 감독, 김유경 PD와 셋이 차린 회사예요. 필름을 바로 잘라서 붙이는 영화 기법을 하드컷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감독이 처음 제안했을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순간 로고나 타이포의 형상이 그려지더라고요. 왜, 영화가 시작될 때 제작사 이름이 뜨는 장면 있잖아요. 사실 후보엔 셋이 처음 만난 장소 ‘강남역 4번 출구’도 있었는데….
GQ 하마터면 합정역 5번 출구의 선배가 될 뻔했네요. 하드컷을 통해 그리는 그림이 있겠죠?
JH 상업 영화, 독립 영화, 단편 영화 등 영역에 제한을 두고 싶지 않아요. 드라마, OTT 시장에 맞춘 시리즈 작품을 기획, 발전시키는 과정에 있고요. 수많은 아티스트가 오가는 허브 같은 창구 역할을 했으면 해요. 아티스트가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놀이터.
GQ 정작 이제훈 대표는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고요.
JH 하하.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피드백을 받고 수용할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연출자의 자유예요. 제 마음 한구석에 계속 남아있어서 문제지만….(웃음) 확신과 피드백의 밸런스를 맞추면서 저도 많이 배우게 돼요. 배우로만 10년 넘게 살았는데 다른 분야를 겪으니 확실히 시야나 깊이가 달라졌어요.
GQ 10년 전 <파수꾼> 대본 어딘가에 제훈 씨가 꾹꾹 눌러쓴 글씨 기억나요. 중심과 초심.
JH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기억도 안 나요. 초심? 배우로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초심을 잃지 않았느냐, 반문에 답한다면 저는 그때보다 열망이 더 커졌어요. 경험하면 할수록 느끼는 성취감, 그리고 외로움, 슬픔, 공허함이 더 커졌어요.
GQ 마치 오늘 조명에 물든 얼굴처럼 말이죠. 또 구상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는지 궁금해요.
JH 사이코패스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예요. 내가 만약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을지 생각해봤어요.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만남이란 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진 않잖아요. 평범하게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거부할 수 없는 스파크가 튀면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헤헷.
GQ 실제로 이제훈이 사랑에 빠진 상대가 알고 보니 사이코패스였다면?
JH 내가 사이코패스가 돼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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