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에 도장 찍는 맛을 잊은 그대에게 바칩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여섯 팀이 만든 여섯 가지 로컬 스탬프.
GAPYEONG
가평은 당신에게 — 몇 년간 남편과 함께 머문 지역이다. 비록 지금은 일 때문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텃밭과 정원을 가꾸면서 산 그 기간은 우리의 많은 걸 바꾸었다.
첫 번째 인상 — 둥글고 낮은 산들이 만드는 평화로움, 고요함.
가평의 색다름 — 가평은 산과 강, 계곡이 대부분인 데다가 북한강 상수원 지역이라, 수도권에서 가까운 곳인데도 도심을 많이 벗어난 교외의 느낌을 준다. 특히 유명산, 운악산, 호명산 등 좋은 산이 많다.
영감이 된 풍경 — 우리가 살던 집 바로 앞에 잣나무 숲이 있었는데, 도시의 가로수보다 키가 5배는 더 큰 데다가 한치의 휘어짐 없이 직선으로 곧게 자란 잣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비현실적인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잣나무 숲에는 잣을 먹으러 오는 다람쥐가 많아 집 주변에서도 뭔가를 먹고 있는 다람쥐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잊지 않고 찾는 곳 — 가평에 ‘소희네’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 가평까지 간 적이 몇 번이나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맛집이다. 모든 메뉴가 맛있지만 ‘도토리 샐러드’를 가장 추천한다.
새롭게 안 사실 — 가평 면적은 서울의 1.4배나 되지만 인구는 서울의 0.6퍼센트 수준이라고 한다. 인구밀도가 낮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 낮은 줄은 몰랐다!
이름에 담긴 의미 — 평지나 큰 들이 있는 곳은 한자 ‘平(평)’이 많이 쓰였는데, 가평도 그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도장을 가장 먼저 놓고 싶은 곳 — 가평역. 사람들이 가평으로 기차 여행을 올 때 가평역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데 방문 기념으로 찍어갈 스탬프가 역에 있으면 좋지 않을까.
도장을 남긴다는 건 — 여권에 도장을 받을 때면 ‘너를 허용해주노라’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주 무뚝뚝한 사람이 손님에게 건네는 악수 같은 게 아 닐까.
POHANG
포항은 당신에게 — 어릴 적 방학 때면 포항 외할머니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외할머니 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지역을 떠올리면 설레고 포근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사이 포항은 바다를 낀 아름다운 관광지가 되었지만, 내 기억 속 포항은 유난히 많았던 나무들과 이 층 툇마루에 앉아 바라본 작은 감나무가 남아 있다.
첫 번째 인상 — 외할머니 집의 툇마루와 나무들.
포항의 특별함 — 잔잔한 구룡포 해변과 호미곶의 일출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 과메기. 청어 또는 꽁치를 겨울 동안 반건조시킨 음식으로, 김 위에 과메기와 초고추장, 마늘과 쪽파를 올려 먹는다. 나는 이 맛 때문에 겨울이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됐다.
영감이 된 풍경 —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던 나는 외할머니 집 계단에 걸터앉아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감나무를 종종 그렸던 기억이 난다. 포항을 상징 하는 바다와 호미곶 상생의 손보다 푸르고 견고한 나무가 포항에 대한 나의 선명한 인상이다.
잊지 않고 찾는 곳 — 죽도시장. 과메기는 물론 맛있는 식거리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새롭게 안 사실 — 포항시의 상징이 ‘해송’이라고 한다. 해송은 소나무과의 상록 침엽수인데,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으로 불린다. 바닷바람이 많이 부는 포항에서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고,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해온 수종의 하나로 포항의 영원한 발전을 상징한다고 하니 이번 스탬프 작업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이름에 담긴 의미 — 포항이라는 동네 이름은 18세기 초 통양포만호영의 남쪽에 자리를 잡은 대흥산(현재는 대안 골짜기)에 뿌리를 둔 형산강 북쪽 하구인 포항강(현재 칠성천) 부근이 이전에 갯미기라고 불린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갯미기는 갯목을 뜻하는데, 갯은 개울, 목은 머리에 해당하고, 이를 한자로 옮기면 개울 포(浦)와 목 항(項)이 된다.
도장을 가장 먼저 놓고 싶은 곳 — 호미반도 둘레길, 경상북도 수목원.
도장을 남긴다는 건 —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공기와 감정을 지류에 담아 간직하게 되는 것.
IKSAN
익산은 당신에게 — 고향이다. 지방 소도시의 주공 아파트 풍경과 기차역, 초중고 시절의 기억들이 박제된 곳.
첫 번째 인상 — 나른하다.
익산의 색다름 — 바쁜 대도시와 달리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요즘은 좀 처럼 흔치 않은 풍경이니까.
영감이 된 풍경 — 주요 철도 노선이 여러 곳 겹쳐 옛날의 익산은 기차역을 중심으로 꽤나 번성했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적부터 전설처럼 들었다.(교통이 발달했기에 조폭이 많았다는 카더라라든 지….) 특별히 목적지를 갖고 해당 도시에 내리지 않더라도, 환승지의 공항을 지날 때 역시 도장을 찍듯, 익산을 환승해 가는 여행객, 익산역을 스치는 많은 여행객이 도장을 이어서 찍으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잊지 않고 찾는 곳 — 대한서림과 풍년 제과. 초등학생 때부터 다녔던 곳인데 아직도 있어 추억팔이하는 마음으로 들러서 뭐라도 사온다.
새롭게 안 사실 — 익산시가 익산역을 유라시아로 잇는 역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가장 먼저 놓고 싶은 곳 — 익산 기차역.
YANGYANG
양양은 당신에게 — 2020년 4월부터 2021년 2월까지 파트너의 요양을 위해 살았다. 인생에 다시 없을 시간을 보낸 소중한 곳.
첫 번째 인상 — 따뜻한 느낌! 양기가 팍팍 느껴진다. 어떤 병도 치료해줄 것 같았다. 이름 두 글자에 이응이 네 번 들어가는 것도 멋지다.
양양에 남은 추억 — 33평짜리 신축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내려갔기 때문에 처음 살아보는 평수에서 파트너와 고양이 2마리와 발 뻗고 잔 기억이 가장 좋다. 집 앞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며 꽃과 바다를 보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도시에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커다란 자연을 느낄 수 있어서 몹시 행복했다.
양양의 색다름 — 서핑으로 가장 유명한 죽도에 가보면 이국적인 느낌이 들 어 좋다. 살아보니 여름엔 항상 서울보다 3~4도 낮은 기온을 유지해 시원한 느낌이 좋았다.
영감이 된 풍경 — 여권에 찍어주는 도장에 대해 알아보다가 그 지역에 도착 한 날과 떠난 날 이렇게 두 번 찍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도 양양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라 내가 들어간 날과 나온 날 도장을 따로 만들었다. 들어갈 때 도장은 가기 전 양양에 대해 가지고 있던 대표적인 이미지인 서핑, 물치항, 일출을 그려 넣었고, 나올 때 도장은 낮 달맞이꽃, 산책, 꽃을 좋아했던 파트너 등 양양에서 경험하고 좋아했던 개인적인 것들을 담고 있다.
잊지 않고 찾는 곳 —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동호 해변의 섭국과 양양읍에 있는 송이 닭강정이다. 그리고 집 근처 진전사를 좋아했다.
이름에 담긴 의미 — 양양은 한자로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이다. 동쪽 해변을 따라 세로로 긴 양양이라는 지역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해주는 말인 것 같다.
가장 먼저 놓고 싶은 곳 — 물치해수욕장 입구.
OKCHEON
옥천은 당신에게 — 나고 자란 대전광역시와 가깝고, 친한 친구가 정착한 곳이라 심호흡이 필요할 때 가벼운 마음으로 들르는 곳이다. 지역을 잘 아는 친구의 안내로 운이 좋게 구석구석 숨겨 진 풍경을 많이 접했다.
옥천의 첫 번째 인상 — 고요하게 반짝이며 흐르는 금강의 풍경.
영감이 된 풍경 — 옥천에서는 금강, 대청호 등 크고 넓은 물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곳에 방문하면 인적이 없는 강가에 앉아서 한참 동안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곤 한다. 지난 2월에 방문했을 때는 겨울 철새 가마우지가 강에서 노니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바라봤는데, 이를 통해 본 물의 반짝임은 색다르게 보였다. 또 아름답고 유명한 표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로 유명한 정지용의 ‘향수’ 배경이 옥천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전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잊지 않고 찾는 곳 — 옥천 주민이자 친구인 ‘호미’의 목장을 꼭 방문한다. 가드닝에 관심이 많은 친구라 정원을 꾸준히 가꾸고 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목장 풍경이 풍성하고 다채로워지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다. 이 친구가 소개해준 홍차 가게 ‘소정’도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도장을 가장 먼저 놓고 싶은 곳 — 금강휴게소. 금강을 바로 앞에 끼고 있어 휴게소치고는 좋은 풍경을 볼 수 있다.
도장을 남긴다는 건 — 여행 중에 여러 기념물을 획득하게 되는데 도장이 이들과 다른 점은 이미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책이나 공책 등)에 덧씌워진다는 점. 그래서 다른 기념물들에 비해 버려질 일이 적어 오래 간직되는 추억의 매개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 책 사이에 끼워두었던 단풍잎처럼.
GYEONGJU
경주는 당신에게 — 아내이자 스튜디오 파트너와 첫 데이트 때 방문한 곳.
경주의 첫 인상 — ‘벽이 없는 박물관’ 이라는 경주의 별명이 이 도시의 특징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서른네 살까지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 까닭에 한국사에 대해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경주에 대해서만은 매우 흥미로운 한국사를 많이 본 기억이 난다.
경주의 색다름 — 경주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아무래도 관광객에 더 가깝다.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기도 하고 그 밖에 여행자를 위한 편의 시설이 많다. 호텔, 리조트, 레스토랑, 축제 등 관광 관련 정보를 찾기가 매우 쉽다.
영감이 된 풍경 — 장소나 풍경보다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많이 두는 편이다. 영감의 소재로 석굴암 불상을 선택한 건 그 이유다. 도장만 봐도 단번에 경주 임을 알 수 있겠지?
이번 작업을 하며 새롭게 안 사실 — 경주가 신라의 수도였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너무 시시한가?
도장을 남긴다는 건 — 도장은 어딘가 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긴다. 당신이 그들을 만났다는 증거, 그곳에 갔었다는 증거. 간혹 유명인의 사인을 받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도장 역시 기억의 증거로서 힘을 발한다.
- 피처 에디터
- 전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