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2011.03.25이충걸

E.L.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가 공정한 유물론자라고 간주한다. 사실 대부분 이성의 측면으론 구석구석 균형이 잡혀 있다. 그래서 콘서트에 가는 게 아프리카의 가난을 줄이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현혹한다. 동시에 가난 구제를 위해 아시아에서 이산화탄소 방출량이 늘어나는 문제엔 반대한다. 때로 섣부른 음모설에 포박돼 ‘해수면을 높인’ 미국 정부를 비난한다.

그러고 보면, 지식인들조차 아파트를 고를 때 풍수를 고려하고, 별자리를 묻거나 사주를 보는 게 일상이 된 요즘이야 말로 모든 종류의 뉴에이지 문화와 비이성이 넘친다. 일반적인 글로벌 사회의 시민들조차 무엇을 믿고 생각하고 주장해야 할지 갈피를 못 찾는다. 이윽고 신을 믿지 않는 순간, 믿을 게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진다면 강한 누구라도 신앙이 필요할 것이다.

21세기의 종교는 영성과 불화와 비즈니스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다. 신앙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예외가 없다. 그런데 주된 종교 문제의 양상은 서로 다른 신념 간의 줄다리기로 드러난다. 스님들이 폭력 저항운동을 벌이고, 힌두교도들은 모스크를 신비로운 무엇으로 격상시키며, 극단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접한 지역에 수시로 출몰해 시비를 걸고, 미국 기독교도들은 시민 행동에 대한 법률 제정 방안을 모색한다. 이슬람교의 제국주의에 대응해 기독교가 ‘전투의 교회’가 될 거라고 위협하는 상황, 유대인을 멸절시키려는 아랍 인종을 박멸하자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거래는 똑같이 놀랍다.

결정적인 전투는 같은 종교 내에서 일어난다. 징벌하고 훈계하는 신을 믿는 이와 자비롭고 사랑을 베푸는 신을 숭배하는 자 사이의 갈등, 외면의 형태와 행동에 사로잡힌 족속과 순전한 영적 힘을 숭상하는 부류 간의 대립, 선한 목자와 절대적 지배력을 가진 교주 사이의 대치는 끊이지 않는다. 결국 각각의 신앙을 주재하는 복수의 신은 서로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임하고 만다.

믿음의 붕괴에 대한 전 세계적인 대답은 “피난처에서는 무신론자를 찾아볼 수 없다”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복음주의의 움직임이 없는 곳은 없다. 목사 자녀와 친구가 아니더라도, 거대 자본의 도시가 가진 모호함 속에서 천지 사방이 교회로 붐빈다. 동시에 한국 기독교가 변질됐다는 범용한 소리가 떠돈다. 믿음이라는 명목이 계속 성장하는 산업과 비슷해짐으로써, 기독교라는 상품 자체의 시장성은 나날이 확장일로를 걷는다. 상업적인 기독문화에서 ‘사랑’이란 돈을 가져가기 위한 단어로 위태롭게 퇴화되었지만, 대형 교회들의 치세는 무궁하기만 하다. 바깥에선 도처에 포탄이 떨어지는데, 자기만의 전투용 참호들로 둘러싸인 형국이랄까. 종교는 파벌정치를 뛰어넘는 문제들을 거론하지만, 종교 지도자가 자신의 캠페인 과녁인 교인들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방송사나 정치적 사안조차 종교적 프로파간다를 위해 그들에게 권리를 내준다. 어쩜, 유대교인과 이슬람교인이 신성한 고기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마취 없이 산 동물을 도살하도록 제정한 것과 참 비슷하다.

교회의 신을 경외하지 않는 이를 매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거짓 기독교인도 수시로 보인다. 신앙 자체도 사람들의 거처가 되는 한편, 만연하는 두려움을 이용해 그들을 윽박지르는 단서가 된다. 그렇게, 기독교를 도외시한 이들은 천주교가 포교되던 초기처럼 참수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진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 집단들에게서 제거된다.

그렇다면 지금 같은 왜곡된 신앙의 자장 아래서 초기 기독교 역사의 신성한 호를 그릴 수 있을까? 목회자들의 지나친 위엄과 위협적 통치를 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면 신앙이 더럽혀질까? 신이 매 순간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건 은총을 내리기 위해서일까? 예수님은 실족한 이웃 앞에서 그렇게 조소하거나 기망했을까?

기독교의 근원이 근본주의에서 광신주의로 변하는 것은 메아리가 아니라 전조다. 급기야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홀로 드리던 기도는 사람 많은 집회, 서커스로 변한 부흥회, 비싼 식당에서의 조찬 기도회로 변했다. 초월적인 신은 세속적인 차원으로 강등되어, 성미 급한 군사 지도자이자 금력으로 흠뻑 젖은 땅에 집착하는 부동산 거물이 되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 혐오증’으로 ‘박해’ 당하는 희생자가 되고, 초막 위에 세워진 진짜 교회는 아무도 가지 않아 먼지 덮인 강대상만 남았다.

인생이라는, 뜻밖의 일의 연속에 부대낄 때마다 맘속으로 묻는다.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저 궁창 위에서 불칼을 쥔 채 나를 정죄하려는 재판관이 아니라, 양수경 노래처럼, 아, 내가 외로울 때 날 위로해주던 그런 예수님은? 그리고 지금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원한 세속적 복락을 누리려는 가짜 종교에 저항하는 용기, 이 복잡한 세상에서 다 함께 이루는 선의의 목표, 스스로 고요하게 돌아보고 묵상함으로써 과거를 묻고 인생을 돌파해 나가는 평범한 지혜라고.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