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이 미적지근해서인지 파나메라에서 내리는 남자의 등판이 젖어 있고, 이마 라인은 반짝거린다.
반바지 에어컨이 미적지근해서인지 파나메라에서 내리는 남자의 등판이 젖어 있고, 이마 라인은 반짝거린다. 습도 90인 아열대 기후 속에 던져진 것처럼 척척한 오후, 길가 카페에서 밖을 내다보는 내내 남자의 여름 옷이 얼마나 목불인견인지 충분히 만끽한다. 벌거벗는 대신 천 쪼가리 하나 두른 여자가 차라리 수치를 아는 것 같다.
축구복, 크록스 신발, 조끼, 스키니 진, 보드복 스타일의 샤론 팬츠, 아라비안 스카프, 어깨에 두른 스웨터, 가짜 디자이너 티셔츠가 그 자체로 온당치 못하달 건 아니지만…. 하지만, 반바지에 양말을 신은 채로의 샌들. 그것도 장물을 모아놓은 데서나 건진 것 같은 반바지에 등산 양말을 신을 줄이야. 비키니 위에 코트를 껴입은 것 같은 그 형용은 노인에게만 허용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도 올해, 디자이너들의 즐거운 야합 속에 샌들과 양말이 트렌드의 최전선에 서다니.
물론! 반바지는 힘들다. 너무 짧으면 꼬마 같고, 꽉 끼면 여자 같다가, 이윽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에서 본 히틀러 소년단원으로 보인다. 무릎을 덮는 카프리 바지도, 고기잡이 배에 타지 않는 이상 웃길 뿐이고, 통 큰 배기 바지도 메시 다리통이 아니라면 후줄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신경 쓴 듯 무심해뵈는 채로 어두운 리넨 바지, 양말 없이 신은 스웨이드 로퍼를 잘도 갖추곤 더워도 스타일을 고수하는 이탈리아 남자들을 보면 다양성이 언제나 인생의 유희가 아니란 걸 배우지만, 이 더위에 블레이저와 보타이와 페니 로퍼를 착용한 채 제2의 유년기를 보내는 한국 지큐맨 군대도 살기 참 뻑뻑하다. 하지만, 옷을 시원하게‘만’ 입는다면, 더위는 빨리 지나갈지 몰라도, 여자 마음은 더 빠르게 지나갈 테다.
섬 모든 나라의 문화적 특성은 상투적으로 정의된다. 질주하는 독일인, 영혼을 찾아 헤매는 러시아인, 무례한 이탈리아인이라는 표현은 동시에 상식이 되었다. 그러므로, 베토벤의 음악은 냉혹한 진실을 향한 채 분노했으되, 이탈리아 것일 수 없다. 보티첼리의 회화는 표면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했지만, 절대로 독일 것일 수 없다. 희비의 높낮이가 뚜렷한 셰익스피어의 감수성은 전형적인 영국의 것이다. 귀엽고, 멋지고, 재미있는 비틀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새빛둥둥섬을 보았을 때, 절망은 즉각적으로 연구개를 드러냈다. 충격은 때로 매력적인 충돌이고, 관심을 부르는 위험함이며, 위기를 완화시키는 이벤트일 수 있으나, 이 난잡하고 갑갑한 풍경은 어디에서 온 걸까. 그런데, 심정적으로야 그렇다쳐도 지리적으로도 접근하기 고단한 저 부표 같은 섬이야말로 모든 게 과시적이고, 매일 기절할 것 투성이인 서울의 것 아닌가! 그럼, 이를테면 시스틴 성당과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한국에서 나올 수 없는 이유라고 지랄하기도 객적인 일이다. 누가 무슨 상관이라고?
하지만,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음식처럼 먹으면 탈 날 것 같으면서도 음식 낭비 같아 버리지 못하는 죄책감, 결국은 쓰레기를 발생시키는 것 자체가 범죄라는 기분…. “먹고살기 바쁜데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라는 소리는 이전 세대의 클리셰였는데, 지금 세대는 무엇이 쓸데없는 짓인지조차 모른다.
대학교 우리에게 대학은 세계 평화보다 중요하다. 교육받지 못한 부모에게 자식이 대학교에 가는 건 헌법보다 가치 있는 명제라서. 자녀 교육의 강박적 지지자로서 부모는, 대학에서 배우는 학술이나 교양보다, 짧은 시간 새 분야에 배치 가능한 자격을 위해 학비를 지불한다. 예이츠가 얼마나 위대한진 몰라도 그 친구와 친해지기 위해 몇백만 원 내는 건 확실히 비싸고말고. 학비가 오를수록 아침 밥상에서 “그깟 생물학 학위는 따서 뭐 해?” 같은 질문은 영원히 멎지 않는다.
예전에 대학 교육은 아무나 못 먹는 신선로 요리 같았다. 들어가기 힘든 만큼 학업을 마치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는 가르치는 만큼 분류한다. 결국 가장 효율적인 결혼 중매 역할을 맡았다. 가혹한 거래지만, 전에 대학교 학비는 그 가치를 약속했기 때문에. 그러나, 학위를 받는 사람들이 지천인 지금 대학교의 가치도 무지하게 낮아진 판에 학위가 특별한 자격일 리 없다. 죽도록 공부해서 전과목을 통달하고 주야로 인정받는다 해도,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교육 단체가 무계획의 고용자를 양산한 셈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기꺼이 시간을 탕진했기 때문에.
중산층도 감당할 수 있는 대학교는 분명 실패자 없는 게임일 테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생이 엄청난 비율로 대학에 진학한 통계라면, 얼마나 더 대학생이 ‘필요’하다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완전히 시간 낭비니까, 사회의 새로운 개척자가 되고 싶다면 강의실을 뛰쳐나오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대학학위는 기본적 성취로서의 지적 능력 혹은 더 깊은 지식으로서, 누가 무엇을 배웠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신호 장치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버릴 수 없다….
- 에디터
-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