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다시 만난 아이돌의 세계

2021.08.06김영재

승승장구하는 케이팝 속에는 생소하고 독보적인 세계가 있다. 어지러울 만큼 화려한 무대와 음악, 눈부신 경쟁으로 웅장하게 쌓아 올린 아이돌 왕국. 영원히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곳에 대한 기록들.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미묘한 동거

한반도가 배출한 팝 아이콘 방탄소년단의 노래 ‘IDOL’은 이런 가사로 시작한다. “날 아티스트라고 불러도 돼, 날 아이돌이라고 불러도 돼(You can call me artist, You can call me idol)”. 새로운 스타 탄생으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LOVE YOURSELF’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곡으로 지금의 성공을 즐기자며 지화자 얼쑤 난장을 치는 가운데, 아티스트와 아이돌 두 단어의 병렬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방탄소년단 정도로 성공한, 심지어 자신들이 직접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명성을 얻은 아이돌마저도 아티스트와 아이돌 사이 촘촘히 메워진 갈등을 신경 썼다.

‘예술가’를 뜻하는 ‘아티스트’는 문화 예술을 행하는 누구나 조금쯤 부담스러워하는 호칭이지만, 특히 아이돌에게는 금기되다시피 한 단어였다. 자신을 ‘아티스트’라 당당히 칭하는 아이돌은 쉽게 미디어와 대중의 조롱거리가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돌은 어쨌든 ‘만들어진다’는 점이었다.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무엇보다 중요한 성골 요소로 여기는 예술가 집안에서, 인위적 향취가 더해진 무언가는 예술이라는 호칭을 하사받기에는 격에 맞지 않았다. 멤버 발탁부터 그룹 구성, 음악, 이미지 메이킹까지 제작기획사와 담당 전문가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갈 수밖에 없는 아이돌은 아마도 영원히 기본 조건 충족 미달로 예술가 문턱에서 고배를 마실 운명이었다.

질릴 정도로 견고한 이 같은 예술의 벽을 깨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아이돌’로 커리어를 시작한 거의 모든 이의 역사는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위한 인정 투쟁의 역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휘뚜루마뚜루 아이돌이 되어버린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1세대의 경우, 그룹 활동을 마치고 솔로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문턱에서 아티스트 영역에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애쓴 만큼 손가락질도 가장 많이 받은 시절이었다. 1세대가 피땀 어린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사이,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곡을 쓰고 부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많은 이가 깨달았다. 싱어송라이터와 진정성 신화는 아이돌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빅뱅의 지드래곤은 “아이돌은 남이 만든 노래에 맞춰 입만 벙긋대는 꼭두각시”라는 곰방대 부대 위에 떨어진 특급 폭탄이었다. 데뷔와 동시에 작사 작곡 모두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그는, 데뷔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거짓말’, ‘마지막 인사’ 같은 메가 히트곡을 연이어 터뜨리며 “아이돌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예상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던 자작곡 요법은 이후 아이돌 팝 내부에 자리한 다양한 팩터를 만나며 점차 진화해갔다. 박재범, 지코처럼 뛰어난 실력으로 장르 음악 신에서 인정받거나, 선미처럼 그룹 활동 이후 뛰어난 셀프 프로듀싱 능력으로 새삼 주목받는 이들도 점차 늘어났다. 음악만이 아닌 퍼포먼스까지 창작하며 ‘D.I.Y. 돌’이라는 신박한 표현을 이끌어낸 세븐틴도 있었다. 그 가운데 태민의 존재에도 주목하고 싶다. 그는 직접 음악을 만들지는 않지만 태민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의 아이돌 팝의 가장 큰 매력인 완성도 높은 멀티 콘텐츠의 단단함을 지속해서 성장시켜 나가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전적 의미의 ‘아티스트’들은 갖지 못했던 새로운 ‘아티스트’ 영역의 탄생. 아이돌이 단지 기존의 아티스트 개념에 흡수되는 것이 아닌, 아이돌만이 가진 아티스틱함을 뽐내고 그것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갈 시기, 그리 머지않았다.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SMCU를 따라나선 광활한 여정

2015년 11월 10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SM엔터테인먼트. 간이 인터뷰 룸에 도착한 기자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이성수 SM엔터테인먼트 프로듀싱본부장(현 대표이사) 은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150평쯤 되는 이 공간은 3면의 벽이 화이트보드로 돼 있었다. 보드 위에는 어지러운 글씨와 도표가 가득 차 있었다. 이 본부장은 일일이 여러 개의 블라인드를 내려 가리느라 분주했다. “이게 데뷔를 앞둔 대형 프로젝트 그룹의 세계관을 정리해놓은 거라서 공개하기가 좀…. 양해 부탁드립니다. 단, 책 한 권 분량으로 그룹의 탄생 과정을 스토리화 해놓았으니 앞으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의 말은 그로부터 두 달 보름 뒤 현현했다. SM타운 코엑스 아티움에서 열린 프레젠테이션 쇼 ‘SM타운: 뉴 컬처 테크놀로지, 2016’을 통해서다. 이날 이수만 SM 총괄 프로듀서는 스티브 잡스처럼 왼쪽 뺨에 무선 마이크를 대고 SM의 상징 색인 연분홍빛 셔츠를 입었으며 밑면이 하얀 캐주얼화를 신고 무대에 섰다. “오래 꿈꿔온 한류 3단계의 마지막 단계를 올해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단순 수출하는 1단계, 현지와 합작하는 2단계를 거쳐 현지인들에게 SM의 문화 기술을 전수하는 마지막 단계에 마침내 다다랐습니다.” 이성수 본부장과 이수만 프로듀서의 비밀 프로젝트는 세계 n개의 도시(city)로 무한 확장되는 아이돌, NCT였다.

돌아보면 SM은 늘 먼저였다. 1996년 H.O.T.를 데뷔시켜 케이팝 아이돌 시대를 열었다. 2000년 H.O.T. 베이징 콘서트는 언론에 ‘한류’라는 단어가 등장한 계기다. 2011년 SM타운 프랑스 파리 콘서트 때 현지 팬들의 플래시몹이 조명되며 가요 대신 ‘케이팝’이란 단어가 일반화됐다. 기획의 중심에는 늘 이수만이 있었다. S.E.S.(1997년)를 통해 글로벌 A&R과 송 캠프 문화를 한국에 도입했다. ‘동방에서 신이 일어난다’던 동방신기(2004년)의 이름 넉 자 동양 세계관, 12명의 초능력 외계인들 ‘엑소’(2012년)의 개념 구상이 모두 이수만 프로듀서의 머리에서 나왔다.

2021년 5월 15일. 그가 5년 전인 2016년에 “이제 마지막 단계”라고 했던 그것이 마지막 단계가 아님이 밝혀졌다. SM이 유튜브에 공개한 ‘aespa 에스파 ‘ep1. Black Mamba’ -SM Culture Universe’라는 10분 28초짜리 영상이다. SM은 SMCU(SM 컬처 유니버스)의 탄생을 선포했다. 약간 아쉬운 데뷔 곡으로 생각된 에스파의 ‘Black Mamba’는 복선, 괜찮은 후속곡 ‘Next Level’은 SMCU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큰 그림은 작은 그림을 부각하게 마련이다.

아바타 아이 ae와 인간의 싱크를 방해하는 검은 능구렁이 블랙 맘바의 존재, 싱크아웃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아이 ae 에스파를 인도하는 나비스 naevis의 출현 등 특급 ‘떡밥’들을 이른바 카우만(CAWMAN: Cartoon, Animation, Web-toon, Motion graphic, Avatar, Novel) 장르의 형식에 맞춰 소개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뺨을 갈기려는 저 SMCU에 상정된 혼돈의 주무대는 소위 광야 KWANGYA다. SM 팬, 이른바 ‘핑크 블러드’들은 성경 속, 아니 SMCU 속 광야를 찾아나서는 여정에 이미 올랐다.

아이린 & 슬기의 ‘놀이’ 뮤직비디오 말미에서 실마리를 얻고, 엑소, NCT의 신곡 가사에 ‘광야’가 등장했음을 인지한다. 이것은 어쩌면 아이린과 슬기 말마따나 거대한 놀이에 불과할지도, 다다를지도 모른다. 판이 열렸다. 이전을 앞둔 성수동 사옥에서 어떤 광야가 지구인들 앞에 나타날지 지켜볼 일이다. 임희윤(<동아일보> 기자)

“ ‘아이돌’로 커리어를 시작한 거의 모든 이의 역사는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걸그룹, 존재 자체의 증명

오는 8월 방송을 앞둔 걸그룹 서바이벌 <걸스플래닛999 : 소녀대전>의 중심에는 선미와 티파니가 있다. 2007년 데뷔한 이래 줄곧 2세대 걸그룹을 대표해온 두 그룹,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멤버인 두 사람이 같은 프로그램에서 나란히 서다니, 정말이지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는 유구한 믿음이 있다. 첫째, 여성은 (남성보다) 덜 프로페셔널하다. 둘째, 여자들끼리의 우정은 (남자들의 우정보다) 얄팍하다. 그러나 솔로로, 그룹으로 여전히 활약하고 있는 ‘걸그룹 멤버’들은 이런 믿음을 정면으로 부숴버린다.

케이팝 아이돌의 혹독한 데뷔 과정은 널리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로듀싱 능력을 포함한 ‘실력’이 평가의 주요 기준이 되는 남자 아이돌에 비해 여자 아이돌에 대한 평가는 지나칠 정도로 외모에 맞춰져 왔다. 걸그룹은 데뷔 초 외모 비하 발언에 과하게 노출되며, 외모가 뛰어나면 콘셉트를 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지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다이어트 식단이나 시술 여부에 대한 이야기가 가십란을 차지한다. ‘관계성(우정)’에 대해서는 어떤가? 멤버 사이의 견제, 다툼, 불화는 남녀 그룹을 불문하고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큰 성공을 거두지 않는 이상 노력의 대가를 보장받기 어려운 산업 구조, 십 대 중후반 나이에 강인한 멘털과 초월적인 연습량을 요구받으며, 가족들과 떨어져 합숙 생활을 하는 상황을 모든 멤버가 건강하게 다 견뎌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유독 걸그룹 ‘불화설’은 대개 한쪽의 일방적 폭로로 제기되며, 정확한 물증이 없는 ‘썰’임에도 미디어의 과도한 관심과 심증 속에 급속도로 확산된다. 편집된 과거 영상이나 특정 장면이 유튜브나 커뮤니티에 유통되고 가해자로 지목된 멤버를 향한 ‘딱 봐도 여우같다’, ‘성깔 있을 것 같다’ 같은 심증이 비난의 근거가 되는 식이다. 이유는 하나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여적여’ 신화에 부합하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이기 때문이다. 정작 법률, 채무 문제로 불화가 생기거나, 명확한 범법 행위를 저지른 멤버로 인해 그룹의 존속 및 완전체 활동이 어려워진 경우는 보이그룹의 수가 월등히 많은데도 말이다.

지난 6월 케이팝 팬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은 <문명특급-컴눈명(다시 컴백해도 눈 감아줄 명곡)> 프로젝트는 활동 당시 상대적으로 저평가받은 나인뮤지스와 애프터스쿨을 멋지게 재소환했다. 소환된 것은 그 시절의 추억만이 아니다. 재결성 무대를 위해 2주 자가격리까지 감수하며 발리에서 날아온 리더 가희와 하와이에서 온 베카까지. 한자리에 모인 애프터스쿨 멤버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들이 당시 얼마나 무대에 프로페셔널하게 임했는지, 그룹에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지를 드러냈다. 이에 회답하듯 재결합한 ‘Bang!’ 무대는 공개 한 달 만에 710만 회의 유튜브 조회수를 기록했다. 지난 7월 10일에는 2012년 ‘왕따 논란’을 겪었던 티아라의 원년 멤버 네 명이 <아는 형님>에 출격해 팀의 건재함을 알리기도 했다.

살아남아 발언권을 가진 자들의 말이 항상 옳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걸그룹의 무결함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뛰어난 실력과 외모, 인성을 갖추기를 요구받는 동시에 언제든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선들과 싸우며 그 시간을 버티고 살아남은 걸그룹 멤버들은 그 존재 자체로, 여성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편견에 정면으로 반박한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예는 무수히 많다. 최장수 걸그룹으로 2019년에도 완전체 컴백을 했던 브라운 아이드 걸스와 얼마 전 데뷔 10주년을 맞이한 에이핑크, <캠핑클럽>을 통해 뭉쳤던 핑클, 해체 후에도 결혼하는 멤버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던 원더걸스와 레인보우, 여전히 서로의 생일을 챙기고 안부를 묻는 2NE1과 지난해 결성 10주년을 기념한 씨스타, 서로 힘이고 삶이라고 말하는 걸스데이, 프로젝트 그룹으로 1년간 활동했을 뿐이지만 얼마 전에도 5주년 만남을 가졌던 아이오아이…. 그리고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로가 서로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음이 명백한, 언제든 완전체 결합의 가능성을 열어둔 소녀시대까지.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의 세계를 부수기 위해 돌아온다.” 장기간 성폭력을 저지른 팀 주치의를 고소하며 미국 운동계에 ‘#Me Too’ 운동을 쏘아 올렸던 체조팀 선수들이 사용한 이 문구는 편견과 평가 절하의 시기를 버텨내고 고유의 존재로 우뚝 선 관록의 걸그룹 멤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세상도 조금 변했다. ‘걸크러시’라는 표현이 대중화되고 ‘여덕(걸그룹의 여자 팬)’의 존재가 가시화됐으며, 케이팝 아티스트의 위상 자체도 달라졌다. 예능 프로그램의 MC들이 걸그룹에게 맥락없는 애교를 요구하거나, 스무 살 남짓한 여성의 몸을 온 미디어가 조각내 ‘꿀벅지’ 같은 단어로 지칭하는 일도 확연히 줄었다. “요즘은 라이벌 이런 질문 안 받잖아.” 미디어가 만들어낸 대결 구도와 관계없이 항상 좋은 동료였던 선미와 티파니는 이제 ‘케이팝 마스터’가 되어 함께하는 방송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롤 모델을 보고 자란 지금 걸그룹 멤버들의 미래는, 또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무대 위의 모두에게 일단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다. 이마루 (<엘르> 피처 디렉터)

“유독 걸그룹 ’불화설’은 대개 한쪽의 일방적 폭로로 제기되며
미디어의 과도한 관심과 심증 속에 급속도로 확산된다.”

기회와 심판의 땅이자 시작점

대국민 오디션에서 대국민 사기극까지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명성과 비난이 함께 따라왔다. 사건·사고나 문제점도 많았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당시 순위권에는 들지 못했어도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끝내 데뷔해 성과를 내기도 했다. 걸그룹과 보이그룹을 막론하고 오디션 프로그램은 기회의 땅이자 절대다수와 공유되는 심판의 땅이다. 그러한 땅에서 케이팝 그룹을 구성하는 아티스트, 혹은 그룹이 생겨났다.

군 복무 후에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출연한 엔플라잉의 유회승은 다른 참가자였던 위아이의 김동한에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제작 환경을 두고 “깨끗한 군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오디션 프로그램은 치열하면서도 거칠고 힘든 현장에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깨끗한 군대가 꽤 많은 보이그룹을 탄생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디션 프로그램은 단순히 TV 프로그램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큰 세계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프로그램에 등장했어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거나 팬덤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SNS나 정보가 빠르게 알려질 만한 인터넷 환경도 아니었고,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을 데려갈 소속사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획사도 많아지고, 연습생의 팬덤도 생겨날 만큼 환경 자체가 바뀌었다. 그래서 오디션 프로그램에 잠깐 얼굴만 비추더라도 화제가 되는 경우가 있고, 그들의 근황을 추적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연습생이 많아진 상황 속에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 각 기획사의 자체 오디션 프로그램, 그리고 대망의 <프로듀스 101>부터 이어지는 최근의 프로그램들이다.

박진영과 싸이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라우드>를 봐도 알 수 있듯 기획사에서 제작하는 프로그램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빅뱅부터 2PM, 위너, 아이콘은 물론 몬스타엑스와 트와이스까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형태로 데뷔했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탈락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빅뱅 더 비기닝>은 장현승을 남겼고 <열혈남아>는 윤두준을 남겼다. 기획사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탈락하더라도 다른 기획사에서 데려가거나 다시 데뷔 조로 남아 이후에 데뷔하는 경우도 있다. 경쟁에서 밀려도 주목을 받으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연습생이 워낙 많아지니 업계의 운영 방식이 달라졌고, 연예인도 스포츠 선수처럼 기획사를 물색하고 FA가 되는 등의 시간을 겪기도 한다. 마치 유스팀과 2군에서 스타가 나오듯 아이돌 그룹도 온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수면 위로 오르는 경우가 생겨났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는 많은 문제점을 떠안았지만 결국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의 최정상기를 만들어냈다. 공중파와 종합 편성 채널을 막론하고 비슷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같은 채널에서도 <아이돌학교>를 통해 프로미스나인을 공개했다.

앞서 오디션 프로그램이 기회의 땅이자 심판의 땅, 혹은 큰 세계의 시작점이라고 했지만, 오디션 프로그램 자체가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돌이켜보면 놀랍기도 하다. 당장 <프로듀스 101>의 첫 시즌을 도화지의 가운데 쓰고 그 위로는 여기서 등장한 멤버와 탄생한 그룹을, 옆으로는 파생한 프로그램을, 아래에는 파생한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이들과 이들 사이의 관계, 회사, 이야기까지 써보자. 아마 여백이 모자랄 수도 있고, 채우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이다. 여기에 올해 공중파에서 계획한 오디션 프로그램만 해도 <방과후 설렘>을 비롯해 몇 개가 된다. 여기에 <걸스플래닛999 : 소녀대전>까지 생각하면 여전히 오디션 프로그램은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예 데뷔조차 무산되는 사례가 생기는가 하면 팀이 결성되어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의 프로그램들은 서사를 만드는 데는 강하지만 그 서사를 끌고 가서 세계관이라는 완성된 형태로 펼쳐놓은 뒤 이어갈 지구력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사례가 쌓였기에 이후를 기대하는 것도 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블럭(음악 칼럼니스트)

“기회의 땅이자 심판의 땅, 혹은 큰 세계의 시작점인 오디션 프로그램
자체가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놀랍기도 하다.”

이달의 소녀가 쏘아 올린 세계

2021년 6월 28일은 ‘이달의 소녀(LOONA)’가 새 앨범 <&>으로 컴백하는 날이었다. 타이틀 곡 ‘PTT(Paint The Town)’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 공개되고 일주일 동안의 조회수는 3천5백만 뷰가 넘었다. 팬으로서 다른 이들의 반응이 궁금해 유튜브 댓글 창을 열어보았는데 안타깝게도 모조리 영어라 뉘앙스까지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그들 대부분은 이달의 소녀의 열렬한 팬인 듯했다. 다음 날부터 뮤직비디오 리액션 영상이 잇따라 올라왔다. 성별과 국적, 인종을 가리지 않는 이 바지런하고 열성적인 리뷰어들은 외국인다운 커다란 액션으로 이번 노래가 발리우드풍이라는 데 놀라움을 표했다. 그리고 흥겨운 리듬에 다크하고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보이는 데 더한 놀라움을 보였다.

비슷한 기간 국내에서 이달의 소녀는 멤버인 츄를 중심으로 각종 예능 프로그램과 유튜브 콘텐츠에 출연했으며, 죽음의 음악방송 스케줄을 이어갔다. 케이블 채널에서 1위를 한 번 했지만 실제 음원 사이트나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에서의 순위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다. 쉽게 말해 이달의 소녀는 아직 대중적이지 않다. 열정적인 팬들이 있으나, 다른 그룹보다 도드라진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패한 그룹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착한 그룹도 아닌 상태에서 아이돌 특유의 완벽한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모든 무대와방송에서 열심인 상태. 다소 키치한 이름이 이제야 막 친숙해지기 시작한 정도의 인지도.

‘글로벌’은 이달의 소녀를 국내에 소개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다. 분명히 국내 위주로 활동했건만 인기와 화제는 해외로부터 체감된다. 해외 위주로 활동한 것도 아니고, 1백 퍼센트 영어 노래를 타이틀로 삼지 않았으며, 심지어 12명의 멤버 중 비한국인 멤버는 홍콩 출신인 비비뿐이다. 하지만 이달의 소녀는 ‘LOONA’라는 그룹의 영어식 이름으로, 몇몇 티어 그룹 못지않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한계가 뚜렷한 내수 시장을 박차고 나와, 철저하게 기획된 세계화의 정점이 바로 LOONA라는 그룹이다. 더는 우연에 기대지 않는 방식으로 다른 언어의 팬들과 만났다.

이달의 소녀 특유의 복잡하고 방대한 세계관은 케이팝 문화에 심취한 해외 팬들에게 훌륭한 소비재이자 놀이의 재료가 된다. 코로나 시국에 해외 콘서트와 팬 미팅은 불가한 바, 팬들이 최대한 이달의 소녀의 세계관인 ‘LOONAverse’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음악과 음악, 영상과 영상 사이 퍼즐을 심어두는 식이다. 멤버들은 각기 다른 색깔과 동물과 꽃을 상징하는데, 이는 데뷔에서부터 유닛 활동과 완전체에 이른 지금까지도 고왕국의 지도처럼 구불구불 이어진다. 이 세계관을 아는 팬이라면 ‘PTT(Paint the Town)’ 안무 중, 올리비아 혜의 할퀴는 동작에 내적 환호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올리비아 혜는 이 세계관 안에서 늑대 역을 맡고 있다.)

세계관의 구현은 대부분 뮤직비디오에서 일어난다. 뮤직비디오의 제작을 맡은 디지페디는 작품마다 콘셉트와 서사를 충실히 담아낸다. 특히 ‘Butterfly’는 완전체로서 이달의 소녀의 지향점이 극적으로 담긴 파노라마와 다름 아니다. 노래 자체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이 노래를 담은 영상에서 한국의 소녀 그룹은 해외의 여성 시민으로 나비효과처럼 치환된다. 세계 곳곳에서 나비의 몸짓처럼 소녀들은 그들을 가로막은 벽을 깨겠다는 듯 자유롭게 춤추고 달린다. 그중 한 여성은 히잡을 쓴 채 달리는데, 이 다양성과 용감함이 바로 LOONAverse의 무한 동력이자 우주에서의 내비게이션일 것이다. 그들의 다음 궤도는 어디일까. 그곳이 어디든, 나도 거기에 있고 싶을 뿐이다. 서효인(시인)

 

    피처 에디터
    김영재
    일러스트레이터
    조성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