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산 기술의 딜레마는 기실 수태 방법이 아니라 금기에 달려 있다. 증조할아버지의 냉동 정자가 몇 세대 뒤에 쓰인다면,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그의 어머니의 종조부가 되는 동시에 그의 증조부의 배다른 형제가 된다.”
마흔 중반에 미국 시민권이 있는 한 여자는 올가을, 뉴욕에서 정자은행을 이용할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거치는 경로로 결혼에 안착하는 과정 자체가 막연할뿐더러 그럴 겨를도 인내심도 없었다. 나이 든 미혼 여자를 과녁으로 한 모욕이 쌓여서는 아니었다. 그녀가 가장 불안해하는 건 아이를 낳지 못한 채 폐경이 됐을 때의 생물학적 진공 상태였다.
그 얘기를 듣는데, 꼭 일흔에 춤을 배우고 예순에 코를 세우려는 사람을 볼 때처럼, 이해야 되지만 꼭 그럴 것까지야, 싶은 기분이 되었다. 남의 삶에 뭐 하나 보태준 것도 없는 채 헤프게 참견하려는 마음이 사랑인지 오지랖인지는 처음부터 답이 나와 있지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이 이스라엘 부족에게만 구전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를 만든다는 게, 그에게 우주를 주었다 도로 뺏는 일이란 걸 모른다면 부모 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아이에겐 태어난 순간부터 언젠가 끝나버릴 삶, 실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니까. 게다가 가족은 죽어야 끝나는 관계. 아니, 죽어도 끝나지 않는 무시무시한 관계 아닌가.
그녀의 갈망을 흡수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우림 속에서 같이 안 산다는 이유로 소외돼 저 홀로 머리 희끗해지는 수컷 포유류의 곤경과는 양상이 달랐다. 아이를 원하는 여자의 뒤늦은 집요함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녀가 불안정한 세계시민주의자거나 괴기스러운 외래종이라서?
사실 그녀의 각오는 어딘가 거스르는 데가 있었다. 인간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집단은 시간이 흘러도 유지하는 ‘재생산’을 염두에 둔다. 혈통이나 결혼을 매개로 한 관계 분류법과, 친족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친자 관계의 규칙 속에서 사회는 동시에 불임을 다루는 메커니즘도 가진다.
현대 테크놀로지는 그렇게 생물학과 사회적 부성, 갈등과 질서의 영역을 파고든다. 아이가 필요한 이들은 인공 수정, 난자 공여, 수정란 냉동, 체외수정, 대리모를 포함한 생식 기술로 불임 상태에 강력하게 대응한다. 주말의 시내 백화점, 쌍둥이를 위한 두 개의 유모차 행렬은 지금이 뭔가 심상치 않은 시대이며, 우리가 사는 방식이 어렴풋하게만 이해되는 힘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맹렬히 인식시킨다. 동시에 세상은 포식성의 여자들과 강건한 모유 수유자들의 것이 되었다고 약을 올린다.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불임인 부부가 아이를 갖는 과정에는 산모의 굉장한 수고와 엄청난 비용이 따르지만 사회적 합의와 도덕률, 합법화된 개념과 철학적 기준에 반하진 않는다. 문명의 가장 안전한 장치로서 ‘병원’과 ‘의사’가 입회하기 때문에. 그러나 모르는 사람의 정자로 태어난 아이에겐 천문학적 경우의 수가 주어지고 말 것이다.
그 애한테는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가 있을 것이다. 한 어머니와 두 아버지, 두 어머니와 두 아버지, 세 어머니와 한 아버지를 가지기도 할 것 이다. 수정란을 기부한 여자와, 자궁을 빌려준 여자와, 법적 엄마가 되는 여자, 세 사람이 개입하는 일도 벌어질 것이다. 실험실에서나 있을 법한 가설들이 무서운 형태를 띠면서 사태는 꼬일 대로 꼬일 것이다. 사망한 남편의 냉동 정자로 수정하려는 과부, 하나의 수정란으로 착상하려는 레즈비언 커플, 마음에 드는 짝이 생길 때를 대비해 난자를 얼려 보관하던 중 어쩌다 안 내키는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 여자, 선배 남편의 정자로 수정 했지만 약속과 달리 아이를 안 내주려는 여학교 후배, 대리모가 장애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고용’해놓고도 아이를 거부하는 부부….
재생산 기술의 딜레마는 기실 수태 방법이 아니라 금기에 달려 있다. 증조할아버지의 냉동 정자가 몇 세대 뒤에 쓰인다면,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그의 어머니의 종조부가 되는 동시에 그의 증조부의 배다른 형제가 된다. 이론적으론 선조가, 정서적으론 선조의 환생이 되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우리가 모으는 사실들은 다양하고도 대표적인 인간적 경험이되 나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파생되는 문제는 두 개의 그늘 속에서 헤맨다. 자연의 섭리(라는 토템 숭배)와 자존 사이의 균열. 평화와 질책, 안도감과 죄책감의 반복. 분석적이지만 본능적으로 육박해오는 선택의 쟁점. 문제는 끝도 없이 격화된다. 사회적 부모와 생물학적 부모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권리는 무엇일까? 그들의 부모 역할은 아예 다른가? 법은 합법적 아버지와 생물학적 아버지 중 누구를 옹호할까? 관련된 사람끼리는 꼭 익명이어야 할까?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감정과 에로티시즘을 인위적으로 배제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모두 사물의 질서와 문화적 규준에 기초했을까? 종교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섹스의 규율은 그 자체로 옳은가? 태어난 이상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사회의 내부 논리에 개인이 반드시 응해야만 할까?
통념과 그에 따른 올바른 처신 사이의 관련성이 한껏 느슨해진 지금, 가정이라는 구조는 두 사람이 결합하여 아이를 낳는 것만으론 완결되지 않는다. 생물학적 친족과 사회적 혈연관계가 더이상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결손가정이란 말 자체가 워낙 애초에 글러버린 까닭도 있지만.
어떤 의미론 요즘 라이프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불멸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자꾸 상기시켜 주니까. 내 말은, 수태의 방법 역시 피임처럼 철저히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섹슈얼리티에서 번식은 도저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긴 하지만. 그러나 이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것이다.
- 에디터
-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